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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안양 귀인마을 유래를 기록한 귀인마을 표지석

안양똑딱이 2024. 5. 17. 22:01

 

2024.05.17/ #도시기록 #안양 #표지석 #귀인마을/ 안양 평촌 귀인마을 유래를 기록한 마을 표지석. 1996년1월1일 귀인향우회에서 설치. 귀인경로당앞.

 

귀인동 : 귀인(貴仁)

신말(新村)동쪽으로, 온양 정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이 마을에 들려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 때(1789)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을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귀인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동, 귀인2동으로 분동해 안양에서는 가장 번창했던 마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귀인강습소 가 있었다가 광복 직후에 이르러 학 생의 감소와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70여호의 대촌인 귀인마을은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내의 몇 안되는 마을 중의 하나로, 1990년 4월에는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곳은 마을 뒷산으로(해발60m)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지석묘는 평촌 자유공원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삼국시대로 추정되는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마을의 풍요와 무해를 기원 하는 정제(井祭)를 지냈다.

 

귀인마을과 평촌 신도시 개발, 존치구역

귀인마을

평촌신도시는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격자무늬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그렇기에 대다수 아파트가 예쁘고 반듯한 모양의 단지를 취하고 있고, 상업지과 주거 등이 분명하게 구분된 구조입니다. 하지만 귀인마을의 경우 평촌신도시 중간에 덩그러니 난개발된 모양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안​양지역에서 오래전 형성된 마을이면서, 오랜기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사람들의 쉼터이면서, 양반들이 모여살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귀인마을은 그 역사와 전통이 이어져 지금까지 먹거리촌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마을은 오래된 마을이면 으레 그렇듯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 공동체였다. 그런 마을이기에 평촌신도시 개발계획에 강하게 저항했고, 뉴타운의 존치구역처럼 평촌신도시에서 제척되어 별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존치구역

지금 뉴타운 지역에서는 개발구역으로 지정하지 않은 지역을 존치구역으로 두어 관리하면서 빌라수요와 상가 등이 위치하여 해당 뉴타운의 자생하는 상업지로 관리 보존하고 있습다. (아마도 신도시 지정 당시에는 해당 개념이 정립은 되지 않았겠지만) 귀인마을의 경우 이미 어느정도 상업지가 형성된 점, 주민의 반대가 격렬한 점 등으로 개발을 하지 않았다.

개발과정

귀인마을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신도시로 개발은 반대했지만, 아파트 개발 자체를 반대한건 아니었다. 지역주택을 모아 주민이 직접 아파트 건설을 위해 시행했고, 현대건설을 통해 아파트를 건축했다. 그렇기에 당시 아파트 건축에 동의한 세대의 땅으로 아파트가 형성되었기에 현재의 모습은 다른 평촌 신도시와 다르게 반듯한 모양이 아니다.

  1. 귀인마을현대홈타운과 귀인마을은 평촌신도시로 개발하지 않은 아파트다. 그렇기에 아파트 단지가 반듯한 사격형이 아니게된 것이니다.
  2. 존치구역으로 남은 귀인마을은 사실상 국내 첫 지역주택조합 사업지로 아파트 개발을 이루었다.
  3. 존치구역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케이스다.

아파트 건설 당시 기부채납용지에 지어진 공원과 경로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