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20. 15:17

[정진원]과천의 옛 마을 지명 이야기

우리나라 지명, 특별히 마을이름의 역사에서 볼 때 1914년은 마을이름의 ‘창촌개명(創村改名)’의 해였다. 일제에 의한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우리네 선조들을 모욕한 것이라면, 창촌개명은 우리네 땅을 더럽힌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일제는 당시 7만여 개 정도의 우리나라 마을(구동리)을 2만여 개 정도의 신동리로 통폐합하였다. 세 개 정도의 마을을 합쳐서 하나의 신동리를 만들고, 거기에 어김없이 한자 이름을 붙였다. 그때 순수소박한 우리말 마을이름이 잡종생경한 한자 동리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 노루울, 가래울, 가재울]
 
제비, 참새, 까치가 많은 마을이라서 제비울, 참새울, 까치울이 되었을 것이다. 제비는 착한 마음씨의 사람을 좋아해서 (중국의) 강남까지 갔다가도 이듬해 봄이 되면 그 사람의 집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고 하였다.
제비울에는 순하디순한, 어수룩하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이 살아서 매년 제비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집에 제빈들 어찌 빈손으로 찾아왔을 것인가?
제비는 가난하지만 착한 흥부네 집에 금박씨를 물어다 주었다고 한다. 제비울을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따듯해지는 것 같다. ‘∽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고대 신라, 백제 지명의 ‘화(火), 벌(伐), 부리(夫里)’가 ‘ㅂ→ㅸ→오/우’ 음운변화를 거쳐 ‘울’이 되었다는 것으로 신라 통일 이후 그 표준어가 북상해서 경기, 강원 영서, 충남북 지방에 산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울이 그 예일 것이다.
둘째는 울타리, 또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안의 요(凹)지를 가리키는 ‘울’이라고 보는 것과 셋째로 ‘∽골’의 ㄱ 탈락에서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에 제비울이 있다.
지금 제비울미술관이 있는 아래 쪽 동네이다. 포천군 이동면 연곡리(燕谷里)는 본래의 ‘제비울’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다. 연천군 백학면에 참새울, 연천군 왕징면에 까치울이 있다. 가래나무[추楸]가 많은 ‘가래울’, 실개천에 사는 가재가 많은 ‘가재울’ 등 지명이 여러 곳에 있다.
 
 
□갈미 [칙미, 갈뫼, 갈산, 갈현, 가루개]
 
‘만수산 드렁칡’이나 ‘갈등(葛藤)’에서 보는 것처럼 칡[갈(葛)]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식물이었다. 칡 줄기를 끊어내서 풀단을 묶는 데 쓰기도 했고, 소가 특별히 칡덩굴을 좋아해서 소 먹이로 이용되기도 했다.
칡뿌리를 캔다고 깊은 산속을 헤매기도 했었다. 여름날 봉숭아꽃을 이겨 칡잎에 싸서 손톱에 매어놓고 하룻밤을 자고 나면 빨간 꽃물이 손톱에 배어들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도 있다.
초여름이면 벌써 드렁칡이 고갯길 가로 슬며시 기어 내려와서 머리를 들었고, 마침내는 예쁠 것도 없는 보라색 꽃을 피웠었다. 그래서 고개를 넘다보면 먼저 칡순을 만나게 되었고, 불현듯 고개를 돌려보면 산이 온통 칡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이름에 ‘칡고개(칡산)’란 뜻의 갈뫼(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갈현(리) 등의 지명이 많다. 과천시 제비울에서 찬우물 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가루개’라 불렀었는데, 가루개는 아마도 ‘갈(칡)고개’가 음운변화를 거쳐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루개를 중심한 그곳 이동명이 갈현리(동)가 되었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벌말[평촌(坪村)]이란 기다란 노촌(路村)이 있었고, 그 동네가 끝나고 조금 더 나가면 갈미(갈뫼)란 마을이 있었다.
갈미에서 한참 더 가면 군포 경수도로에 닿게 되어있었다. 서울 은평구에도 갈현동이 있다. 순전한 우리말 마을이름 ‘칙(칡)미’가 인천 계양구 굴현동에 있다. 그 이름이 가장 좋아 보인다.
 
 
□맑내골 [맑은내>맑내>막내>막계(莫溪), 청계(淸溪)]
 
지금의 과천시 서울대공원 초입에 ‘맑(은)내골’이란 동네가 있었다. 말 그대로 맑은 시냇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의 지명이겠다.
우리나라 마을이름이 대개 그렇듯이 ‘맑내’를 억지 한자로 고치려다 보니 ‘막계(莫溪)’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한자 ‘莫(막)’은 형용사로 쓰일 때는 ‘아닐(not)’이란 뜻이 되므로 막계(莫溪)는 한자대로 쓰면 맑은내가 아닌 ‘흐린[탁(濁)]내’가 되어버린다.
허명이 본질을 흐리게 하는 꼴이 되었다. 왜 이다지도 한자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한자를 써도 바르게 써야 할 것이다. 차라리 맑은내를 ‘청계(淸溪)’라 하면 뜻은 맞게 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이곳 맑내를 청계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것은 근처의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시내라는 뜻도 되어서 막계보다는 훨씬 좋아 보인다. 청계산 동남쪽에도 의왕시 청계동이란 마을이 ‘상청계-중청계-하청계’로 늘어서 있고, 그 옆을 흐르는 시내를 청계천이라 하였다.
서울에도 잘 알려진 청계천이 있다. 얼마나 물이 맑으면 청계라 했겠는가. 님 웨일즈는 우리나라의 맑은 시내를 이렇게 예찬했다. ‘반짝이는 조약돌이 깔려있는 냇가에서 시골 아낙네와 처녀들이 무명옷을 눈처럼 희게 빨고 있다.
이상주의자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눈부시도록 깨끗한 청결을 위하여 그토록 힘든 노동을 감내하지는 않으리라.’(님 웨일즈, 아리랑, p.28)
 
 
□새술막 [주막(酒幕), 주막거리]
 
과천시 문원동 향교말 동남쪽 길가에 새술막이란 작은 동네가 있었다. 술막은 대개 주막(酒幕)이라 하였고, 대개는 길가에 있으므로 ‘주막거리’란 지명으로 되었다. 어디에나 주막거리는 있었다. 지금 서울 오류동 경인가도에도 주막거리가 있었다.
대개의 우리말 마을이름이 그렇듯이 주막보다는 술막이 더 정겹다. 술막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술막이 되었을 것이다. 술막에 얽힌 사연들이 많다. 아마도 남태령을 넘어오거나, 넘어갈 사람들이 아픈 다리도 쉴 겸해서 들르는 곳이 그 새술막이었을 것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술막도 있었을 것이나 대개는 판문을 밀고 들어가면 봉당 바닥에 긴 탁자 하나 놓고, 의자도 없이 선술집 모양으로 된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럴듯한 주모는 있는 둥 마는 둥 했었다.
술막 뒷방에 노름판을 부설하여 동네 건달들이 모여 밤새 노름판을 벌리기도 하고, 어리숙한 사람은 자기 집문서를 들고 와서 노름 타짜에게 헌납하기도 했으며, 한 해 새경을 받은 머슴이 그것을 하루 저녁에 몽땅 털리고 다시 머슴살이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술막에 어여쁜 웨이트리스(작부, 영업자)가 왔다는 소식보다 더 빨리 자동차 사고 현장에 레커차가 달려드는 것처럼 한량들이 운집해서 힘겨루기를 하다가 대형 충돌 참사가 빚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죽바위
 
옛날 과천은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에 안겨있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한촌(閑村)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에 유난히 햇볕이 맑고, 따듯했다.
지금 과천시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그래서 생겨났다. 별양동의 원래 지명은 ‘베레이’였다. 옛날에는 남도 사람들이 한양 갈 때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과천이 있었다.
한양이 두려워서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도 있었잖은가. 그러다가 경부가도 신작로와 철도가 안양을 통과하게 되면서부터 과천은 쇠하고, 안양은 흥하게 되었다.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다. 과천은 과천대로 변화 발전되어서 우리나라 최고의 주거지가 되었다. 정감록 비결을 다시 쓴다면 일왈(一曰) 풍기가 아니라, 과천이라 할 것이다. 관악산은 돌산이다. 지형학적으로 보면 노년기 지형에 나타난 잔구성(殘丘性) 산지이다. 오랫동안의 침식과정에서 주변부는 침식되어 없어지고, 침식에 잘 견디는 암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남아서 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과천에는 돌 관련 지명들이 많다. 주암동(注岩洞)에 죽바위란 마을은 큰 바위가 줄 지어 있으므로 ‘줄바위>죽바위>주암(注岩)’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지명은 제멋대로 붙여진 것이다. 지금 지하철 4호선 역명으로 쓰이고 있는 ‘선바위’는 큰 돌이 서 있어서 된 지명이고, 막계동에는 돌이 많은 곳이라 하여 돌무개란 동네가 있었다.
 
 
□사기막 [사기점, 옹기막, 옹기점]
 
여러 가지 생활도구 가운데 그릇의 발명이야말로 인류문명사에 뚜렷한 하나의 이정표였다. 그릇은 의식주의 식생활에 불가결의 도구였다. 만약 간장 종지나 나물 접시나 밥사발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들짐승처럼 (핥아)먹고, 원숭이처럼 모든 것을 손으로 움켜쥐고 먹었을 것이다.
그릇을 만드는 소재로는 나무, 돌, 흙, 쇠붙이가 쓰였다. 아마도 순서대로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흙과 쇠붙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불을 써야 하고,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했을 것이므로 그릇 제조사의 후대에나 가능케 된 일이었을 것이다.
마을이름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가마[도요(陶窯)]가 전국적으로 분포했다. 가마에서는 서민 생활용의 사기그릇이나 옹기(甕器) 및 비교적 고급 도자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사기는 백토(고령토)를 재료로,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워낸 그릇으로, 전에 많이 썼던 (밥)사발이나 대접이 사기의 대표적인 것이다. 백토를 1300°C 이상 고온으로 구우면서 장인의 카리스마를 불어넣으면 우리나라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같은 자기가 되었다.
 
 
□다락원 [누원(樓院), 다락터, 누기(樓基)]
 
웬만한 시골집에는 다락과 벽장이 있었다. 다락은 대개 부엌 위로 연결되었으므로 방 아랫목 방벽에 다락문이 달려 있었다. 대개 외짝 다락문을 열면 두 단 정도 올라가서 부엌 위쪽으로 다락[누(樓)]이 있었다.
두 세 사람이 누울 정도의 좁은 마루였다. 손길이 자주 닿지 않는 곳이라 먼지가 쌓여있고, 세간 잡동사니가 흐트러져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런 다락 안이 항상 궁금했었다.
물속 깊이 가라앉은 보물선이어서 거기서 신기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판도라의 상자처럼 잘못 열었다가는 무서운 괴물들이 한꺼번에 나타날 것 같기도 했었다.
거기에는 장난감 같은 난쟁이들이 오물거리며 예사롭지 않은 어떤 일들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근심하기도 했었다. 인류가 ‘호모 에렉투스’가 되면서 손만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시야와 생각도 넓어지게 되었다.
다락은 지평(地平)의 수준을 조금 위로 높인 장소이다. 원두막이나 누각(樓閣)이나 망루(望樓)가 그렇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는 지면에서와는 사뭇 다른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량들의 음풍농월이나 백면서생의 고담준론이 있게 되었고, 깨어 있는 의식이 먼 곳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곳이 되기도 하였다. 이천여 연 전 유대 땅 마가의 다락방에서는 세계 교회가 태동하기도 했었다.
도봉구 도봉동에 다락원이란 마을이 있었다. 다락으로 된 원(院)이라 해서 다락원이라 하였고, 한자로 ‘누원(樓院)’이라 고쳐 썼다.
서울누원초등학교, 누원고등학교의 교명으로 쓰이게도 되었다. 과천시 문원동에는 다락이 있었던 터라 하여 다락터란 마을이 있었고, 한자로 ‘누기(樓基)’라 하였다.
보통 진흙을 재료로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그릇이 질그릇, 질그릇에 잿물을 발라서 다시 구워내면 오지그릇이 되었고, 이와 같이 진흙을 재료로 한 그릇을 통틀어 옹기(甕器)라고도 하였다.
과천시 문원동, 안성군 금광면, 삼죽면, 이죽면에 사기막이란 동네가 있었다. 과천시의 여러 군데서 가마터가 발굴된 바 있다.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8가, 안성군 이죽면에 옹기점(말)이란 마을이 있었다.
수십 년 전 지금 영등포동 영등포교회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근처에 좁은 골목길이 있었고, 골목길 얕은 담장이 깨진 옹기조각으로 되어 있었다. 그 부근 두 군데에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의왕시 학일동에 있는 점말은 옹기점의 점말이다.
 
 
□옥탑골
 
과천시 갈현동에 옥탑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고려시대 옥탑(玉塔)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란다. 탑이야 목석철(木石鐵), 기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흔한 것은 석탑(石塔)이었다.
내구성이 크고, 어디서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돌이었으므로 석탑이 가장 흔하게 되었다. 불국사의 다보탑, 석가탑 등 우리들이 아는 탑의 대부분이 석탑이다.
목탑(木塔)도 깎아 세울 수야 있었겠지만 돌탑만큼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전탑(塼塔)이라 하여 흙으로 구워 낸 벽돌로 만든 탑도 있었다. 우리나라 보물226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이 그런 전탑이다. 집안에 놓고 보는 애완용(愛玩用) 탑이야 모든 것이 다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옥이면 어떻고, 금이나 은이면 어떻고, 동철이면 또 어떻겠는가. 그런데 지금 과천시 가루개(갈현) 남쪽 어느 길가인지, 조금 떨어진 제비울 산기슭인지 옥탑(玉塔)이 있었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을이름으로까지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그곳에 작지 않은 옥탑이 실제로 있었다고 본다. 숭불(崇佛) 시대정신이 풍미했던 때이므로 옥으로 된 탑을 못 만들 이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 생각하면 그곳에 옥탑이 정말로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베루니(별양동) 양지바른 언덕에 코발트블루의 옥탑을 염원했던 동시대인들의 청정심이 있었다면, 그것이 옥탑보다 더 아름답다, 할 것이다. 옥탑, 옥탑골은 당대의 사이버 공간에 떠 있었던 영롱한 아이콘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 지리학과를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문화역사지리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지리학과 강사를 역임하였고,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방배중학교 교감,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현재는 수필가이자 의왕시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안양광역신문을 통해 과거 시흥군 지역에 대한 담론을 연재하고 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