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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0]안양지역 사립 교육의 효시 호계서원(虎溪書院)

안양똑딱이 2024. 6. 10. 16:14

 

 

[우리안양 11월호]

안양 지역 사립 교육의 효시 호계서원(虎溪書院)

출처: 우리안양 2014년 11월호(2014. 11. 28)

https://blog.naver.com/tvanyanggokr/220194393479

 

안양지역 근대 교육의 출발은 1909년 호계동 방죽말(현 호계도서관 부근)에 위치한 사립 교육 기관 낙영학교(樂英學敎)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효시를 따져보면 조선시대 세워진 호계서원이 안양지역 최초의 사립 교육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계서원이 자리했던 서울외곽순환도로 옆 안양장례식 장 일대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원의 주춧돌이나 깨진 기와의 흔적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 이 모두 사라져 아쉬운 마음이 든다.

 

교육 기관이자 제사를 지냈던 호계서원

서원은 선대 명현을 추모하여 제를 올리고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1542년 풍기 군수 주세붕이 순흥지방에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고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본격적인 서원의 출발이었다. ‘창강서원((滄江書院)’으로도 부르는 호계서원은 1861년 조종경과 조속의 제자들이 건립했으며, 이곳에서 학문과 선현의 덕을 강론하였다. 위치는 ()효성실업의 동쪽으로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지나는 서 부신진자동차학원의 북쪽의 나지막한 야산지역이다. 1990년 중반까지 이곳에서 와편과 주춧돌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으며, 현재는 호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호계서원에 모셨던 인물

조종경(趙宗敬 14951535)은 조속의 증조부로 호는 독암(.)이다. 1520(중종 1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526년 이조 정랑에 전임, 장령과 전한 등을 지냈으며 1531(중종 26)에 사섬시정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에 머물며 집의 편액을 독암이라 부르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독암유고(獨庵遺稿)를 남겼다.

조속(趙涑 15951668)은 조선 중기의 서화가이다. 호는 창강(滄江)이며 1623(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훈명과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7년 덕산 현감을 거쳐 상의 원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일컬어졌으며, 그림은 매((산수와 더불어 수묵화조(水墨花鳥)를 잘 그렸다. 호계서원 외에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도 제향 되었으며, 문집으로 창강선생집(滄江先生集)이 있다.

 

호계서원 터에서 선비 정신을 느끼다

호계서원이 존재한 시기는 약 190년으로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과천군내 민절서원 및 노강서원과 함께 지방의 인재육성과 정신적 지주로 존재하였다. 특히 국립 교육 기관인 향교(鄕校)를 대신하는 사설 교육 기관으로서, 숙종 연간에는 한 도()에 팔구십을 헤아릴 정도로 성행하기도 하였다. 호계서원 역시 이러한 서원 증가와 함께 세워진 지방 사교육의 전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세 특혜와 균역 기피, 붕당 조성 등 폐단이 심각해졌다. 이에 대원군 섭정시기인 1864(고종1)부터는 전국에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 47개의 대표적인 서원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없어졌는데, 호계서원 역시 1870(고종 7)에 철폐되었다.

현재 호계서원이 있었던 옛 모습을 찾을 수는 없으나, 그 옛날 강직한 선비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안양 유일의 서원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