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240610]1801년 안양 호계서원에서 사용한 통문(通文)

안양똑딱이 2024. 6. 10. 14:57

 

2024.06.10/ #아카이브 #고문서 #안양 #호게사원 #통문/ 인터넷 웹서핑을 하다 발견한 안양 관련 고문서. 현재 흔적을 찾을수도 없는 안양 동안구 호계동 매봉산 자락에 있던 호계서원에서 사용한 통문(通文) 이다.
자료출처: 네이버 블로그 전통사찰여행가 제임스
https://m.blog.naver.com/ipwin61/221827604771

통문(通文)은 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다.
서원·향교·향청(鄕廳)·문중(門中)·유생(儒生)·결사(結社)와 의병, 혁명이나 민란의 주모자들이 대체로 연명(連名)으로 작성하여 보냈으며, 그 내용은 통지·문의·선동·권유 등 다양하다. 일반 서신과 다른 점은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사실이나 주장을 다수에게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통용된 것 중의 하나는 서원·향교·유림에서 보낸 것으로, 이를 ‘유통(儒通)’이라고 하였다. 유통은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유생들에게 돌리는 글로서, 서원의 건립이나 보수, 효자·열녀·충신들의 정문(旌門: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는 붉은 문. 작설. 紅門) 건립 또는 증직(贈職) 등의 표창 건의, 문집의 발간, 향약계의 조직 등에 대한 내용이 많다.
사진속 통문에는 신유(辛酉)년 4월28일에 작성한 것으로 기록돼 1801년에 호계서원에서 쓰여진것으로 보인다.

한편 호계서원은 안양 지역 사립 교육의 효시로 조선시대 숙종 7년(1681년) 유림들이 독암(獨庵)조종경(趙宗敬 1495-1535)과 창강(滄江)조속(趙涑1595-1668)의 학문과 덕행을 숭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였고, 고종 1년(1864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

 

안양 지역 사립 교육의 효시 호계서원(虎溪書院)

 

안양지역 근대 교육의 출발은 1909년 호계동 방죽말(현 호계도서관 부근)에 위치한 사립 교육 기관 낙영학교(樂英學敎)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효시를 따져보면 조선시대 세워진 호계서원이 안양지역 최초의 사립 교육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계서원은 안양시 동안구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종경과 조속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681(숙종 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종경(趙宗敬)과 조속(趙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두 사람의 위패는 서원터에 매안(埋安)되었으며,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였다.

 

호계서원이 자리했던 서울외곽순환도로 옆 안양장례식장 일대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원의 주춧돌이나 깨진 기와의 흔적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모두 사라져 아쉬운 마음이다.

 

서원은 선대 명현을 추모하여 제를 올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지방에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고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본격적인 서원의 출발이었다. ‘창강서원((滄江書院)’으로도 부르는 호계서원은 1861년 조종경과 조속의 제자들이 건립했으며, 이곳에서 학문과 선현의 덕을 강론하였다. 위치는 ()효성실업의 동쪽으로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서 부신진자동차학원의 북쪽의 나지막한 야산지역이다. 1990년 중반까지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으며, 현재는 호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호계서원에 모셨던 인물

조종경(趙宗敬 14951535)은 조속의 증조부로 호는 독암(.)이다. 1520(중종 1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526년 이조 정랑에 전임, 장령과 전한 등을 지냈으며 1531(중종 26)에 사섬시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 머물며 집의 편액을 독암이라 부르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독암유고(獨庵遺稿)를 남겼다.

조속(趙涑 15951668)은 조선 중기의 서화가이다. 호는 창강(滄江)이며 1623(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과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7년 덕산 현감을 거쳐 상의 원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호계서원 외에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도 제향 되었으며, 문집으로 창강선생집(滄江先生集)이 있다

안양문화원발행 안양문화’ 11(통권, 201212월 발행)에 따르면 김안로 일당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36세 은퇴(파직)이래 41세 사망하기까지 약 5~6년간 말년을 과천현 호계리 호계촌사(별장)’에 은둔하면서 시어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생을 마감한 조종경. 호계촌사(虎溪村舍, 시냇물이 있는 산골짜기에 지은 별장)에 은둔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읊조리며 남긴 한시, 독암유고(獨庵遺稿) 209편 중 40여 편의 작품이 시어로 또는 제목으로 호계(虎溪)’ 연관단어(溪邊, 山亭 )들이 흔히 등장(예시, 吾廬正住虎溪邊, 내 집은 바로 호계가에 거주하니)한다. 그가 남긴 독암유고 속 시어를 분석해보면, 그는 말년 낙향 후 그의 삶의 터전인 ‘(조선)호계리, 호계촌사(虎溪村舍)’를 무한 사랑하며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시어로 호계를 찬미하며 노래했던, 안양지역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했던 조선의 선비요 시인이다. 조종경의 독암유고 속 옛 시문에 촌사즉사(村舍卽事, 시골집에서 문득 생각나서)’, 한시 속에 아침에 해가 뜨면 울타리가에 호랑이 자취 많다는 시어가 등장(원어: 일출이변다호적:日出籬邊多虎跡)하는 문헌상의 정황으로 보아 조선시대 호계서원이 있던 호계촌사(별장) 주변(매봉산, 안양장례식장 인근)은 예로부터 호랑이 출몰이 잦았음을 알 수 있다. 조종경이 주옥같은 필치로 남긴 글을 모은 유고시집(문헌)독암유고를 통해 당시 조선시대 안양(호계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 주목된다. 한편 그림과 서예에 능했던 유명 서화가인 조속(趙涑 15951668)은 조종경의 증손자로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중기의 서화가(문인화가)이다. 호는 창강(滄江)이며 1623(인조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과 관직을 사양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산수,수묵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으며, 저술로는 창강일기(滄江日記) 등이 있다.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미술사학, 특히 미술사(회화사)분야의 유명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초대 서이면장 및 초대 안양읍장에 부임한 조한구(趙漢九, 1833~1965)는 고종 20년 출생한 인물로 독암 조종경의 후손이며 창강 조속의 10대손이다. 그는 행정가로서 1932년 당시 안양유원지 삼성천변에 석수동수영장(안양풀/안양뿌르) 설치에 관여함으로서 지역관광 진흥을 꽤했고, 군포초교와 안양초교 설립에도 관여하여 지역교육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바 있다. 또한 시흥군 청사를 안양으로 유치하는 등 각종사업으로 격동기 안양 근대화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으나 친일 논란도 있다.

 

호계서원이 존재한 시기는 약 190년으로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과천군내 민절서원 및 노강서원과 함께 지방의 인재육성과 정신적 지주로 존재하였다. 특히 국립 교육 기관인 향교(鄕校)를 대신하는 사설 교육 기관으로서, 숙종 연간에는 한 도()에 팔구십을 헤아릴 정도로 성행하기도 하였다. 호계서원 역시 이러한 서원 증가와 함께 세워진 지방 사교육의 전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세 특혜와 균역 기피, 붕당 조성 등 폐단이 심각해졌다. 이에 대원군 섭정시기인 1864(고종1)부터는 전국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 47개의 대표적인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없어졌는데, 호계서원 역시 1870(고종 7)에 철폐되었다.

 

현재 호계서원이 있었던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안양시 문화관광과 문화재전문위원으로 일했던 김지석씨는  따르면 호계서원의 위치는 외곽순환도로 북쪽으로, 안양장례식장 뒤편의 사유지라 한다. 현실적으로 안양교육의 발상지인 호계서원을 복원하기 어렵다면 서원지(설명문 부착)라도 표시하여, 인문적 여가문화 공간조성 및 인문학 진흥공간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유적지(서원지) 흔적을 살려 역사 관광자원으로 가꿔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사명이자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이 든다. 호계서원()의 흔적을 살려 문화관광콘텐츠로 활용하고, 정절과 충직 및 지조와 절개 등으로 조선선비들의 존경을 받은 (독암)조종경과 (창강)조속의 강직한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는 인문교육의 장으로 가꿀 필요가 있다. 서원지가 사유지라 손을 대기 어려운 실정이라면 토지소유자의 토지사용 동의를 구하거나 매입하여서라도 관광자원이 부족한 안양시가 출구를 모색하여야 한다. 서원지 접근로를 개설하고, 상징물 조성 및 테마가 있는 산책로(서원길, 호랑이길, 인문의 동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문화관광자원이 부족한 안양시가 역사 속 흔적을 발굴하여 문화가치 창출 및 지역진흥을 모색하고 인문감성을 키우는 인문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