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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군포공립보통학교(現 군포초) 설립자 故 조중완옹

안양똑딱이 2018. 10. 15. 14:42

 

교육부가 2017년 8월 28일 군포공립보통학교(現 군포초등학교) 설립자인 故 조중완(1879~1942)옹에게 국민교육 발전 유공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고인은 경기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 면장, 군포우체국장, 경기도 평의회원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교육 분야에 이바지했으며, 특히 교육 불모지였던 시흥군 남면에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세워 지역 및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이 인정됐다.

고인은 1879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무관학교를 거쳐 조선육군연성학교 교관(참령)을 역임하던 중 일본군에 편입하라는 강권을 거부하고 경기 시흥군 남면(現 군포시)로 이주했다.

당시 초등학교조차 없어 교육 불모지와도 같았던 모습에 개탄하여 50% 이상의 사재를 출연하여 7개 교실, 11개 학급의 군포공립보통학교를 1920년 건립했고, 現 군포역사 옆에 사설 우체국을 설립해 지역주민들에게 정보문화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

또한, 시흥시 남면 진흥회장을 거쳐 1916년 남면 면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소득원이 빈약한 지역사회 현실을 개선하고자 농촌 생활환경 개선사업 및 소득 증대사업을 추진하는 등 지속적인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이외에도 남면 농촌개량연합회를 창립하여 조혼·미신 등의 폐풍을 일소하는 대신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위생 향상을 위해 경진회 등 시상제를 도입해 농민들의 의식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태화]군포의 숨은 역사와 일꾼을 소개합니다

2015.01.06]군포신문/ 군포신문 자문위원장

                                                                            

군포의 숨은 역사와 일꾼을 소개합니다

군포시가 시 승격이 되기 전 전신은 시흥군이었다. 경기도 시흥군이 현재의 안양시, 과천시, 광명시, 안산시, 시흥시, 의왕시 그리고 군포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역사에서 없어져 버렸다.
군포시민으로 생활하고 있던 중 우연히 국가상훈편찬위원회에서 발간된 현대사의 주역들을 접하게 되었다. 동위원회 3034호 국가사회유공인 사편에 조중완(趙重完)옹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중완 선생은 본관(本貫)이 경기도 양주이고 출생지는 서울, 생년월일은 1879년 8월 20일이고 대한제국무관학교졸업 조선육군연성학교 참경(오늘의 군 계급으로 소령에 해당) 군포초등학교를 설립, 군포사설 우체국장, 시흥군 남면장, 시흥군 남면진흥회장을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조중완 옹은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을 잃은 조국의 현실을 개탄하여 자주독립의 실현을 위해 전 생애를 불사른 인사로 특히 농촌의 생활 환경개선 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통해 개화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화합을 이끌었던 이 땅의 참 애국자이자 숨은 선각자라고 기록됨을 알게 되었다.
조중완 옹께서는 조선의 군인으로 부국강병이 곧 조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신념아래 정예 강군육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 1910년 한일합병을 맞아 일본군에 편입하라는 강권을 거부하고 서울 종로구 가희방(지금의 계동)에서 사시다가 군포시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대한민국의 국민의 뜻에 반하는 침략행위를 강행한 일본이 우리의 성(姓)과 이름까지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잔학무도한 일들을 마구 휘두를 때 조옹께서는 일본군 편입에 동의하지 않고 군포로 낙향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포에 배움의 터가 없음을 깨닫고 사재를 출연하여 6개 학급과 교무실을 갖춘 6년제 초등학교를 건립하였다. 또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서신왕래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지역주민을 위하여 사설 우체국을 현 군포역 주변에 설립했다.
한편 시흥군 남면진흥회를 설립해 소득원이 빈약한 현실을 파악하고 농촌 환경 개선사업과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했다. 농기구인 삽, 호미, 쇠스랑, 갈퀴 등을 지원했으며 지속적으로 계몽사업과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남면 농촌개량연합회를 창립해 조흔, 미신, 간식, 치주, 연초 등의 폐품을 일소하고 우리민족의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발전 시켰으며 농민들의 생활과 위생의 향상을 위해 경진대회를 개최하여 시상제를 도입, 농민들의 생활의식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셨다.
평생을 지역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1942.3.12.서거하시니 당시 시흥군 남면장인 양재호(지금의 대야동 거주 양덕부의 아버님)의 제안으로 남면민장(南面民葬)위원회를 구성, 양면장이 장례위원장이 되어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포시의 적은 행정구역의 면적에서 조옹과 같은 지역인사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의 군포시민의 긍지와 군포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그런데 1995년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면서 초대 군포민선시장을 역임한 조원극 전 시장이 조옹의 친손자임을 알게 됐다.
조옹의 개화 운동과 지역에 헌신한 그 군포에서 그 손자가 초대 민선시장이라는 역사가 만들어 졌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