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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0]내무서 시흥군 동면 방어위원회 조직(1950.08)

안양똑딱이 2024. 1. 30. 14:07

 

2024.01.30/ #아카이브 #기록 #역사 #한국전쟁 #시흥군/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950년 8월 북한이 시흥군 동면 지역에 조직한 민리방어위원회 기록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한국 관련 문서에서 찾아낸 이문서는 시흥군내무서 동면분주소 소장 서동학이 1950년  8월 20일시흥군내무서장에게 보낸 보고서로 동면내 안양리, 시흥리, 독산리, 가리ㅂ리, 신림리, 봉천리 지역의 방어위원회 조직(직책, 성명, 연령, 가정선분, 본인성분, 정당, 사회단체)이 수록돼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은 1950 9 15,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작전이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된다. 아래 기록을 보면 북한은 당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경기도 방어지역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면리방어위원회인 돌격대를 조직한 것도 그같은 이유다.  
 
시사저널 1789호(2024.01.27) '인천상륙작전 북한은 알고 있었다' 기록을 보면 정확한 날짜는 파악되지 않지만, 1950년 8월17일 이전에 북한은 ‘경기도 방어지역 군사위원회’(방어위원회)를 설치한다. 방어 지역은 서울·인천·수원·이천·가평·개성 등을 중심으로 하여 총 6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군·면·리 단위에도 방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면과 리의 방어위원회는 경비조·감시정찰조·통신연락조·공작조·소방조·수송조·돌격조 등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8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방어위원회 사령관 강용수는 ‘군사방어위원회 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긴급 지시’를 하달했는데, 거기에는 ‘미제는 최근에는 인천 방면으로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는 대목이 보인다. 8월22일에 이미 군 단위 수준의 방어 조직까지도 미군이 상륙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8월28일은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전기를 맞은 날이다. 이와 관련된 ‘극밀(極密)’로 되어 있는 흥미로운 명령이 하나 있다. 인천방어지구사령부(사령관 박훈일) ‘전투명령 №1’이 그것인데 명령 내용은 간단하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김일성)의 명령에 근거하여 1950.8.28로서 인천 방어지구의 지휘는 개시되었다.’ 이것이 전부이다.

인천방어지구사령부를 설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위와 같은 명령 내용으로 볼 때 8월28일부터 인천 방어 작전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해당 문서 보기 https://viewer.nl.go.kr/main.wviewer
 
  

시사저널 1789호(2024.01.27)
인천상륙작전 북한은 알고 있었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06.27 00:00

정확한 날짜는 파악되지 않지만, 1950년 8월17일 이전에 북한은 ‘경기도 방어지역 군사위원회’(방어위원회)를 설치한다. 방어 지역은 서울·인천·수원·이천·가평·개성 등을 중심으로 하여 총 6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군·면·리 단위에도 방어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면과 리의 방어위원회는 경비조·감시정찰조·통신연락조·공작조·소방조·수송조·돌격조 등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8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방어위원회 사령관 강용수는 ‘군사방어위원회 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긴급 지시’를 하달했는데, 거기에는 ‘미제는 최근에는 인천 방면으로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는 대목이 보인다. 8월22일에 이미 군 단위 수준의 방어 조직까지도 미군이 상륙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8월28일은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전기를 맞은 날이다. 이와 관련된 ‘극밀(極密)’로 되어 있는 흥미로운 명령이 하나 있다. 인천방어지구사령부(사령관 박훈일) ‘전투명령 №1’이 그것인데 명령 내용은 간단하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김일성)의 명령에 근거하여 1950.8.28로서 인천 방어지구의 지휘는 개시되었다.’ 이것이 전부이다.

인천방어지구사령부를 설치하라는 김일성의 명령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위와 같은 명령 내용으로 볼 때 8월28일부터 인천 방어 작전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날 하달된 인천방어지구사령부의 ‘전투 명령 №3’은 상륙을 분명하게 예견한 명령 내용을 보여 준다. ‘…인천 지구에 적측으로부터 작전적 상륙대가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인천방어지구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지적된 구역의 반상륙 방어를 조직할 임무가 설정되었다.’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최하급 현지 전투부대(884군부대)에도 8월29일 상륙을 방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미국은) 군사적 모험으로서 인천 항구에 상륙, 점령하고 계속 전진하여 우리의 수도 서울을 점령할 목적으로서 덕적·용유·영흥면 일대에 참선들을 입항 체류하고 있는 바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인천항에 기습 상륙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처럼 북한은 미군의 인천 상륙을 미리 알고 방어 작전을 짜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고, 주력 부대가 낙동강 전선에 배치된 바람에 군사력을 집중할 수 없어 결국 완벽한 대응에 실패했던 것이다. 마치 한국과 미국이 6·25 이전에 이미 북한의 공격을 거의 알고 있었으나 날짜를 몰라 전쟁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