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신문읽기 9

[20240202]1988년 안양전자 위장이전 철회 투쟁 사건

2024.02.02/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전자 #노동 #여성 #since1988/ 1988년 안양을 뜨겁게 안양전자 위장이전 철회 투쟁 사건. 안양전자 여성노동자들이 안양 삼원극장옆 삼원빌딩에 있던 안양전자 사무실을 장기 점거하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극한의 삶을 살았고 안양잔다 농성은 지역노동계의 지지와 연대 투쟁을 이끌어냈다. 1987년 “흩어지면 노예 되고 뭉치면 인간 된다”고 외치면서 근로자도 인간임을 선언했던 노동자들은 88년 접어들면서 놀라운 의식의 각성을 보인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던 절규에서 “노동자가 주인이다. 주인답게 살아보자”는 구호로 바뀐다. 1987년 8월에 안양지역 최초로 총파업을 전개했던 19개 택시노동자들은 88년 4월 4일 노조탄압에 맞서 다시 총파업을 실시했..

[20240124]안양 고려청자 가마터 발견 대서특필(1987.10.13)

2024.01.25/ #아카이브 #기록 #옛신문 #안양 #고려창자 #가마터 #관악산/ 1987년 10월 13일자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서특필되었던 안양 관악산(서을대수목원 끝자락 안양 비산동도요지)에서의 고려청자 가마터 발견 기사.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신문과 MBC-TV 등에 보도되고 이후 대한뉴스를 통해서도 방영되었다. 안양시비산동도요지 (安養市飛山洞陶窯址) 대한민국 경기도의 기념물 제124호로 지정(1991년 4월 12일) 주소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산3-1번지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안양 비산동 도요지(安養 飛山洞 陶窯址)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서울 농대 수목원 안에 있는 11∼14세기에 걸쳐 오랜 시간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요지이다. 199..

[20240115]안양화약고 발화(1946.04.21 동아일보)

2024.01.10./ #아카이브 #옛신문 #기록 #역사 #동아일보 #since1946/ 동아일보 1946,04,21일자 기사. 안양화약고 19일 발화 “19일 정오경 안양에 잇는 전군용지 산에서 돌연 큰불이 났는데 이는 전에 일인들이 산에저정했든 폭발화약을 폭발 식혀 업새다가 불덩어리가 나무에 연소된 것이다 불은 곧 진화되었스나, 산에는 아직도 폭발물이 남어있는만큼 금후 안전한대책을 마련하여 주기를 일반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옛 어르신들의 구술과 기록을 보면 일제는 박달군용지에 1941년경 일본군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을 건살해 탄약고를 비롯 각좉 군수물자르 저장했디.일본 패망후 군용지 시설을 접수한 미군이 탄약고를 폭발시켜 저정된 포탄을 없앴다. 하지만 엣 신문들을 보면 미군의 탄약고 폭팔 이후에도..

[20240113]안양 일본군 화약고 폭발(1945.11.10일자 자유신문)

2024.01.10/ #아카이브 #옛신문 #기록 #역사 #자유신문 #since1945/ 1945. 11.10일자 자유신문 기사. 일본군화약고 폭발. "안주택지에서 약 500미터쯤 떠러진곳에 잇는 종래 일본군의 소유이든 화약고 수개소는 9일 돌연히 폭발되어 피해가 상당한 양으로 방금도 경찰부에서는 급거히 현장에 출동하야 원인과 손해를 조사중이다." 이 기사는 박달군용지에 자리했던 일본군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내 탄약고를 일제 폐망이후 박달 군용지를 접수한 미군이 폭발시킬 당시가 아닐까 싶다. 작고하신 안양 원로 고 변원신어르신 구술에 의하면 일제는 1941년 천혜의 요새인 박달동 수리산 깊은 골짜기에 육군성 소속 탄약 저장시설(일명 군용지)을 설치했다. 일제의 패망 이후 탄약저장 시설과 탄약을 인수한 미군..

[20240110]김구선생 안양보육원 시찰(자유신문 1947.08.19)

2024.01.10/ #아카이브 #김구선생 #안양 #옛신문 #기록 #역사 #자유신문 #since1947/ 1947, 08.19일자 자유신문 기사. 안양보육원을 김구선생 시찰 “김구선셍은 지난 16일 정오경 이길호 비서를 대동하고 자동차로 경성보육원 안양분원(현 좋은집)에 도착하야 100여 원아들의 양육 상황을 시잘한후 오후 5시경 귀경하였다.” 한편 백범 김구 선생은 1940년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에 선출돼 사실상 초대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인물로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분으로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귀국한 후 1949년 4월 5일 청명일(한식)에 안양을 다녀갔었다. 김구 선생이 안양을 찾아온 이유는 안양 관양1동 329-1에 안동김씨 대종친회 문영공(휘..

[20240110]포탄 50만톤 안양에서 발견(자유신문 1946.02.18)

2024.01.10/ #아카이브 #옛신문 #기록 #역사 #자유신문 #since1946/포탄 40만톤 안양에서 발견 (1946.02.18일자 자유신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냄. https://www.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제69회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2024년 2월 17일(토) 10:00 정기접수 2023년 1월 16일(화) 10:00 접수마감 2023년 1월 23일(화) 18:00 추가접수 2023년 1월 30일(화) 10:00 접수마감 2023년 2월 2일(금) 18:00 ☎1577-8322( www.history.go.kr 8.15이전 의군(일본)들이 포탄 50만톤을 안양비행장 부근에 감추어 두엇던 것이 이번 양군(미군)에게 발견되였다고 하는데 미군에서는 이를..

[20231229] 시흥군, 제땅 한뼘없다(조선 1984.12.01)

2023.12.29/ #도시기록 #지도 #옛시흥군/ 조선일보 기사 삽화(1984.12.01일자) 시흥군 도시계획 분할 편입 이미지. 군포와 의왕, 수암면 일부가 안양시로 편입되는 계획이 추진됐었다. 당시 계획대로 추진했다면 지금은 어찌 변했을까. 1973년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시흥군은 해체되기 시작해 1989년 군포읍은 군포시로, 의왕읍은 의왕시로 승격되고 소래읍, 군자면, 수암면이 시흥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해당 잔여지역에 시흥시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는 목감동 출신의 어느 향토사학자의 기여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의 1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다보니 원래의 시흥군 중심지인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과 현재의 시흥시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 되어버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