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60년대 금성방직 안양공장 항공사진

안양똑딱이 2016. 5. 10. 15:50

 

 

현재의 안양3동 국민은행 안양지점과 왕궁예식장 뒷편에서 박달동 우성아파트에 걸쳐있는 대농단지에 자리했던 금성방직 안양공장의 1960년대 모습입니다. 
사진 좌측 하단 정문옆으로 보면 안양역으로 철길이 연결되고 화물기차가 들어올 정도로 그 규모가 컸으며, 담장 둘레만 십리라고들 했지요. 참고로 당시 안양역에서 이어진 철길 두 라인으로 하나는 수암천 우측을 따라 금성방직 안으로, 한 라인은 수암천 좌측을 따라 병목안 채석장까지 연결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진 중앙의 운동장은 천연 잔디가 깔린 축구장입니다. 1960년대 당시에는 잔디구장이 전국에 3개 밖에 없던 시절인데 한국 국가대표팀이던 양지선수단을 비롯 공군사관학교 축구부, 실업팀 등이 이곳에 와서 연습경기를 했지요.(참고 1965. 9.15일 DBS동아방송에서 금성방직 구장에서 김용식감독 인터뷰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3963&r_serial=02)에도 자세히 나옵니다.
1963년에는 실업축구팀인 금성방직 축구단이 창단하여 1964년 춘계, 추계 실업축구연맹전 석권, 전국체전 축구 일반부 남자 우승. 1965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한 기록도 있네요. 하지만 1967년 금성방직이 매각되면서 쌍용양회 축구단으로 운영되다 해체되었지요.
당시 만안초등학교와 안양중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시멘트블록 담장 중간 중간에 난 구멍으로 이회택 등 국가대표선수의 볼 차는 모습을 보며 축구의 열정을 불태운 덕에 안양중,안양공고가 전국 축구를 재패하건 것도 이무렵이었지요. 
사진 좌측 위로는 안양공고(당시에는 안양중학교와 함께)의 모습도 보입니다, 
사진 위쪽 끝 자그마한 야산(동네 아이들이 부르던 지명이 떡산?)의 뒤쪽과 안양공고와 회사 중간에는 회사 사택들이 있었답니다. 
사진속 부지의 역사는 참으로 사연이 많습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조선직물주식회가 처음 들어섰다가 1938년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1944년 화신뱍화점 총수였던 박흥식에 의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흥식은 1944년 8월19일 자본금 5천만원(당시화폐)으로 조선직물주식회사를 접수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당시 규모는 부지 3만평에 건평 1만평으로 초대형 규모였지요.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에는 인근 토지를 몰수하는 등 총독부 힘을 빌려 접수해 비행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생산시설은 조선군사령부 병참부의 중개로 관동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공장 노무인력은 전적으로 당시 시흥군일대에서 징용자들이 차출되었습니다.
조선비행기주식회사는 비행기 1대를 조립하고 평촌에 비행기 활주로 공사까지 시작했는데 해방을 맞으면서 공장 시설은 진주한 미군에 의해 철거되고 맙니다. 
반민특위의 조사내용에 따르면, 1945년 5월 당시 제1호기의 주익(主翼)·동체를 위시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마치고 8월에 시험비행을 하였으며, 제2·3호기도 부분품 제작중에 있었으며 9월말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방이후 이 회사는 1948년 10월 5일 안양1동에 금성방직을 설립한 쌍룡그룹 창업주가 된 경북 달성사람 김성곤 씨가 인수해 1949년 03월10일 공장을 준공합니다. 
한국 재벌형성사(이한구 지음.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정부는 연합군의 일본 폭격을 피하기 위해 일본내의 주요한 산업시설을 한국으로 피신시켰다. 이에 해방직후 안양역전에는 일본방적 소유의 방적기 2천추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금성방직을 설립한 김성곤은 방치된 방적시설을 이용하여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관할관서인 미 군정청과 교섭하여 안양에 소재한 조선직물주식회사(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일부인 3천평을 임차받아 인견사 생산공장에 나서게 된다.(쌍용그룹 전사편)
김성곤은 기술자를 대동하고 안양역전에 나뒹굴고 있는 기계부품의 목록을 작성하여 미 군정청 관재처에 제출하여 사용 가능한 431대를 확보해 불하 받은 후 공장 귀퉁이에 설치하였으며 이는 금성방직의 시초이다. 불하금액은 당시화폐로 2천만원 정도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지요. 실의에 빠진 김성곤은 정부에 요구해 결국 UNKRA(유엔 한국부흥위원단) 자금 지원을 통해 1953년 6월에 재건에 나서 영국에서 기계를 구입하는 등 1954년 5월에 '은하' 상표의 면사 첫제품을 생산하며 재벌로 부상하는 계기가 됩니다.
김성곤은 1956년 5월15일 안양1동 현 진흥아파트에 자리한 태평방직을 인수하고 공장 확대에 나섭니다.
태평방직은 1953년에 자본금 1억환으로 안양읍 안양리 97번지 일대에 설립된 삼흥방직이 전신으로 방기 1만추, 직기 50대를 구비하고 1954년 10월부터 생산을 시작하였으며 자금사정을 겪자 금성방직이 인수한 것이지요. 
금성방직은 1960-70년대 안양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3천 궁녀(?)가 안양을 먹여살린다고 할 정도였지요. 당시 월급날에는 안양 일번가 식당과 술집이 호황을 누릴 정도로 봉급 특수가 안양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특히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상경한 여성 근로자들이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형제 친척들까지 안양으로 올라오는 배경으로 인해 현재 안양에 팔도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타 위성도시와 달리 팔도향우회가 매우 활성화 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금성방직은 1967년 10월 안양 1동에 자리한 태평방직(현 레미안 아파트) 과 함께 대한농산(대농)에 매각되고 1977년 한국토지금고에 의해 일반에 매각되면서 안양 최초의 대규모 분양형태의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대농단지로 불리워 오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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