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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5]아이스하키 '안양 한라'가 걸어온 길

안양똑딱이 2024. 2. 15. 18:20

 

안양한라는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지난 1994만도 위니아아이스하키팀으로 출발한 안양 한라는 2004년 안양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안양 한라위니아아이스하키팀으로 팀 명을 변경한 후 2006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시아리그에서 우리나라 팀 중 유일하게 우승을 한 구단이며, 지난 시즌까지 총 4번의 우승컵을 들었습니다. 팀을 이끄는 대표 선수로는 주장인 박우상, 지난 시즌 리그 MVP 김상욱, 국내 최고의 테크니션 조민호, 골게터 김기성, 수호성 맷 달튼(골리) 등이 있습니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박진감이 넘치는 빙상스포츠의 꽃 아이스하키. 오랜 인고 끝에 열매를 맺기 시작한 한국 아이스하키에게 있어 안양한라라는 팀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불모지와 같던 아이스하키에서 태어나 아시아를 호령하는 푸른 백곰으로 자라난 안양한라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봅니다.

 

1992, 만도는 사업 다각화의 일환으로 에어컨 사업을 시작합니다. 후발주자 만도가 어떻게 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홍보방안을 고민하던 운영진은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을 통해 한 가지 방안을 마련합니다. 바로 만도 위니아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닮은 새로운 빙상 스포츠팀을 창단하자는 아이디어를 말이죠. 그렇게 안양한라의 전신인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이 창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위니아 에어컨의 홍보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아이스하키팀 창단보다 더 예산이 적고, 더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많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기스포츠인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했던 이유는 대기업으로써 사회에 공헌해야 할 책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이스하키팀이 에어컨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비인기 종목을 육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대하는 임원들을 설득하며 아이스하키팀을 창단하기로 마음을 굳혔다.(정몽원 회장, 한라그룹 50년사 중에서)”

 

199412월 창단한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은 그 뒤로 승승장구를 거듭합니다. 1996년 유한철배 아이스하키대회에서 창단 첫 우승을 거뒀고, 그해 10월 제51회 종합선수권대회 역시 석권하며 신흥강호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죠. 이즈음부터 아이스하키는 한라그룹에게 있어 홍보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푹 빠진 정몽원 회장은 아이스하키의 성장과 부흥을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틈틈이 관중석을 찾아 아이스하키를 응원하고, 외국 출장 중에는 직원을 통해 국제전화로 생중계를 챙겨 들을 정도였죠. 정몽원 회장의 열성적인 뒷바라지 속에 만도 위니아는 국내 최강의 팀으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1997년 말, IMF 외환위기와 함께 한라그룹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회사에 닥친 위기 앞에 모두가 근심하고 있던 무렵,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은 창단 이래 첫 통합 우승으로 한라그룹에 위안을 남겼습니다. 3년 연속 리그를 제패했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항상 고배를 마셨던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이 마침내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국내 최정상의 팀으로 거듭난 거죠. 간만에 들려온 희소식에 그룹 내 임직원들은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은 통합우승 직후 해체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만도기계,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등 주력 기업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한라그룹에게 수익창출이 어려운 비인기 종목 아이스하키팀을 유지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몽원 회장은 마지막까지 아이스하키팀을 품기로 결단합니다. 그는 아이스하키팀을 통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룹이 해체되고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선수단은 구단 해체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1998년 첫 통합 우승을 거뒀고, 그게 회장님에게 큰 위안이 됐던 것 같다. 회장님이 팀을 유지하겠다 발표하던 날 선수단은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양승준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올림픽준비기획단 단장)

 

임원과 사원이 서로 손잡고 소리치고 응원하면서 회사 내 결속이 생겼다. 그건 아이스하키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정몽원 회장)

 

한라그룹의 신뢰와 지원 아래 한라위니아 아이스하키팀은 1999년 통산 100승을 돌파함은 물론 그해 시즌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그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한라위니아 아이스하키팀과 함께 한라그룹 역시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다시 성장세를 회복할 수 있었죠. 그렇게 한라그룹과 한라위니아 아이스하키팀에게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 아이스하키팀 창단부터 정몽원 회장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본과 연합한 아시아 통합 리그를 출범하는 일이었죠. 정몽원 회장은 한국에 비해 한 수 위인 일본팀과의 경쟁을 통해 한국 아이스하키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996년 일본 최강이라 불리는 오지제지(현 오지이글스)를 찾아가 전략적 교류 관계를 제안하기도 했죠. 하지만 오지제지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1996년부터 일본과 교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시 일본 최강팀인 오지와 접촉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겨우 10분 만나주고 그만 가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당시 꼴찌팀이던 후루카와(현 아이스벅스)를 찾아갔다.”(양승준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올림픽준비기획단 단장)

 

일본 최하위 후루카와와의 친선 경기. 국내를 제패하며 한국 최강이라 불리던 한라 위니아는 무려 10골 차 패배를 당하고 맙니다.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아이스하키의 위치를 절감할 수 있었죠. 하지만 한라위니아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그들의 기술을 체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2003, 경제 위기로 양국의 국내 리그가 사실상 붕괴되면서 한국 1팀과 일본 3개 팀이 모여 한일 아이스하키 리그를 출범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현격한 실력 차 때문에 일본의 들러리만 서주는 꼴이라며 통합리그를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한라위니아는 현격한 실력차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통합리그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그들과 경쟁해야 한다며 말이죠.

 

첫해 통합리그에서 한라 위니아는 처참할 정도로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국내 최고의 팀이 일본 약체팀에게도 휘둘리는 모습을 보며 아이스하키 팬들은 낙담했죠. 하지만 그 패배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심지어 한라 위니아 팀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기획기사] 안양한라는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2회 아시아리그는 중국의 치치하얼, 하얼빈 등 2개 팀과 러시아의 골든 아무르팀이 참가하면서 훨씬 더 탄탄한 라인업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국색이 강한 아시아 지역의 특성 상 리그를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대표해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한라그룹과 정몽원 회장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죠. 정몽원 회장은 리그 운영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때로는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고, 때로는 물밑 작업을 벌이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때문에 리그 사무국이 도쿄에 있을 만큼 일본의 입김이 센 아시아리그 안에서도 안양한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한라그룹은 아시아리그 출범과 함께 과감한 투자를 감행합니다. 2004-2005 아시아리그부터 안양과 연고계약을 체결한 후 팀명을 안양한라 아이스하키단으로 변경하고, 대대적인 성장 프로젝트를 감행하게 됩니다. 2005-2006 시즌엔 체코의 오타카 베보다 감독을 영입하며 체질 개선을 시도했고, 그 일환으로 체코 용병 4인방을 수혈하게 됩니다. 아이스하키 강국인 체코의 시스템을 도입해 비디오 분석을 시작했고, 과학적인 팀 운용을 통해 선수단의 전체 기량을 대폭 향상시킵니다.

 

또한 아이스하키 저변 확대를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감행했죠. 2006년 비인기 종목 최초로 아프리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안양 홈 경기 전체를 인터넷 생중계 방송했으며, 장내 라디오 방송 중계를 시도했습니다. 팬서비스 데이를 만들어 팬들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온오프라인 이벤트를 열어 새로운 팬을 유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껏 국내에서 시도한 바 없는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으로 안양한라는 국내 아이스하키를 대표하는 팀으로 자라났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05-2006 시즌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오른 안양한라는 비록 4강에서 고쿠도에 패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진 못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며 무시할 수 없는 팀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시아의 동네북이라 불리며 설움을 받은지 3년만에 일이었죠.

경기력을 놓고 봤을 때 한국이 아시아리그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일본팀에게 10점차 엄청난 스코어로 패하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진 지원을 통해 한국의 실력은 부쩍 늘어날 수 있었다.”(양승준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올림픽 준비위원단 단장)

 

첫 플레이오프 진출 이후 안양한라는 2년간 침체기를 겪습니다. 결국 안양한라의 첫 외국인 감독 베보다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게 됩니다. 비록 베보다 감독은 떠나갔지만, 그가 안양한라에 남긴 유산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아시아 어떤 팀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 훈련 시스템 리그 최초 한국인 득점왕 송동환과 플레이메이커 페트릭 마르티넥을 비롯한 탄탄한 선수층, 그리고 승리를 향한 열망은 명문 안양한라로 도약하는 데 소중한 자원이 됐습니다.

 

베보다 감독의 후임으로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이는 바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심의식 감독이었습니다. 공격수 출신인 심의식 감독은 팀의 칼날을 더 예리하게 벼리기 시작했습니다. 북미리그 출신 브락 라던스키와 국내 최대어 김기성, 박우상을 영입하며 노쇠한 송동환, 마르티넥을 보완할 새로운 공력 라인을 구축합니다. 이런 공격수 중심 리빌딩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2008-2009 시즌, 안양한라는 크레인스를 제외한 모든 팀에게 상대 전적이 앞서는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게 됩니다. 기존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섬세한 아이스하키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북미 스타일로 변화한 안양한라는 마침내 사상 최초로 아시아리그 정상에 올랐습니다. 창단 16년만에 일이었죠.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숙적 크레인스에게 발목을 잡히며 통합우승은 놓치고 말았지만, 이미 안양한라는 아시아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강팀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2009-2010 시즌에도 리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안양한라는 팀 창단 이래 최초의 챔피언 타이틀을 노리며 플레이오프에 돌입합니다. 국내 라이벌 하이원을 31패로 제압하고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전년도 안양한라를 탈락시킨 크레인스였습니다. 명실상부 아시아리그 최강이라 불리는 크레인스와 무려 3번의 연장접전을 펼친 끝에 안양한라는 32패의 성적으로 창단 이래 최초, 아시아리그 역대 두 번째로 통합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아이스하키팀을 지킨 정몽원 회장의 평소 입버릇은 도쿄 하늘에 나를 던져다오였습니다.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아시아리그의 심장부 도쿄에서 우승의 헹가레를 부탁한다는 그의 바람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마침내 7번의 도전 끝에 안양한라는 정몽원 회장을 도쿄 하늘 높이 던져 올릴 수 있었습니다. 만도 위니아 창단 이후 17년만에 한라그룹의 아이스하키 외길이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챔피언전 최종 5차전에서 연장 결승골이 들어가는 순간, 머리 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정몽원 회장)

 

이후 안양한라는 황금세대를 구축하게 됩니다. 팀의 레전드 페트릭 마르티넥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2012년 핀란드에 진출했던 신인 선수들과 상무에서 복귀한 베테랑 선수가 절묘한 세대교체를 이뤄내면서 안양한라는 2014년부터 2017년까지 3연속 정규리그 우승, 2010-2011, 2015-2016, 2016-2017년 플레이오프 우승을 기록하며 자타공인 아시아리그 최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특히 2016-2017년에는 최다 승점 정규리그 우승, 플레이오프 전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게 되죠.

 

아시아의 최정상에 군림한 한라그룹의 꿈은 이제 세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라그룹은 자사 팀인 안양한라뿐만 아니라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을 위한 투자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아이스하키 인프라를 구축함은 물론, 후진 양성을 위해 핀란드 프로젝트를 감행해 유망주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귀화 선수 추진을 통해 대표팀의 전력을 상승시켰으며, 아시아리그의 상품화 전략을 통해 세계 아이스하키에 아시아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죠.

 

안양한라의 구단주인 정몽원 회장은 2013년 한국 아이스하키협회장이 되어 국가대표에게 안양한라와 같은 애정을 쏟고 있습니다. 정몽원 회장이 협회장에 오를 당시만 해도 IIHF(국제하키연맹)는 개최국 대한민국의 2018 동계올림픽 본선 참여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수준이 현저히 낮은 한국 대표팀에게 귀중한 본선 티켓을 양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 2014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5전 전패를 기록하며 3부리그로 강등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기회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정몽원 회장은 IIHF를 적극적으로 설득하며 한국의 성장 가능성을 피력했습니다.

 

정몽원 회장은 IIHF의 제안을 받아들여 NHL의 레전드 백지선 감독에게 사령탑을 맡기고 전권을 위임했으며, 7명의 귀화선수를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습니다. 또한, 예산을 재편성해 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행정이 가능토록 했습니다. 결국 정몽원 회장의 행동력에 감복한 IIHF는 한국 대표팀의 본선 진출을 허락했습니다. 정몽원 회장의 진두지휘 아래 시작된 국가대표판 성장 프로젝트 역시 열매를 맺으며 올해 한국은 월드 디비전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20년 전, 일본에게 친선경기마저 외면 당하며 수모를 겪었던 한국 아이스하키의 기적적인 성장이었죠.

 

지금도 선수 출입문에 서서 한 명 한 명에게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열혈 협회장 정몽원 회장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다가오는 평창에서 8강에 진출하는 꿈을 말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목표지만, 산에 올라갈 때 너무 높이 위를 보면 목표까지 갈 수 없다. 그저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정몽원 회장)

 

아이스하키 변방국, 눈발이 흩날리던 불모지에 태어난 푸른 백곰 안양한라. 모진 바람을 온몸으로 버티며 시작한 아시아리그는 한국 아이스하키의 저변을 확대시켰고,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과감하게 단행한 투자는 세계 수준의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만들었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도리라는 겸손한 책임감 속에 시작된 한라그룹의 사명, 아이스하키팀 안양한라. 안양한라는 그 책임감 속에 자라나 지금은 한국 아이스하키의 뿌리가 되고, 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평창 동계 올림픽. 한라그룹이 쏘아 올린 작은 꿈, 아이스하키가 시원한 승전보를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 수 있길 응원합니다.

[출처] 한라그룹 공식 블로그에서( https://blog.naver.com/hallagroupblo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