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김승용]어린시절 안양 냉천동에서의 기억(2022.02.22)

안양똑딱이 2023. 2. 4. 13:01

김승용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shinjiazc)에서 발췌
 
가뭄 걱정은 절대 않지만 봄가을에도 홍수 걱정을 해야 하는, 아주 좁고 깊은 계곡 마을 출신이다. 38따라지 중에서도 무척이나 가난한 축들이 안양에서조차 살 집을 못 구해서 흘러들어 이루어진 마을이다. 사람 살기 어려운 곳인데도 꾸역꾸역 산자락을 파내고 물가에 축대를 쌓아가며 집을 짓고 살았다. 그마저도 힘들면 여럿이 돈을 추렴해서 물이 휘돌아 나가는 쪽, 그래서 범람하기 쉬운 곳에 나무기둥을 수십 개 박고 반은 물에 반은 바위에 걸친 반 수상가옥을 다닥다닥 연립으로 지어서 방 하나 부엌 하나에 공동변소와 공동'손펌프' 하나로 살았다.
가난이 싸움 붙인다고,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동네였다. 매일 피 터지는 폭력은 기본이고 고함에 욕설에 드잡이와 술주정이 넘쳐났다. 또한 타인들의 혐오 시선을 피해 들어온 사람도 꽤 됐다. 유전병으로 거의 온 가족이 눈동자가 희게 덮여 된 장님 가족, 4도 화상으로 얼굴 반이 시커먼 사람, 상이군인, 정신질환, 그리고 몸을 숨긴 범죄자까지. 한 해에 두세 사람은 죽었던 것 같다. 원인은 내기도박이나 불륜 등으로 인한 칼부림이거나 동네 형들 반 이상이 껄렁패에 불량배라서 동네 밖 시내에서 조직간 패싸움이나 다소한 시비로 칼을 맞거나 머리가 터져서 소달구지에 실려 들어왔다(길이 뱀처럼 좁고 길어 포니도 겨우겨우 들어오니 소달구지 끌고 나가야 시신을 싣고 왔다).
해가 산에서 뜨고 산에서 지는 동네라서 해 뜨는 시간이 오전 아홉 시쯤이고 한여름에도 다섯 시면 해가 넘어갔다. 밤이 길다 보니 밤새 사건사고가 무척이나 많았다. 또 그만큼 애도 많이 낳았다. 그 많은 애들이 놀 곳이 없었다. 놀이터도 없고 골목조차 대부분 폭이 애들 팔로도 한 발이 안 되고, 애들조차 모로 지나가야 하는 좁은 목도 많았다. 애들은 주로 공회당에서 놀았다. 공회당 한켠에는 늘 모래가 쌓여 있었다. 골목이 좁고 마당 있는 집이 드물어 집을 고치자면 모래나 벽돌 같은 자재를 둘 곳이 공회당뿐이었다. 그래서 애들은 거기서 모래장난을 즐겼다.
공회당 말고는 산이나 상류로 가야 했다. 어려서부터 산을 타고 놀아서 그 마을 출신은 몸이 가볍고 발이 빠르고 산을 잘 탄다. 나도 당연히 그렇다. 생각 외로 날다람쥐다. 먹는 풀, 못 먹는 풀을 감각적으로 알아채고 새 소리를 구분하고 기척만으로도 어떤 동물인지 알아채기도 한다. 워낙 먹을 게 없어서 애들은 고픈 배를 수렵과 채집으로 해결했으니까. 그래서 초등 고학년 정도만 돼도 사냥도구를 직접 만들 줄 알았다. 가끔 유튜브로 작살을 만드네 활을 만드네 하는 걸 보면 웃음만 난다. 야야, 그걸로는 개구리도 못 잡겠다.
동네 애들은 학교 갔다 오면 가방 내던지고 놀러 나가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할당된 집안일을 해치워야 했다. 가축 먹이기, 땔거리 해놓기, 우리 청소하기, 간단한 자기 빨래 해놓기 등등. "안양에 그런 데가 있어??" 하는 그런 데 출신이라 촌놈도 아닌데 연장을 좀 다룬다. 반쯤 산간지대라 풀낫이란 건 대학 가서 농활 때 처음 봤다. 아따, 뭔 낫이 요로코롬 얄쌍허고 가빕다냐... 우리는 조선낫과 작두, 그리고 도끼와 곡괭이를 가장 많이 썼다. 밭조차 돌밭이었으니까.
좁아터진 마을에서 다큐에서나 보는 외국 빈민가같이 살았어도 애들이 좁게 자라진 않았다. 수시로 수리산 꼭대기 올라가서 저 멀리 인천 바다까지 보고 한숨 자고 내려오고 했으니까. 지금 등산객들이 한 시간 잡고 올라가는 데를 우리 애들은 20분이면 올라갔다. 낄낄거리고 장난치면서 줄달음질로. 중간에 지름길인 여우바위 크레바스도 겅중겅중 뛰면서. 그러다 혹시라도 뱀을 발견하면 "잡아!!!" 이 소리부터 나오고 작대기 찾아 두리번두리번. 그만큰 다들 배를 곯았다.
그랬던 동네가 계곡하천이 복개되고 마을버스도 들어가게 되면서 완전히 모습이 달라졌다. 계곡물을 사라졌고 산에는 인조잔디구장이니 등산로니 운동시설이니 빌라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항공지도로 보면 내가 옛날에 살던 집이나 오가던 골목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정희네, 찬우네, 영만네, 용철네, 민석네 집 모두 다 헐리고 공회당도 사라졌다. 내가 살던 지대 높은 집은 깊게 파헤쳐 옹벽 쌓고 어느 아파트 놀이터로 쓰이더니 이번에 사진 보니 또 밀고 다른 아파트 짓는다.
도시의 차가운 남자로 보이지만 사실 촌놈이다. 아궁이에 불 때서 가마솥 물 떠다 목욕하고, 변소에서 똥 누다 보면 변소 지붕에서 뱀이 쥐 잡아먹으려고 혀 날름날름 지나가고, 산사태로 마을 주민 절반인 40여 가구 중 두 사람 살고 다 몰살당했던 그런 사람 못 살 동네 출신. 그래서 좀 겁이 없는 편이고 산에 가면 저절로 먹을 만한 풀인지 뜯어먹어보는 이상한 사람이다. 자꾸 풀 뜯어먹고 잎 뜯어 맛본다고 마님한테 혼나는데도 어쩔 수 없다. #속단 든 버릇 난 버릇.
*사진은 70년대 안양 5동(냉천동). 산 위의 충혼탑에 올라가면 산기슭에 물 끌어다 보관하는 마을 물탱크 있는 양지마을이 보이고, 그 아래로 개울이 안양천으로 흘러가는데 그 개울 중상류에 냉천동이 있었다. 저 정도 집이면 우리 마을에서는 부자 소리 들었다. 아버지가 보증으로 직접 지은 '나가야(長屋)'식 집 날리고 동네 밖으로 쫓겨나듯 이사 나왔을 때 처음엔 소방서 옆에 살았고 이후 냉천동으로 옮겨서 함바집 겸 아가씨술집 겸 비밀도박장을 운영했다. (별 꼴 다 보고 자랐지만 그래도 반듯하게 잘 큰 용작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