안양지역얘기/담론

[이한성]이야기가 있는 길-16/ 바위 속 마애종이 덩그렁 울리면…

안양똑딱이 2017. 9. 10. 20:48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16] 바위 속 마애종이 덩그렁 울리면…
희귀한 마애종 있는 안양 중초사 터를 찾아
cnbnews 제209호 편집팀⁄ 2011.02.14 14:18:23

 

원본 글과 사진보기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5579
사진들 더보기  http://cafe.daum.net/biomarket/D0xU/12


 수원·천안 방향으로 가는 1호선 전철을 타고 관악역에서 내린다. 한 때 안양을 자주 갈 일이 있었는데 그 때 관악역이란 역 이름이 낯설더니 오늘도 변함없이 낯설다.

이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은 ‘관악역’이라 하면 응당 관악산 근처 어디쯤이거나 관악구 어디쯤으로 연상될 것이다. 현재 관악역이 있는 곳은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이었고 지금은 아마도 안양시 석수동쯤일 텐데 도대체 무슨 연유로 관악역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진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하철역 이름 때문에 약속 장소를 혼동해 낭패를 봤던 기억들이 새롭다. 도봉산을 가자고 약속했더니 한 무리는 ‘도봉’역으로 모이고 다른 한 무리는 ‘도봉산’역으로 모였으니 그 날의 낭패란….

또 지난 가을에는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자고 사람들과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만나자고 분명 약속했건만 몇몇 사람들은 ‘산성’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또한 낭패였다.

2번 출구를 나와 경수산업도로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안양예술공원 입구에서 내린다. 걸어도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길을 굳이 버스를 탄 까닭은 이 길이 산업도로이다 보니 걷는 즐거움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안양에 있는 전철역이 왜 관악역이며,
등산할 때 어쩌라고 도봉역-도봉산역 따로 있고,
남한산성입구역과 산성역은 또 어찌 구분하나.


안양예술공원은 예전의 ‘안양유원지’다. 우리들의 젊은 날, 오월이 오면 ‘수원 푸른지대’에 가서 딸기를 먹고, 팔월이면 ‘안양유원지’에서 포도를 먹었다. 관악과 삼성이 마주 보면서 무너미에서부터 만들어 낸 계곡수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어져 유원지 입구쯤 오면 너른 개울이 되어 유원지의 격(格)을 한층 높여 주었다.

이제는 예술공원이 되면서 다소 인공적이기는 하지만 깔끔하게 다듬어지고 산책로도 생겨 옛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이 하천길을 따라 1km 남짓 들어가면 개울가 좌측으로 고졸한 3층 석탑과 두 개의 석물(石物)이 서 있는 중초사 터(中初寺址)에 이른다.

중초사…. 역사책 어디에도, 사적지(寺跡志) 어디에도 한 줄 기록이 없는 후기신라 때의 큰 절이다.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삼층 석탑은, 이 탑이 서 있는 옆 넓은 공장부지(옛 유유산업) 안 동북쪽 80m 지점에 도굴된 채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처음에 보물 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에 경기유형문화재 164호로 격하되는 아픔을 겪은 탑이다.

이 탑 옆으로 보물 제4호로 지정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다. 당(幢)이란 불당 앞에 세워 부처의 위신력이나 절을 상징하기 위해 내걸던 일종의 깃발이다. 이 깃발을 세우려면 기둥이 되는 간(竿)이 필요하고 이 간을 세우기 위해서는 기둥 고정대가 필요했다. 이 고정대가 지주(支柱)이므로 당간지주(幢竿支柱)라 부른다.

 

 

흔히 당(幢)은 천(布)으로 만들고, 간(竿)은 쇠(鐵)나 동(銅) 또는 나무류로 만는다. 지주는 돌(石物)로 만드는데, 돌로 만든 지주(支柱)는 남아 있는 것이 많고 쇠나 구리로 만든 간(竿)도 유적들이 있다.

이 곳 당간지주는 신라 흥덕왕 1년 (82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당이나 간은 남아 있지 않고 지주만 남아 있는데 당간지주 중에서는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남아 있어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소 난해하지만 그 명문(銘文)의 내용을 보면,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僧岳: 삼성산의 신라 때 이름인 듯)에서 돌 하나를 나누어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시작하여, 9월 1일에 함께 이곳에 이르고,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절주통(節州統: 승려의 최고 직인 국통 아래 주통, 승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이하 이 일에 관련된 화상들의 업무와 이름이 열거되므로 줄임)

“寶曆二年 歲次丙午八月朔六辛丑日 中初寺 東方僧岳一石分二得.
同月卄八日 二徒作初奄九月一日此處至 丁未年二月卌日 了成之.
節州統黃龍寺恒昌和尙…”

이 명문에서 알 수 있는 사항들은 정확한 연대, 이 절의 이름(中初寺), 경주 황룡사와의 관계, 그 시절 신라의 유명한 화상(승려)의 이름 등이다.

이제 개울길을 따라 500여m 올라 광장과 주차장을 지나면 좌측 산 아래에 작은 전각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공원 화장실이 있다. 전각 속에는 바위가 하나 서 있다. 그 바위 표면에는 한 동자승이 종 치는 모습을 담은 부조(浮彫)가 생생히 남아 있다. 이른바 마애종(磨崖鐘)이다.

 

 

마애불이나 마애산신상은 있어도 마애종은 아마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신라 말(신라 흥덕왕 때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근거는 없다)이나 고려 초에 새겨 놓은 오랜 역사와 희귀성이 돋보이는 유적이다. 안내판에는 경기지방문화재 제29호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때려서 울리는 것이 종인데, 어쩌라고
 마애종을 바위에 새겨 놓았나. 아마도
 세상에서 이곳 한 곳밖에 마애종은 없을 듯.


이 마애종은 중초사나 안양사(安養寺)의 범종각 근처에 있던 유물일 것이다. 보물쯤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길을 간다.

잠시 후 보장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그냥 지나친다. 이윽고 좌측 접어드는 길로 안양사(安養寺)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500여m 오르면 넓은 부지에 자리 잡은 안양사가 있다. 거대한 부처님 불사도 해 놓았고, 마당에는 경기 유형문화재 제 93호인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 받침돌)와 부도가 있다.

옛적의 비석(碑石)을 보면 비석의 받침대인 귀부(龜趺) 또는 비좌(碑座)가 있고 비석의 몸통인 비신(碑身),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이수(螭首) 또는 여러 형태의 비개(碑蓋),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안양암에 있는 귀부(龜趺)는 받침대만 남고 비신과 덮개는 어디로인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확언할 수는 없지만 집히는 바가 있다. 연전 북한산 삼천사 터가 발굴됐는데 대지국사비의 비신(碑身)이 조각조각 날 정도로 철저히 부서진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부순 흔적들이 역력했던 것이다.

또한 경주 남산의 석불들은 유난히도 목 없는 석불들이 많다. 왜일까? 아마도 이런 흔적들은 조선시대에 배척 받던 불교 유물들이기에 유생들에 의해 파괴된 조선 중기 이후의 흔적일 것이다.

그나저나 이곳 안양사는 근래에 중창한 절이니 본래 안양사의 자리가 이곳이 맞는 것일까? 잠시 안양(安養)의 의미를 살펴보면, 안양이란 불교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주관하시는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안양사(安養寺)는 극락으로 인도하는 절이라는 의미이며 지금의 안양시는 안양사가 있는 도시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양 시민은 아마도 모두 극락에서 사시듯 행복하시리라.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衿川縣) 조에는 안양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安養寺 在三聖山 寺之南有高麗太祖所建七層甎塔 金富軾撰碑字缺
“안양사는 삼성산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태조(왕건)가 세운 7층 벽돌 탑이 있고 김부식이 지은 비문은 결락되었다.”

또한 이숭인의 중신기에는 “옛적에 태조께서 조공하지 않는 자는 정벌할 참인데 이곳을 지나가다가 산꼭대기에 구름이 오채(五彩)를 이룬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살폈습니다. 노승을 구름 아래에서 만났는데 이름이 능정(能正)이었고 뜻이 맞아 절을 세웠습니다.”

이렇듯 확실한 기록이 있기에 어딘가에 있을 벽돌 탑의 흔적만 찾으면 안양사 위치를 찾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안양이란 이름을 주고 1000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안양사.


‘안양’이란 원래 불교에서 극락세계를 말하고
 안양사는 그곳으로 인도하는 절이니,
안양 사는 분들은 모두 극락처럼 행복하기를…


2009년 10월 드디어 안양사가 역사 위로 떠올랐다.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서 있는 옆, 구 유유산업 자리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벽돌 탑의 흔적은 물론, 안양사라는 명문(銘文)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이로써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신라적 중초사(中初寺) 자리에 고려 적에 안양사가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1950년대 말에는 포도밭이었다는데 유유산업이 공장을 지으면서 당대 최고 건축가인 김중업(金重業) 씨가 설계해 건물을 지었기에 귀중한 근대 건축 유산이 남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명당이기에 신라의 중초사 ~ 고려의 안양사 ~ 근세의 김중업 선생 건축으로 자리를 빛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중초사나 안양사의 전모를 밝혀야 하는데 그 자리에 건축 유산이 자리 잡고 있으니 발굴은 예서 그쳐야 한다. 우리는 안양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하고 다음 세대에게 넘겨야 할 보물이기에 그리된 것 아니겠는가?

 

 

이제 안양사를 뒤로 하고 삼성산 등산로로 접어든다. 잠시 후 제2 쉼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좌측 길을 택하면 산봉우리로 가는 능선길이고 우측으로 가면 잘 가꾸어 놓은 명상의 숲을 지나 능선쉼터로 오르는 길이다.

바위산에 올라 호연지기도 느끼고 전망도 만끽하려면 좌측 능선을 택하고, 비교적 편히 가려면 우측 명상의 숲길로 들어서는 것이 좋다. 오늘은 좌측 능선 길을 택해 제1전망대(약 340여m)를 지나 우뚝한 바위봉인 제2전망대(학우봉, 약 370여m)에 오른다.

시야가 트여 안양을 넘어 먼 곳까지 보인다. 이제부터 삼막사와 염불암이 갈라지는 고개인 일명 삼막고개까지는 별 오르막과 내리막이 없는 능선길이다. 중간에 능선쉼터를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제2쉼터에서 명상의 숲 코스로 오게 되면 만나는 지점이다.

다시 1km 남짓 능선 길을 가면 삼막고개에 이른다. 북으로는 손에 닿을 듯 삼막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삼막사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휘돌아 가는 길 저 너머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삼막사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시적 느낌을 자극한다.

상념을 떨치고 우향우, 남쪽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코스를 택한다. 미륵마애불(彌勒磨崖佛)이 기다리고 있는 염불암을 찾아가기 위해. 가파른 바위길 흙길을 1km여 내려오면 염불암의 경내가 시야에 들어온다.

우선 길손을 맞는 것은 세 기의 부도(浮屠)다. 부도란 다비(茶毘: 화장) 한 후 사리(舍利)를 수습하여 모신 작은 탑으로, 유골안치소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곳의 사리탑은 여느 사리탑과 모양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사리탑은 배가 나온 종 모양(鐘形)인데 이 곳 사리탑은 세 기 모두 원통에 일직선으로 뻗어 내려온 원주형이다.

가경 15년(순조 10년, 1810년) 서영당 지홍의 부도, 가경 21년(순조 16년, 1816년) 인봉당 대심의 부도, 또 한 기는 운수거사 도당명심의 부도, 이렇게 3개가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두 기의 마애부도(磨崖浮屠)가 절 뒤편 바위에 있다. 건륭 48년(정조7년, 1873년)에 현진당 거사 법홍의 사리공이며, 또 한 기는 광서16년(고종 28년, 1891년)에 곤명 여산송씨의 사리공이다. 1800년대에 이렇게 조성된 부도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염불암은 전성시대가 이 때였던 것 같다.


최소한 600년 전통을 지닌 절엔 뭐가 달라도
 다르지. 500년 묵은 보리수가 시원한 손 벌려
“어서 이리 오라”고 우리를 부르니…


염불암의 조성 시기는 고려 태조 때라고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태종 7년(1407년) 중창하였다는 점이다. 최소한 600년은 되는 전통이 있다 보니 절 마당으로 들어서면 도 지정 보호수인 500년 된 보리수나무가 시원한 손을 벌리고 길손을 반긴다.

 

 

경기 산타령 중 앞산타령에는 ‘과천 관악산 염불암은 연주대요, 도봉 성불 삼막으로 돌아든다’라고 풀어내는 것을 보면 과거 염불암의 위치는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 절의 특징 중 하나는 뒤편 바위들이 절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점이다. 산신각도 아슬아슬하게 이곳에 지었고 50여 년 전 모신 미륵마애불도 위용을 자랑한다. 힘들고 지친 민초들에게 메시아로서 깨우침을 일깨워 용화장(龍華場) 세계를 펼치고자 이곳에 자리한다.

이제 하산 길로 접어든다. 이곳 염불암까지 길을 포장해 놓아 차 다니기에는 좋으나 걷기에는 산길 느낌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길을 2km여 내려오면 예술공원의 상류가 된다. 개울이 넓은 폭으로 흐르고 이 개울을 살려 산책길과 각종 카페 풍의 음식점들을 배치했다.

개울가 산책길로 해서 내려오면 출발하였던 중초사지로 돌아가는 원점회귀 코스가 된다. 출출도 하고 많은 음식점들도 자리하고 있기에 이곳에서 식사와 탁주 한잔 마시기로 하고 두부 집으로 간다.

 

 


교통편

1호선 수원/천안행 관악역 2번 출구 ~ 마을버스 6-2 환승 안양예술공원 앞 하차(2번째 정류장).

또는 1호선 수원/천안행 안양역 하차 ~ 시내버스 5530, 5626, 5625, 5624, 5713, 52 또는 마을버스 2 환승해 안양예술공원 하차.

걷기 코스

 안양예술공원 입구 ~ (하천길 따라) ~ 중초사지 당간지주(구 유유산업) ~ 안양 마애종 ~ 안양사 ~ (삼성산 등산로) ~ 제1쉼터 ~ 제2쉼터 ~ 제1전망대 ~ 제2전망대(학우봉) ~ 능선쉼터 ~ 삼막고개(삼막사 갈림길) ~ 염불암 ~ 하천길 ~ 안양예술공원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마애불과 문화유적지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갑니다.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본지 Art In 편집주간)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