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9797

[20250329]이삿철, 골목에서 발견되는 옛 혼수품 자개장

2025.03.26/ #도시기록 #안양 #골목 #자개장 #이사철 / 안양 원도심인 만안구 동네 골목을 지나다보면 이사철을 맞아 버려진 가구, 액자 등 각종 페기물들을 보게된다. 오늘은 안양6동 골목에서 자개장을 만났다. 자개장은 오래전 시집갈때 혼수로 가져가던 귀한 가구였다. 버려진 자개장 그림이 아주 정밀한 고급제품은 아니지만 장롱 문짝에 그림들이 곱다. 전통사회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사회 전반이 급격하게 변화하였고 혼례의 절차와 형식을 비롯해 혼수 품목의 구성 역시 빠르게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동안 혼수품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은 단연 자개장이었고, 당시 결혼을 앞둔 여성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가 소유했던 자개장은 남다른 매력으로 그 시..

[20250328]안양천변에 핀 보라유채꽃 2025년 처음 보다

2025.03.28/ #도시기록 #소래풀 #안양천/ 안양천변에 보라빛 소래풀(버라유채꽃)이 새색시 모양 어여쁜 모습을 드러냈다. 작년에는 보가 어려웠는데 금년에는 많은 개체가 하천변 곳곳에서 군락지 형태로 나타날듯 싶다. 소래풀은 중국이 원산지로 국내에서는 소래포구에서 처음 발견되어 소래풀이라고 부른다는데,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이 꽃은 양귀비목 십자화과로 제갈채(諸葛菜), 보라유채, 제비냉이 등 달리 부르는 이명(異名)도 많다. 자료를 찾아보니 소래풀을 중국 사천성 일대에서는 제갈채라 부르는데 이는 제갈량이 전쟁터에 주둔할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이 주변의 빈 땅에 이 소래풀을 심게 했다는 데 전장에서 군량미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소래풀은 7가지 장점이 있는데 1. 식량대용이 가능하고 2. 날 것..

[20250327]1960~70년대 안양유원지에 있던 보트장

2025.03.27./ #아카이브 #옛사진 #기록 #안양 #안양유원지 #1970년대/ 사진속 풍경은 1970년대 안양유원지에 있던 보트장으로 셀수스햡종조합에서 기증한 공유 기록물이다.(출처: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98661&menuNo=200018 ) 사진속 장소는  현재의 안양 파빌리온 앞 계곡으로 사진 가운데 뒤로 보이는 흰색 건물이 안양관광호텔( 현 블루몬테)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호수같이 물 많고 아름답던 곳은 1977년 안양대홍수 당시 산위에서 집채만한 바위들이 쏟아지는 등 처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1960-70년대 운영되어 온 안양유원지 보트장은 한여름 피서철뿐 아니라 여름이 끝나고 물놀이를 못하게 되..

[20250327]안양 향토문화 <만안답교놀이> 실태조사

답교놀이는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밟고 노는 세시풍속의 하나입니다. 1987년 실태조사를 통해 안양에서는 호계지역과 만안교지역에서 답교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식민착취에 따라 경제적 여유가 점차 없어지면서 1920~30년경에 사라졌다고 한다. 안양만안답교놀이는 실태조사와 원로들의 고증을 통해 호계지역의 답교놀이와 만안교지역의 답교놀이를 실존하는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유산)를 중심으로 복원한 것으로 놀이는 길놀이, 다리밟기놀이, 무동춤놀이, 선소리꾼놀이, 대동놀이로 구성되어 있다. 1988년 첫 재현이 이루어졌으며, 1989년 제6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첫 출전하여 공로상을 받았다. 현재 안양만안답교놀이보존회에서 전승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대보름 시기에 시민과 함께하는 대동놀이로 재현되..

[20250326]110년전 의왕 하우현 성당과 청계 교우촌 사람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사장 김정희, 이하 ‘국외재단’)은 2024년 8월 12일 오후 2시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 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중에는 의왕 하우현 성당과 청계리 사람들의 삶을 담은 100년전 모습이 많이 담겨있어 이를 소개한다.  하우현성당은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청계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선포됐던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지켜오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성 볼리외 신부와 복자 한덕운(토마스)·하느님의 종 서태순(아우구스티노)·이조이(요셉)·순교자 김준원(아니체도)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신..

[20250326]사근참행궁(肆覲站行宮)과 화성(華城) 축성 고찰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272-2번지 구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는 의왕시청 별관이 있는데, 입구에는 눈에 띄는 표석이 하나 있다. 표석의 전면에는 사근행궁 터가 새겨져 있어 이곳이 과거 사근행궁(肆覲行宮)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거동할 때 머무는 임시 궁궐로, 그 목적은 화성행궁(華城行宮)처럼 능행을 목적으로 하거나 온양행궁(溫陽行宮)의 사례처럼 온행,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처럼 전쟁 시 피난 등의 다양한 목적이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새로운 성을 쌓아 도시를 형성하고, 수원에 이르는 경유지마다 행궁을 설치하였다. 모두 6개소의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 고천동주민센터 자리에 있던 사근행궁(肆覲行宮)이다.  사근행궁은 ..

[20250326]화성 송산포도 '안양포도' 묘목으로 시작됐다

[에코타임즈]'화성 송산포도' 명품 브랜드 탄생의 곡절Eco-Times | 기사입력 2024/09/06 [17:48]https://www.eenews.kr/3423  ≪생태환경뉴스≫ '화성 송산포도' 명품 브랜드 탄생의 곡절  포도의 계절이다. 화성시에서는 서신, 송산, 마도, 남양 비봉 등 주로 화성서부지역인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생산되는 화성송산포도가 전국적인 명성www.eenews.kr '화성 송산포도' 명품 브랜드 탄생의 곡절1977년 안양포도원 묘목으로 시작됐다 포도의 계절이다. 화성시에서는 서신, 송산, 마도, 남양 비봉 등 주로 화성서부지역인 남양반도를 중심으로 생산되는 화성송산포도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화성포도의 명품 비결은 바닷바람을 첫째로 친다. 서해안을 끼고 있는 화성서부지역은..

[20250324]文鄕, 故 김대규 시인 타계 7주기 묘소 참배

2025.03.24./ #추모 #묘소참배 #김대규시인/ 文鄕(문향) 故 김대규 시인 타계 7주기 추모 묘소 참배길에 다녀오다. 김대규 시인은 1942년 4월 20일 안양시 양지동 946번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2018년 3월 24일 77세의 일기로 타계한후 시흥시 논곡동 김념 김씨( 金寧 金氏 ) 문중 납골묘역에 잠들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객차를 타고 오렴."-김대규 시인의 엽서-이 시를 읽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시인이 말하는 '나의 고향'은 안양이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는 영혼의 고향이기도 할 것이다. 김대규 시인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태어나 고향인 안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다양한 문학 작품 활동을 왜 온 한국..

[20250325]잊혀진 독립운동가, 의왕 하우현성당 윤예원 신부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병항쟁을 비롯해 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인사들 가운데도 의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신도를 비롯해 사제와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미 친일로 돌아선 교회지도부의 거부로 종교적-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없었지만, 천주교인 역시 겨레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당시 천주교회의 주교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다.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

[박철하]의왕 출신 한글학자 이희승 선생 생애와 마을

이희승(李熙昇, 1896~1989). 호는 일석(一石)이다.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 출생이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대를 이은 2세대의 대표적인 한글학자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는 한문을 배웠으나 청년기에는 서울에서 열정적으로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회사를 다니며 스스로 돈을 벌면서 학업을 이어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일제강점기 이희승의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연구는 조선어학회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제정, 사전 편찬 사업 전개 등 한글 정리와 통일 및 보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일제 강점 말기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학교 교육과 관공서에서 우리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