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337

[자료]안양 마애종 연구 자료 모음(1)

[자료]안양 마애종 연구 자료 모음(1)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화장실 뒷쪽의 자그마한 길옆 암벽에 기와를 얹은 보호각 하나가 있다. 그 안에는 범종 하나가 조각돼 있는데 경기도유형문화재92호로 지정된 마애종(磨崖鐘, 만안구 석수동 산32)이다. “우리는 세계유일의 마애종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포럼은 그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안양지역사회에서는 민예총을 중심으로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안양세계 마애종 문화포럼’을 통해 마애종의 보물 격상 운동과 더불어 '종교 그 이상의 울림'을 지향으로 하는 영성운동이 잠사나마 전개됐었다. “마애종이 담고 있는 ‘평화와 이상향’의 마음은 어느 종교에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형식을..

[자료]콜롬비아로 시집간 동해급 마지막 함정 '안양함' 역사

안양시청사 1층 홀 국제·국내 자매도시 기념품 진열장 속에는 한 척의 배 모형이 있다. 해상초계 및 대공전투 임무를 띠고 1983년 취역해 28년간 바다를 지키다 2011년 9월 28일 전역식을 갖고 퇴역한 우리 해군의 동해급 마지막 초계함(PCC-755) '안양함'이다. 이 안양함이 2014년 7월30일 경남 창원시 진행군항 부두에서 양도 기념식을 갖고 콜롬비아로 시집을 갔다. 콜롬비아 해양에서 불법 마약거래 근절과 해상환경 보호 등 콜롬비아의 바다를 지키는 새 임무를 위해 우리 군이 해외에 양도하는 첫 초계함급 군함이 됐다. 이는 콜롬비아 측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콜롬비아는 6·25전쟁 당시 호위함과 병력 5천100명을 파병한 중남미 유일의 6·25참전국으로 212명의 콜롬비아 장병들이 희생됐..

[자료]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1919년 3월 군포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독립기념관 기록(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056)에 의하면 1919년 3월 31일 군포.안양.의왕 경계지점이며 상업적 요충지였던 군포장(軍浦場, 현재 안양시 호계동 구군포사거리 인근)의 장터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군포장은 시흥군 일대에서 꽤 큰 장(5일장)이 열리던 곳으로 당시 군포장에 모인 2000여명의 시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경찰관 주재소(현재 군포역앞)까지 약 1.8㎞를 행진했으며 4월 1일에도 군포장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했다. 만세시위지인 군포장 경찰관주재소 터 현 주소는 군포시 군포 1동 750-8(옛주소: 시흥군 남면 당리)로 당시 일본경찰은 군에 보병 출..

[자료]1963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이야기

50년전 남한강에서 숨진 안양 흥안초교생들 안양과 여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교명이 바뀌었지만 현재의 안양 남초등학교는 1960년대 흥안국민학교로 불리웠다. 특히 노년의 졸업생들에게 여주하면 슬픈 추억이 서려 있다. 신륵사로 소풍갔다가 남한강에서 익사한 선후배들이 있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63년 10월 23일 안양시 흥안초등학교 5·6학년 학생과 교사, 학부모 총 158명이 여주 신룩사로 수학여행을 왔다가 귀가하던 오후 2시 50분 무렵 여주읍 연양리에서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를 건너다니던 조포나루에서 일행을 태운 나룻배가 침몰하여 학생을 포함한 교사·학부모 등 49명(남학생 15명, 여학생 22명, 교장을 포함한 학부모 12명)이 익사하는 대형사고가..

[자료]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국립수의과학검역원(구 가축위생검사소) 이 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물의 앞마당 화단에 꾸며져 있는“열 목숨 얻기 위해 한 목숨 바친 그대 희생 빛내리. 넋이여 고히 잠드소서. 1969년 10월 20일”이라고 씌여진 충혼비를 우선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의 안전한 식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동물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동물들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설에서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관계자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가상한지 알 수 있다. 꽃 피는 철에는 붉은꽃으로 에워싸이는 화단은 어찌 보면 이 연구소 구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가축의 전염병 및 기타 질병의 예방 연구 기능을 하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지상 3층 건물로 T자 모양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자료]안양지역 행정구역 변천과정 [행정구역의 변천] 안양지역의 모체인 시흥군은 고구려시대에 잉벌노현에 속했다가 934년 고려태조때 금주로 개칭되면서 衿川으로 불려왔다. 조선세조 원년인 1456년 과천에 병합되었다가 정조19년에 시흥으로 개칭되었으며 1895년 고종32년에 시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 3월 1일 시흥, 안산, 과천의 3개군이 통합 시흥군이 되었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안양읍으로 승격되면서 안양은 전원도시로 발돋움해 오다가 급격한 도시발달로 1973년 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천군 소래면이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었고 86년 1월 1일 과천지구출장소가 과천시로,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89년 ..

[자료]1919년 3월 의왕에서도 3.1만세운동 있었다

의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아시나요? "수원군의 의왕면 고천리에서는 삼월 삼십일일 밤에 다수한 군중이 모여 면사무소와 경관주재소에 대하여 폭행을 함으로 수원주둔병대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데 주모자로 인정할 만한 자 46명을 체포하였다가 그 이튿날 41명만 태형에 처하여 방송하였다더라."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 주민 800여명(당시 의왕 주민 수는 2천여 명에 불과했다)은 의왕면사무소(현 고천동주민센터)에 모여 고천경찰관 주재소(현 고천약국 부근)와 지지대 고개까지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독교인들과 천도교들이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와 일본군 육군성에서 1920년 12월 30일 발행한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보면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

[자료]안양지역의 천주교 역사

안양지역의 천주교 역사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1887년에 한불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선교가 시작됐다. 이 후 경기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성당들이 건립되었는데, 1888년에 화성군 '갓등이'(현재의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에 세워진 예배처가 경기도 최초의 성당이다. 일명 '갓등이 성당'이라고 불리던'왕림성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미리내성당'(1896년 설립, 경기도 안성)과 '하우현성당'(1900년 설립, 경기도 의왕시)이 차례로 건립됐다. 당시 '하우현성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안양의 첫 성당인 '장내동성당'(현 중앙성당)이 건립됨으로써 명실공히 안양 지역에도 한국 천주교의 계보를 잇게 됐다. 안양지역의 천주교 유례를 보면 '장내동성당'이 건립되기 전에 '하우현성당'에서 관할하던 수리산 공소가 있었던 ..

[자료]경인교대 경기캠퍼스에 읽힌 이야기

경인교대 경기캠퍼스에 읽힌 이야기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는 경기도로부터 안양시 석수동에 위치한 삼성산 자락의 석산부지6만5천여평(21만9천566㎡)와 시설비 899억원을 지원받아 2003년 12월 착공한 지 2년여만인 2005년 3월1일 개교했으며 전체 학생수는 2천여명에 달한다. 경기도가 학교 부지와 시설비까지 지원하고 나선 이유는 경기도에 교육대학이 없으나 법률상 수도권에 대학교 설립이 불가능하자 경인교대 캠퍼스 유치에 나선 것으로 도는 2001년 '경기교육대학 설립 1천만 서명운동'을 펼치는 등의 노력 끝에 2003년 경기도가 대학 설립예산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경기캠퍼스 설립을 승인받았다. 경기캠퍼스 건축연면적은 51,735㎡(15,650평)로 2003년 12월23일 착공식을 가졌으며 ..

[자료]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제1절 토지이용의 변화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에 대해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계속 새로운 논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여기에 지역별 접근도 가세되면서 논의가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산업화의 지역적 전개 과정은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어서 그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급격하게 그 변화를 맞이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 여러 부문에서 변화가 포착되지만, 지리학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토지이용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