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338

안양의 명칭과 동네별 지명의 유래

▶ 명칭유래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이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하였다. 조선시대에 정조대왕께서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세사람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짐작한다.또한 1..

[자료]군포의 역사와 각동 지명유래

군포의 역사 및 각동 지명유래 군포(軍浦)라는 지명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 하는데 이곳에 머물 때 마을 사람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한다. 그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후부터 이 지역을 군포(軍飽)라고 하였으나 시대 변천으로 군포(軍浦)가 되었다. 군포 1동(軍浦 1洞) 본래 과천군 남면 당리이었는데 1914년 3월 군면 폐합에 따라 시흥군 남면 당리로 개칭되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거 군포읍 당리로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법류 제4050호에 따라 군포시로 승격 되면서 당리 일원이 군포1동이 되었..

안양시의 역사와 연혁

문헌상에 등장하는 안양의 역사는 율목군이라는 행정명칭이 있으나 이전의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시 석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발견되어 안양지역의 오래된 주거근거를 알수가 있으며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 근초고왕(346-375)때에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가 고구려 장수왕(394-491)때 한강연안 및 경기도 전지역이 고구려 남쪽의 영토가 되었다. ▶ 연혁 ○ 475년(고구려 장수왕 6년) 율목군에 속함(박달동,석수동은 잉벌노현에 속함) ○ 757년(신라 경덕왕16년) 곡양현을 고쳐 율진군이 되었음 ○ 940년(고려 태조 23년) 과주(금주현) ○ 991년(고려 성종9년) 부림 또는 부안(과주의 별호를 부..

안양 민자역사와 역에 얽힌 이야기

안양시와 철도청은 13일 안양민자역사 대합실에서 안양역사 이전 개통식을 가짐에 따라 지난 97년 10월 2일 임시역사로 이전한지 만 4년만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민자 안양역 시대의 막이 올랐다. 안양시가 후원하고 안양역과 (주)안양역사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시장, 시의장 등 각계 인사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양역장의 경과보고속에 민자역사 안양역 개통식 테이프를 끊고 역무시설을 둘러보았다. 안양민자역사는 ㈜안양민자역사와 철도청이 모두 1천100억원을 들여 안양1동 88의1 일대 2만8천47㎡ 부지에 지난 95년 착공해 지하3층 지상9층 규모의 현대식 복합건축물로 LG건설이 시공중이며 이번에 개통된 역무시설은 지하 3층 지상 4층 연면적 8천693㎡ 규모로 시민편의를 위해 대합실과 개찰구.승강장으로 이..

추억의 건물 안양소방서 망루의 연혁

안양소방서 청사신축후 안양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소방서 망루였기에 어느 곳에서 든지 볼 수 있었고 따라서 망루는 넓은 지역을 훓터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 당시 화재를 발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 망루였다. 119화재신고 전화로 화재 접보를 받기도 했지만 전화보유의 대중화등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이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루는 24시간 주·야로 안양시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안양시내의 화재를 감시하고 화재징후가 나타나면 신속한 출동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며 이곳이야말로 20여년동안 흘러온 안양소방의 산 역사로서, 시민들의 애환과 노 소방관의 정감이 서려 있는 상징물인 것이다. 망루 높이는 25M 8층 층고로서 망루 정상 외벽에는 아지도 붉은 글씨로 「불조심」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

시흥군 - 안양소방서의 변천사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 가. 최초 의용소방대(시흥군 안양의용소방대) 시흥·안양 의용소방대의 역사는 정부수립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회적 여건과 상황은 행정공백 상태를 맞이하게 되어 지도자나 민중이 급격한 변화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 하고 있던 어수선한 정국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러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적인 기간산업 및 중요업무는 피폐되고 국민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따라서 소방의 업무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후복구와 수방 및 화재진압과 예방에 힘을 쓰는 중요한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행정공백 상태로 인해 소방서의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 이러한 소방의 업무를 대신할 만한 민간조직이 바로 의용소방대였던 것이다. 1948년 3월 ..

[최승원]역사성이 풍부하게 누적되어 있는 안양유원지

한국 박물관학회 평의원/ 건축사 삼성천 좌측 유유산업에서 안양사 주변 거북골에는 5000년의 한국문화가 누적되어 숨쉬고 있다. 고대 신앙생활의 유적으로서 그 문화적 가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장수바위, 미륵장군등 세계적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거석문화의 흔적들이 이 주변에 널려 있다. 이것은 염불암에서 삼막사까지 연결되는 대장정이다. 만안교(거북다리)에서 시작하여 거북바위(광석바위)→안양사귀부(거북형상)→거북골→삼귀자바위는 거북이의 행렬이다. 중초사당간지주주변 우물은 하단이 4각형이고 상단이 원형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으로 조성되어 있다. 안양유원지 주변에는 99개의 절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전설에는 이 절들을 다 볼려면 짚신을 등에 메고 들어가 다 닳아서 나간다는 이야기가 ..

[문원식]'안양면사무소' 복원에 대하여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석수동과 박달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재 안양지역은 일제시대 초기까지 안양천을 경계로 상서면과 하서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두 개의 면이 합쳐서 서이면(西二面)으로 행정명칭이 변화된 시기는 1914년 3월 1일에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해서 인데이 때의 서이면사무소는 호계 2동 방죽말에 있는 구 교육청 자리 앞쪽에 있었다. 서이면사무소는 1917년 7월 6일 자로 현재의 안양 1동 사무소 옆 안양옥 자리로 옮겨오게 된다. 면사무소의 이전은 서이면의 중심지가 호계리에서 안양리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데, 1905년의 안양역사 개설로 인하여 인구와 물자이동의 중심축이 안양리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이 곳은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된 이후에..

[문원식]우리가 언제부터 '안양사람'이라 했을까?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99년 봄 100여명의 민방위교육생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안양이란 말만 들어도 코끝이 찡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본 적이 있다. 이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20세 이상 안양 시민 중 토박이의 비율과 일치하여 묘한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에 난다. 이처럼 코끝이 찡해진다는 느낌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지역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살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정주의식(定住意識)이란 말로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주의식이 지역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높은 주민들이 많아질 때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지게 될 것이고, ..

[문원식]21세기 안양의 과제와 비전

성결대학교 교수, 안양학연구소 소장 과천 공로변에 위치한 촌락에 불과하던 안양지역을 산업사회로 이끈 일대 사건은 1905년 1월 1일 자로 개통된 경부선 철도와 그로 인한 안양역사의 개설이었다. 안양역사의 개설은 그때까지 불과 10여 호에 불과하던 안양리 일대의 인구를 30년만에 역전을 중심으로 3,000명 이상이 모여 사는 도시로 만들었고, 이후 안양리가 인근지역의 정치·행정 및 산업의 중심지가 되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안양의 산업화시대를 이끈 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은 1932년 현 대농단지에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된 일이다. 일본인 자본에 의해 조선직물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안양의 산업화는 섬유와 제지산업을 중심으로 하여 안양이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순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