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50326]110년전 의왕 하우현 성당과 청계 교우촌 사람들

안양똑딱이 2025. 3. 26. 15:41

‘하우현성당 원경’, 유리건판, 1910-1945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사장 김정희, 이하 국외재단’)2024812일 오후 2시 성 베네딕도회 서울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 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중에는 의왕 하우현 성당과 청계리 사람들의 삶을 담은 100년전 모습이 많이 담겨있어 이를 소개한다.

 

하우현성당은 서울과 경기도를 잇는 청계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이 선포됐던 이곳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교우들이 숨어 살며 신앙생활을 지켜오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성 볼리외 신부와 복자 한덕운(토마스하느님의 종 서태순(아우구스티노이조이(요셉순교자 김준원(아니체도) 등이 이곳에서 생활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893년 하우현 교우촌에 공소가 설립됐고, 이듬해인 1894년 제2대 주임 조제프 알릭 신부와 교우들이 1500냥을 모금해 10칸 규모의 목조식 초가 공소를 지었다. 이후 1900년에 왕림과 미리내본당에 이어 하우현 공소가 오늘날 수원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승격됐다. 1906년 성당 뒤편에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사제관이 지어졌다. 한옥의 기본 틀인 목조 건물로 지었지만, 벽체를 화강석으로 치장했다. 또 팔작지붕 형식을 갖췄지만, 지붕 처마 선의 곡선은 없다. 그리고 사제관 중앙 거실 좌우로 온돌을 깔아 방과 식당을 배치했다. 이처럼 독특한 건축양식이 인정돼 2001년에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 등록됐다.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1911324일부터 28일까지 하우현성당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주임 르 각(Le gac) 신부와 교우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르 각 신부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인연이 깊다.

 

베버 총아빠스는 아직 박해시대 교우촌 삶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하우현본당 신자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10장이 넘는 사진을 남겼다.

 

베버 총아빠스는 마을 입구에서 성당과 사제관을 배경으로 교우촌 전경을 촬영했다.<사진 1> 산자락에 있는 초가가 성당이고 그 오른편 석조 초가가 사제관이다. 이를 중심으로 반경 5시간 거리의 여러 마을에 교우 2500여 명이 살았다. 성당은 초가지붕에 막돌과 진흙으로 궁색하게 벽을 쌓은 나지막한 토담집이었다. 문턱도 낮아 몸을 굽혀야만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당 옆으로 막 완공된 사제관이 서 있다. 르 각 신부가 소박한 이 사제관에서 생활하기 훨씬 이전 그의 대선배인 파리외방전교회 볼리외 신부가 이곳 둔토리 동굴에 숨어 살며 조선말과 글을 배우고, 교우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르 각 신부는 볼리외 신부와 영적으로 닮은 사제였다. 베버 총아빠스는 르 각 신부를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했다.<사진 2> 그는 사제관을 신자들에게 늘 개방했다. 바스크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과 버선과 짚신을 신고 있는 천진난만하고 친근한 태도에서 드러나듯 르 각 신부는 착한 영적 목자였다.

 

[가톨릭평화신문]박해시대 교우촌 삶 그대로 간직한 하우현 신자들 모습에 감명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7. 하우현성당 <>

리길재 선임 기자입력 2025.02.12.09:37수정 2025.02.12.09:48

https://news.cpbc.co.kr/article/1161903

 

[가록릭평화신문]하우현성당 교우들, 순교자들의 후손이며 박해의 산증인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18. 하우현성당 <>

리길재 선임 기자입력 2025.02.19.10:32수정 2025.02.19.10:32

https://news.cpbc.co.kr/article/1162050

‘하우현성당과 신자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과 신자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과 신자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을 방문한 베버 총아빠스 일행과 성당 신자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교리교사 가족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아이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과 신자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사제관 ’,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사제관 ’,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사제관 앞에 서 있는 르 각 신부’,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사제관 앞에서 동물을 들고 있는 남성’, 유리건판, 1911년 3월,
‘미사보를 쓴 여성’, 유리건판, 1911년 3월,
‘처네 쓴 할머니’, 유리건판, 1911년 3월,
‘전교회장(傳敎會長)과 남학생’, 유리건판, 1911년 3월,
‘베버 총아빠스와 신자’, 유리건판, 1911년 3월,
‘플라치도 포겔 신부와 하우현성당 신자’,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사제관 앞의 남성들’, 유리건판, 1911년 3월,
‘방갓 쓴 남성’, 유리건판, 1911년 3월,
‘하우현성당 아이들’, 오토크롬, 1911년 3월,
‘굴레를 쓴 아기와 소녀’, 오토크롬, 1911년 3월,
‘남바위를 쓴 여성들과 여학생들’, 오토크롬, 1911년 3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웹사이트]

https://overseaschf.or.kr/okchf/index.do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새이름 국외소재문화유산 공식 누리집 입니다.

www.overseaschf.or.kr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 조사 공개]

 

국외재단은 2021년과 2022년에 걸쳐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이하 연구소’)와 함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에 대한 실태조사 및 1874점의 사진을 고화질 파일로 담아왔으며 사진 이미지 고도화 작업과 조사자료 분석을 실시했으며, 2024년 조사 성과를 담은 도록 형태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사진은 1909년 이래 한국에 파견되었던 성 베네딕도회 소속 선교사들이 촬영한 것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이 기록한 한국의 근대 시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특히 1911년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베네딕도회 대수도원 수장)가 당시 최신 기술인 오토크롬(Autochrom)’을 사용하여 천연색 사진을 남긴 점은 한국 사진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토크롬은 1903년 특허를 받아 1907년 상용화된 유리판을 지지체로 사용하는 천연색 투명 사진으로, 컬러 필름이 출시된 1932년 이전까지 주로 활용된 초기의 천연 사진 기술이다.

 

특히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베네딕도회 대수도원의 수장)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소멸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를 글과 그림·사진과 영상으로 담아 유럽에 소개했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 박물관에 비치된 베버 총아빠스 사진. 창틀 앞에 놓인 그의 사진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선교 문화적 시선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그는 처음 방문하였을 때 보고 겪은 것을 기록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년 초판, 192woks)라는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두 번째 방문 때에는 글과 사진뿐 아니라 세 편의 무성영화까지 제작하였다.

 

한자어 사진(寫眞)’을 우리말 그대로 옮기면 진실된 것을 베끼다라는 뜻이다. 곧 인물이나 사물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풀이다. 영어로는 ‘Photography’라고 한다. 이는 헬라어 φωτοs(포토스, )’ζραφη(그라페, 그림)’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빛으로 그린 그림또는 빛으로 그림 그리기로 풀이된다.

 

하지만 사진은 낱말 뜻처럼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필름이나 파일에 담는 것은 아니다. 사진가의 시선으로 본 피사체만이 그 프레임 안에 담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은 결코 피사체를 객관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의 주관적인 감정이입이 된 피사체만을 담는다고 하겠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선교사들이 그들의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사진들의 시선은 단순하다. ‘복음 선포선교지 문화에 대한 개방성이다. 이들이 조선 땅 구석구석을 돌며 우리 민족의 생활 풍속을 사진으로 담은 까닭은 복음을 전하는 이와 복음을 수용하는 이가 서로 많은 영향을 받기에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진들은 조선으로 파견되는 선교사들의 훌륭한 교육자료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으로 오기 전부터 사진과 영상을 통해 우리 문화를 누리고, 우리 심성에 맞게 하느님을 선포하기 위해 불교와 민간 무속신앙을 이해하고,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심성을 배양했다.

 

이는 선교 베네딕도회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특별한 정신이기도 하다. 선교 베네딕도회가 이러한 전통을 쌓아가게 하는 토대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이가 바로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총아빠스다. 그는 선교지 토착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깊이 이해하려는 지적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선입견 없는 관용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된 관심이었다.

 

베버는 여러모로 운이 따른 덕에 소멸할 운명에 처한 문화사적 보물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히 포착할 수 있었으며 이것들의 가치는 뜻있는 독자들과 다음 세대가 판단해 줄 것이라고 한 바 있는데, 이번 조사 성과의 공개로 그가 어렵게 촬영해 남기고자 했던 당시 한국의 생생한 모습들을 지금의 독자들이 보고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개된 사진에서는 선교사들이 운영한 학교 교육 모습, 근대 성당 건축의 초창기 모습은 물론, 성곽과 사찰 등 변하거나 사라져간 우리 문화유산의 원래 모습, 한복을 입고 있는 당시 한국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조사 성과가 의미 있는 것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를 발굴함은 물론, 천연색 사진을 통해 원래의 색을 알 수 있으며, 같은 주제의 사진을 네거티브 유리건판, 랜턴 슬라이드, 오토크롬, 필름 등 여러 매체로 제작한 예들을 확인하여, 비교를 통해 그 차이를 알 수 있었으며, 기존에 소개되었던 일부 사진 또한 그 원판을 직접 촬영하여 이미지 고도화 작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함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외재단은 연구소와 함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사진 중 한국 관련 자료로 분류된 유리건판, 랜턴 슬라이드 및 셀룰로이드 필름 등 총 2,077점을 전수조사한 후, 한국과 관련 없는 사진을 제외하고 1,874점을 선별하여 보고서에 수록하였고, 그 중 118점은 주제별로 분류하여 도판과 해설을 넣어 상세하게 소개했다.

 

공개한 사진은 기존에 소개되었던 일부 사진 또한 그 원판을 직접 촬영하여 이미지 고도화 작업을 통해 원래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함으로써 보다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국외재단은 왜관수도원(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의 협조를 통해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조사한 한국사진들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웹사이트의 대국민서비스페이지(www.overseaschf.or.kr/archive)를 통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한편 독일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하 오틸리엔수도원)1909년부터 한국에 수도자들을 파견하여 1909년 동소문 일대에 백동수도원을 설립하였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한국의 언어, 문화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고 여러 수도자들이 남긴 많은 민속품과 저작, 사진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국외재단은 그동안 상트 오틸리엔수도원과 동 수도원 선교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유산의 조사 및 보고서 발간은 물론 조선시대 갑옷, 혼례용 단령 등의 국내 기증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온 바 있으며, 이번 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자료의 조사 성과 공개를 통해 관련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에게 20세기 초 한국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https://youtu.be/t_1hbIljQyk?si=62hyMrKe1L5htXh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