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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박흥식’ 조사보고서

안양똑딱이 2017. 3. 2. 11:48

조사보고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tem/level....

본적 평안남도 룡강군 룡강면 옥도리 387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77번지 피의자 박흥식단기 4235년[1902] 8월 6일생당년 48세직업 상업
우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제7항 급 제10, 11항에 해당한 반민행위의 죄적이 현저함으로 법령 제176호 제3조 7항에 의하여 구속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4조에 의거하여 좌와 여히 조사서를 작성 보고함.
단기 4282년[1949] 1월 일조사관 이덕근[리덕근]조사관 김용희[금용희]서기관 박희상[박희상]
일. 피의자의 출생과 경력피의자 박흥식은 단기 4235년[1902]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387번지에서 그다지 궁색치 않은 소농의 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본시 단 두 형제로 자라나다가 장남이 요절하니 그제서는 부모가 독자를 도시에 보내기 싫어하여 피의자 박흥식은 고향에서 소학을 마쳤을 뿐 이렇다 할 학력을 갖지 못하였다.피의자 박흥식이 리향을 뜻한 것은 17세 시이니 소농 몰락과정에 처한 가정 형편을 돌볼 때 상업으로 기가하려는 야심이 들기 시작하였던 탓이다.피의자 박흥식은 근향 진남포로 나와 진남포상공학교에 수학하였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였던지 학업을 폐하고, 오로지 상업에 종사 서기 1919년 2월부터 독력으로 진남포 비석리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그후 명함포를 경영하다가 소 규모의 인쇄소도 해보았으나 그도 역 여의치 못하게 되니, 그때 고향 룡강에 있는 몇 마지기 농토를 방매하고 소영하던 명함점포도 정리한 후 서기 1923년 선광당인쇄소를 경영, 서기 1924년에 이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다.서기 1925년 상경하여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이 되면서 당시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전중무웅[전중무웅](일인)과 친교를 맺음으로 해서 일본 각 제지회사와 특약하고 비률빈 「마니라」에서 「권취지」를 직수입하는 특권을 획득하게 되었다.그리하여 당시 국내에서 발간하는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와 전속 구매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1개월이 못되어 세계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제 물가 폭락은 지물에도 영향되어 폭락되었으나 전기 3신문사는 계약 관계상 어쩔 수 없이 계약 당시 지가에 의하여 구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그럼으로써 박흥식의 선일지물주식회사만이 세계 경제공황도 모르는 채 홀로 순조로운 영업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러는 한편 종로 네거리에 금은미술겸오복잡화점을 신태화[신태화]와 공동 경영하던 것도 매수하여 서기 1931년 9월에 주식회사로 만들어 박흥식이 사장이 되었다.지성에 흠함이 있는 박흥식은 아알과 증회에 능한 재능이 있었으니 한국 침략 착취의 총본거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에서 70만원의 신용 대부를 얻게 된 것도 까닭없는 일이 아니었다.이리하여 피의자 박흥식은 한국 유일의 실업가로 등장하게 되었다.서기 1935년 9월에는 토지 건물의 경영 급 차종 금융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공칭 200만 원의 대동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 구구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한국 침략의 아성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유일한 착취기관인 일본국책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주로 감사가 된 것은 기특한 일이다.이럴 즈음 백화점 화신은 경영방법의 졸렬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이 때는 다시 일본자본주의 침략자들과 결탁하여 합리적 소비경제와 생활양식의 일신 생면을 타개한다는 표목을 내걸고 한국 각처 지방에 토착 자본주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연쇄점을 준다 하여 토지를 저당케 하여 그 거액의 저당금 대출을 이용하여서 백화점 화신의 활로를 열어 줄 수 있는 화신련쇄점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그 사장이 되었다.피의자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주식회사와 백화점 화신의 량도를 잘 조종하면서 일본 대판에 영업소를 설치하고 일본 상품의 수입을 힘껏 했으니 이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일본의 상품시장화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동년 4월에는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이 되었다.서기 1941년에는 화신무역주식회사화신연쇄점주식회사 급 선일지물주식회사의 3사를 합병하여 화신상사주식회사로 하고 동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월 주식회사 화신과 대동흥업주식회사를 합병하여 주식회사 화신으로 만들어 역시 사장에 취임하였다.그간 해방까지 피의자 박흥식의 각종 회사의 중역 급 제종 공직은 다음과 같다.전기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하여 화신상사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주식회사 화신 취체역 사장 경성방적주식회사 취체역 북선제지화학주식회사 취체역 조선석유주식회사 취체역 제주도흥업주식회사 취체역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취체역 조선권업주식회사 취체역 조선공업주식회사 취체역 대흥무역주식회사 취체역 남만방적주식회사 취체역 동광생사주식회사 취체역 조선양지배급주식회사 취체역 경인기업주식회사 취체역 주식회사매일신보사 감사역공직관계조선총독부물가위원회 위원 조선중앙임금위원회 위원 조선총독부보호관찰소 촉탁 보호사 국민총력조선련맹 이사 련성부 연성위원 국민총력경기도련맹 참여 국민총력경성부련맹 이사 대화동맹 심의원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경성사법보호위원회 참여 조선무역협회 이사 조선공업협회 상락리사 제국발명협회 조선본부 이사 재단법인사립신광상업학교 이사장 조선수출공업협회 이사 조선실업구악부 부회장 재단법인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 식량협회 조선본부 평의원 피복협회 조선지부 이사 동아경제간담회 조선위원회 위원이 중 식량협회와 피복협회는 조선군 관계 그리고 피의자 박흥식이 일제에 가장 충실하여 그 공적에 따라 공로상을 받은 것 중에 가장 주요한 것을 보면 여좌하다.서기 1940년 10월 제국교육협회장으로부터 일본교육사업 진흥에 공헌했다 하여 공로상을 받은 것을 위시하여 서기 1940년 9월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공사업 발전에 공헌한 공적에 의하여 공로상을 수함.서기 1940년 10월 조선 총독으로부터 조선개발 진전에 진췌하여 총독 시정상 기여한 공적으로 총독 시정 30년 기념에 당하여 공로상 수여.서기 1942년 12월 15일 일본 총리대신(일본 최고 전범자 동조영기[동조영기])의 초청을 받아 전일본산업경제대표자전력증강간담회에 참석하여 피의자 박흥식의 말을 빌건대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 배알의 광영에 흡하였다.이어서 서기 1943년 6월에는 해군협회로부터 공로장을 받음으로써부터 더 한결 지성으로 일제에 봉공하여 일본제국 신민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와 관록을 갖추게 되었다.이. 피의자의 가정상황피의자 박흥식은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77번지에 광대한 주택에서 처 한인하[한인하](33세), 그의 모 김선[금선](84세), 장녀 봉숙[봉숙](8세)과 동거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밑에 식모 2명, 용인 3명, 수위 2명, 화부 1명 그리고 처의 모와 처제가 기거하고 있다.피의자 박흥식은 일찍이 초취에서 1녀를 출생(박병숙[박병숙] 서 장병찬[장병찬])하였으나 이혼하고, 두 번째 계 성의 녀와 결혼 1남 2녀(장자 병석[병석], 장녀 영숙[영숙], 차녀 경숙[경숙])를 출산한 후 이혼, 현재 처는 제3번이다.피의자 박흥식은 이와 같이 단조롭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도 혹은 홍군의 치마폭에 싸이기도 하고, 혹은 령양을 꾀이기도 하여 항간에 염문의 화제를 자지케 하였다.삼. 죄적(범죄보고서)(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한 사실피의자 박흥식은 소위 대동아전쟁이 결전 단계에 이르렀을 소화 19년 2월(서기 1944년) 일본의 항공 전력을 확대하므로 일본 필승의 신념 밑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코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기획의 취의를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내각총리대신에게 피력 즉시 흔낙을 얻어 회사 창설의 지령에 접하였다.이래 피의자는 수차에 □하여 일본 동경에 가서 일본정부 당국과 절충한 결과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 내락을 받았으므로 소화 19년(서기 1944년) 7월 박흥식이 발기인이 되어 설립 취의서를 내걸고 주식을 공모하였다.그래서 소화 19년(서기 1944년) 10월 4일 박흥식이 대표 취체역이 되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 등기를 마치고 동년 10월 30일 조선총독 아부신행[아부신행]에서 항공기 제조사업 허가를 받았으며 동년 12월 8일 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 동년 12월 19일에 생산 책임자로 취임하면서 대표 취체역의 자격 상실 등기를 료하였다.(증 1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은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 취의서에서 이르기를 『조선은 총독 시정 이래 삼십유오년 반도 2,500만 민중은 한 가지 황은에 욕하여 이미 물심양면으로 전력에 응분 공헌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강내에 항공기 생산기관으로 보잘 것이 없음은 유감이다. 이에 우리들은 하루라도 속히 우리들의 땀과 피로써 된 비행기로 전장에 보내기가 주야 염원이던 바 더욱이 금년은 징병 실시의 기념할 해(년)이고 보니 지원병 학병에 연이어 충용한 반도 장정은 전원이 들어 황군정강에 새로운 위력을 더할 때라. 이 때 적 격멸의 제일 무기인 정예한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제작하여 결전장으로 보내어 우리 황군이 이를 구사함으로써 동아의 숙적을 격멸하는 날 그 감격을 어디에다 비할 것인가』 하였다.(증 제2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은 이 회사에 자기 명의로 2만주 주식회사 화신 명의로 14만주를 들였으며 이에 찬동한 주주들은 백낙승[백악승], 박춘금[박춘금], 김연수[금년수] 등을 위시하여 일본국제공항, 만주비행기, 조선식산은행 등이었다.(증 제3 급 11 참조)피의자 박흥식은 조선의 풍부한 전력과 현란한 광산자원은 항공기 공업에 최상의 입지적 조건을 구비한 것을 알았으며, 작작한 인적 자원은 일본 전력에 큰 힘이 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그의 말 맞다나 불손한 적이 제국 본토에 대하여 공습의 도가 점점 증대하는 정세에서 국토 방위의 확고를 기하기 위하여서는 동포들의 순국 정신을 체한 반도의 넋을 담을 비행기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못배기었다.한편 이 비행기 제조사업이 군수공업 중에 초 중점적 사업인 것을 깨달았을 때 일본정부 당국에 숨김없는 충의를 보임으로 해서 심후한 관심과 막대한 후원을 얻어 자재 급 기술 획득에 십분 성산을 가지고 난관을 돌파할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증 제2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조선군과 총독부 지도 하에 제작하려던 항공기는 「キ칠구병」종의 비행기니 당시 조업 중의 조선 유수의 인견직물공장으로 여공 약 1,000명을 옹하는 조선직물주식회사와 동양방적주식회사 안양공장을 개수 전용하여 제1사업 연도 중에 항공기 제조에 필요한 건설과 부분품 가공을 실시하고, 제2사업기에 만주비행기주식회사의 협력을 얻어 전기 「キ칠구병」종 기의 작업을 일관적으로 실시하여 월산 60기 이상, 제3사업 년도부터 월산 120기 이상의 생산을 계획하였다.(증 제4호 허가신청서 참조)이와 같이 거대한 사업 기획 하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착착 운영을 진척하였으니 조선군과 총독부의 절대 지지 하의 조선 내의 소위 유휴자재라는 자재는 모조리 공출 전용하면서도 자금 5천만 원 불입 2,500만원으로는 부족하여 사업 예산은 무려 1억8백만원에 달하였으니 불입 자본금에서 부족액 8,300만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전시금융금고로부터 융자의 내락을 얻게 되었음은 그의 순국 지성이 조선총독부에 감하였다고 할까. 그는 곧 조선총독부에 임시자금조정법에 의하여 인가 신청을 제출하였다. 그래서 이 전금 차입금을 받기까지 일시 계자금으로 조선식산은행에서 2,000만원을 차용하였다.(증 제5호 참조) ((소화 19년(서기 1944년) 6월 10일 현재 자산 부채상황(증 제12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 기획하기까지는 여좌하였거니와 그의 운영 방침은 어떠하였던가.그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내걸고 솔선수범 진두지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일. 급속 생산에 돌진할 것.이. 생산 책임자 이하 간부는 솔선수범 진두지휘에 철할 것.삼. 입혼의 비행기를 제작함에 정신 지도의 철저를 기할 것.사. 대륙항공기 공업의 자급태세 확립을 촉할 것.오. 조선 기술 로무 등 인적 자원 활용을 꾀할 것 등등이다.피의자 박흥식은 전기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 8일 군수회사법에 의하여 생산책임자로 선임되면서 일본군수성에 의뢰하여 일인 암기안미[암기안미]라는 일본 군인의 기사를 데려다 앉혀 놓고 점차 인원 충실을 해나가는데 소화 20년(서기 1944년[편집자주 -1945의 오기]) 6월 현재로 직원 650명 공원 약 1,700명 해방 직전에는 2,800명에 달하였다.(증 제5호 현황보고서 급 피의자신문조서 참조)그리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종업원은 소화 20년(서기 1945년) 2월 22일과 6월 8일 2회에 걸쳐 징용령서의 교부를 얻고,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에 생산 내시를 받아 소화 20년(서기 1945년) 3월 상반기의 생산 명령을 받고, 소화 20년[1945](서기 1945년) 1월 일본항공본부 주최 하에 만주비행기회사에서 전환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기술과 자재 등 각종 면에 만주비행기회사의 원조를 얻어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 이강 약 600명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직원과 공원을 파견하여 초호기 제작에 노력하여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 이를 완성하였다.한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은 소화 19년(서기 1944년) 5월 시운전, 동년 6월부터 일부 작업을 개시하였다.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이 일부 작업을 개시하기까지에는 조선군사령부와 총독부의 힘을 빌어 전기 조선직물회사 급 동양방적회사 안양공장을 접수한 것은 물론 건설에 있어서 공장과 비행장의 설계를 끝내고 정비조립공장 공사에 착수 일면 지하공장의 계획을 진척 중이었으니 이 지하공장은 공장과 창고 2천여 평을 부근 산형을 이용하여 실시코자 한 것이며,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 초순에 공사에 착수하여 11월경에 완료할 예정이었던 것이다.이 지하공장이 완성될 때는 중요 기계를 소산하여 여하한 공폭에도 2분지 1의 작업을 실시할 수 있다 하였으니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끝끝내 투지는 오늘날 한번 비웃어 버리기에는 지나친 비장한 바가 있다 하겠다.피의자 박흥식이 말하는 숙적 미영을 격멸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속히 비행기를 제작하려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기계와 물자 조변을 하기에 얼마나 날뛰었던가.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생산 책임자 박흥식은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 막료를 거느리고 몸소 상해에 출장(증 제5호 p34참조) 당시 무적부대를 장언하던 상해등부대를 위시하여 관동군과 절충한 끝에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까지에 기계 531대를 확보, 그 중 400여 대를 수입 각 공장에 거부 완료하였으니 이만한 기계를 구입하는데 국내 국민의 직접 혹은 간접 희생이 얼마나 했을까 보라.상해 구입 기계 공구 대가 2십 수억 불은 「바-타」에 의하여 결제되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까지에 벌써 14억 불에 상당한 인삼, 해산물, 직물 기타 잡품 등이 상해로 송부 완료된 것이다. 그리고 잔액 약 10억 불도 조선총독부 원조 하에 이미 확보 노력 중에 있었다.(증 제5호 p41 참조)이 뿐이랴. 비행기 제작에는 피의자 박흥식이 생각하던 것과 같이 혼과 넋과 순국의 정신만으로는 되지 않아서 많은 기계와 물자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물자를 구하는데 국내의 다른 산업이나 개인 산업을 돌볼 여지조차 없는 것이었다.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군사령부 병기부에 읍소하였다. 그래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사원이면 전용자재를 취득하기 위하여 조선군사령부 병기부를 대행하는 증명서 교부를 받았다.(증 제6호 참조)조선군 병기부를 대행할 수 있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책임 경영자 박흥식의 명을 받는대로 전선 각지를 물샐 틈 없이 쫓아다니며 전동기 고압기 등을 조사 물색하여 심지어 정미소 두부집 아이스케잌집까지를 징발하였으니 조선군 병기부 대행기관의 서슬 앞에 울며 바친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증 제7호 참조)참고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소요한 기계 수량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취득한 수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증 제5호 참조)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 현재 기계 소요 수량 1,083대 취득 수량 700대.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일면 황군 장병의 피를 토하는 듯 절규하는 비행기를 제작하는 데는 국내에 여하한 산업도 경제도 안중에 없었으니 강, 목재, 초자, 인물, 시멘트 무엇이고 닥치는 대로 모아들였다.일본항공본부로부터 할당 배급받은 600둔의 보통 강은 그의 불붙은 생산의욕 앞에 태부족을 고하니 이제는 조선 만주에서 물색할 수밖에 없다 하여 만주에서 유휴 건물이라고 해체한 것 100둔의 폐강을 취득한 외 충청남도금마광산 채금선까지를 매수 해체하여 보충하였다. 목재가 쓰일 때는 서울시의 소개 건물을 불하받아 목재, 기와(와), 석재, 건구, 첩까지 휩쓸어 갔다.(증 제5호 p46 참조)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책임 경영자로 비행기 제작, 기계 자재 등 조변에 흡흡한 끝에 획득한 기계와 자료는 전기 상해로부터 수입한 400여 대 일본항공본부로부터 강재 600둔 외에 규소 강판 37둔 강 27둔의 배급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목재, 시멘트, 못 등을 할당받고, 전기 만주비행기회사로부터 생산자재 50기분(부분품 10기분 재료 40기분)의 양도를 받았던 것이다.(증 제5호 참조)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이만한 기계와 자재를 갖추어 놓은 한편에 공원들 작업과 훈련은 어떠하였나. 급속 생산을 위하여 회사가 설립되기도 기다리기 어려웠던지 소화 19년(서기 1944년) 8월에 벌써 제1회 지도 공원을 모집하였으니 지원자 수 이천명에서 179명을 제1회로 채용하였다. 이 때의 형편을 보건대 지원자는 당시 일본 북해도, 남양 등지에 징용이 우심한 때라, 그래도 국내에 있기를 희망하고 다수 지원하였던 것이다. 6대 1의 경쟁률에서 낙오된 자가 많은 것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공원을 선발함에 일본정신에 투철하고 멸사봉공 진충보국의 황국신민만을 엄선한 탓임에 틀림없다.그리하기를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에 일반공 1,118명, 소화 20년(서기 1945년) 1월에 일반공 300명, 소화 20년(서기 1945년) 2월에 지도공 120명을 모집하여 4회에 걸쳐 1,717명을 모집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3월에는 공원 5,000명 계획이 서있었다.(증 제5호 참조)이들은 물론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칙령 제316조로 국가총동원법 제4조에 의하여 징용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다.이렇게 징용된 소위 공원들은 입혼의 비행기를 제출하는데 정신 지도에 철저를 기한다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사시에 따라 광주 육군연습장 창사에 수용하고 조선군의 지도 밑에 기본 훈련을 1개월씩 받게 했다.그 후는 다시 일본 명고옥과 만주로 보내어 실습케 하였으니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부터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까지 1,734명이 실습했다. 일본 명고옥 삼릉공장과 평양항공창인천조병창에서 실습한 공원들은 1개월 내지 4개월 만에 돌아와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에서 종업하였고, 만주비행기회사에 간 513명은 실습을 마치자 만주비행기회사 밑에 협력공장에서 비행기 생산에 종사케 하였다.(증 제5호 p49 참조)전기 만주비행기회사는 소화 20년(서기 1945년) 일본항공본부 주최 하의 전환회의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만주비행기회사에서 기술과 자재의 원조를 받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서는 인적 자원을 제공하여 비행기 조속 제작의 협약이 있었던 것이다.(증 10 급 5 참조) 그리하여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공원이 만주비행기회사와 기타 협력회사에 배치 종사한 것은 이 소이이다.참고로 이들 협력공장의 생산품과 작업상황은 여좌하다.만주비행기회사가 설계 제도 검사 발동기 가釖금 부품 10기분, 의장 조립 정비 4기분, 만주항공평태 풍방 5기분, 만주항기 주익석 각지지금구 10기분, 대림항공기 주익절조 4기분, 주익소골 보조익 의자 니제 10기분, 내재제작소 안정판 타익 10기분, 만주자동차 하익 탱크복 10기분, 북신제작소 동체골격 방화벽 각금구 배기관 니서복 10기분, 조정제작소 동체정형 4기분, 궁전제작소 발동기복 흡입관 탱크 10기분, 동아정공 각주 10기분.이와 같이 각 부분을 분탄한 협력공장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공원은 생산에 종업하여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에는 제1호기의 주익 동체를 위시한 대부분이 작업을 끝내고 동년 8월에 시비행을 실시하였으며, 제2호기 제3호기 이하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어 소화 20년(서기 1945년) 9월 말에는 작업 완료를 기대했던 것이다.(증 제5호 p50 참조)이럴 즈음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에서는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 현재 기계 부분품 7종 35점을 작업하였다.(증 제5호 참조)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공원은 누구나 국민학교 졸업자로서 연령은 20세 미만자가 반수 20세 태가 반수를 점한 상황이었는데 조선에 있어서의 공원 소질로서 최고 수준에 가는 것이라 하였다.여기에 소질이라 함은 사상적으로 무지하여 일본정신을 담아 넣어주기에 적당하고 체력이 건장하여 고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말함이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4월 평양항공창에 파견된 실습 상황을 보건대 기계공장 정비공장에서 비행기 수리 관계 작업을 시켰으며, 소화 20년(서기 1945년) 5월 5일 이래 평양 제삼중학교에서 분산공장 건설을 위한 기초공사를 하였을 때 단애절붕 작업 중 고 약 3미, 폭 10미의 적토가 단애에서 붕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공원 광촌종영[광촌종영] 외 3명이 매몰된 사실이 있다.(증 제8호 참조) 그뿐 아니라 창사 불결과 과로로 말미암아 환자가 속출 전염 만연되는 형황이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5월 10일부터 동년 5월 24일 사이에 개선 환자 삼정구영[삼정구영] 외 16명을 산하였다.(증 제9호 참조) 한편 피의자 박흥식을 책임 경영자로 하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멸사진충 책임감에 철하여 참된 내선일체 간소 강력 정병주의의 사풍 확립에 예의 노력하였으니 군대에 준한 통솔태세를 갖추고 일절를 국가에 봉환하여 항공기 생산 일도에 정진하였다.(증 제5호 p26 참)1,000평의 신사 건립을 계획한 것도 그의 리심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피의자 박흥식은 그가 경영주로 관계하는 광신상업학교를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전환하여 전도유위한 청소년을 조선비행기공장에서 실습시키며 학교 과정을 마치도록 하여 우수한 비행기 기술공을 대량 양성하려 하였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4월 20일 부 광신상업학교는 공업학교로 인가되어 동시 항공과 기계과 각 2학급에 240명을 입학 허가 항공기 공업을 수업하게 하였다.(증 제5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한 사실은 이상과 같거니와 피의자 박흥식이 굳게 믿었던 일본 필승은 연합군의 깃발 아래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을 고하게 되었으니 주구 박흥식이 그의 주인 조선군 참모장을 찾아가서 슬픈 고배를 같이 마신 것이 동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래서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군으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불입주금 2,800만원과 식산은행의 차입금 2,000만원을 받아들고 나와 1,200만원을 주주에게 나눠주고 1,600만원과 2,000만원 합 3,600만원을 착복하였으니(피의자신문조서 참조 급 증 10 참조) 그가 일제를 위하여 멸사봉공한 보람이라 할까.조선군에서 비행기를 내줄테니 모국 일본으로 가자는 것을 보류한 내심 또 내변에 있었는지.피의자 박흥식이 일제의 공로금을 받은 3,500만원이 해방 후 우리 상계를 얼마나 혼란시켰는지.(나)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 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사실.피의자 박흥식은 전기 경력에도 있는 바와 같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의 수뇌 간부였으니 원래 동양척식주식회사만 하도라도 한국 침략의 아성으로 서기 1908년 소위 「통감부시대」부터 왜인을 한국에 이민하기 위하여 설립된 일본제국주의 국책이었던 것이다.즉 이 회사는 서기 1910년에 「조선이민규칙」을 제정하고, 서기 1911년으로부터 서기 1927년까지 17회 동안 매년 왜인을 1천 호씩 이민하여 왔으며 이민의 방법으로는 한인의 토지를 강제로 염가로 매수하며 나머지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토지수용령을 내려 한인의 농토를 매수하여 그 소유권을 동양척식회사가 차지하고 한국 자주경제권을 이 동양척식회사가 장악하였던 것이다.이리하여 동 회사는 한국 경제 착취의 유일한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황국국토팽창계획」에 있어서 유일한 실천기관이었다. 즉 일본은 한국의 경제 주권이 한국 인구 8할 이상을 점령하고 있는 농민에게 있음을 지실하고 한국의 경제 동맥을 일본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가 장악한 후 한국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좌절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회사가 보호조약 갱신 후 설립된 회사라면 더 설명을 필요치 않은 것이다.피의자 박흥식은 여기에 대주주로 감사의 자리를 가졌다. 이리하여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 경제 착취에 협력해 온 피의자 박흥식은 소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형생한 자로 응분의 그 성을 갈할 것을 굳게 결의하고 궐연활약하였으니 서기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흥아보국단을 결성하려 함에 피의자 박흥식은 결성 준비위원의 한 사람이었으며, 결국은 조병상[조병상], 정교원[정교원]과 같이 상임위원이 되었다. 다시 서기 1941년 10월 9일에는 경성부민관에서 림전보국단을 결성함에 준비위원이 되었고 동년 10월 13일에는 고원훈[고원훈]과 같이 평양에서 황도 선양을 유설하였다. 이 임전보국단이라 함은 정신적 물질적 로무적으로 전력을 기울여 총후봉공에 일층 철저하여 충렬한 일본 장병의 분투에 대응하고 무한한 황은의 만일을 봉보하자는 취지에서 황국 신민으로서 황도 정신을 선양하고 사상의 통일을 기할 것.국가 우선의 정신에 기하여 국채의 소화, 저축의 려행, 물자의 공출에 매진을 기할 것.국방 사상의 보급을 도하는 동시에 일조유사로 추에 의용 방위의 실을 거두기를 기할 것 등등을 강령으로 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강령을 실천할 것을 목적하고 근로보국 도장 설치, 계도장 설치를 위하여 20만 원을 기부한 것을 보면 피의자 박흥식은 일본 국책을 추진하는 데 정신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피의자 박흥식이 일본의 전쟁 완수를 적극 추진시키기 위한 관제 국민운동기관 소위 「국민총력조선련맹」의 이사로 련성부 연성위원이었다는 것은 전기한 바이다. 또 피의자 박흥식은 대화동맹의 심의원이었으니 대화동맹은 소위 대동아전쟁 말엽에 그 운동목표가일. 내선일체 촉진이. 필승 태세 확립삼. 황민화의 련성사. 증산 공출 책임의 완수였다.(다) 사회문화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 지도한 사실.피의자 박흥식은 전기 소화 17년(서기 1942년) 12월 15일 일본 총리대신(동조영기)의 초청으로 전일본산업경제대표자 전력증강간담회에 참석하여 일본 천황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익년 12월 16일 매일신보에 「지성으로 봉공하겠다」라는 제하 그 심정을 발표하기를「작년 금월 금일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욕하였는데, 지척에서 룡안을 봉배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산업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 황공하옵신 대어심에 봉부코자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결전의 양상은 나날이 심각 가열해서 전력의 증강은 각각으로 급무가 되고 있는데 지금의 일포일기는 명백의 십포십기보다 나은 전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안한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전장에 있는 사람은 직접 전력화되고 아니 되는 것을 불문하고 오직 증강에만 용기를 내며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매진하여야만 됩니다.대동아전쟁 이래 우리 반도 2,500만의 적자가 얼마나 황민됨에 자각을 높여 얼마나 성업 익찬을 위해서 지성을 다해 왔느냐 하는 데 대하여 나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내지 동포와 같이 참다운 일체가 되어 대동아전쟁의 필승과 더불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전체를 바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단언할 수 있어 그것을 경축하는 바입니다」라고 게재하였다.서기 1942년 5월 30일 매일신보에 발표한 담화 「영원히 못잊을 자부」라는 제에서 당시 조선총독부남차랑을 자기의 조부같이 말한 것은 그의 정신과 신념이 반민족적이라는 것은 증하고 남음이 있다.(증 제14호 참조)피의자 박흥식은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됨에 담화를 발표한 것과 조국 아닌 왜국에다 충성을 다하는 것이 황국 신민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학병을 종용하였으니 서기 1943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이 전과를 생각하고 학병의 분기를 바란다」라는 제하 「특별지원제 발표로 반도 2,500만 동포가 기쁨의 절항에 달하여 있을 때 거듭하여 이런 대전과를 접한 것을 황군 장병들에 대하여 진심으로부터 감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존귀한 노고에 보답을 할까 하고 적지 않은 큰 부담을 느끼는 바입니다. 아무리 생산력이 풍부함을 자랑하는 적 미영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우리 황군 앞에 굴복하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때를 당하여 반도 청년 학도들은 일층 자신의 숭엄한 임무를 깨달아 오는 20일 지원병 모집기한까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지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으니 피의자 박흥식은 일제하 거대한 존재로서 언론 기타 방법을 통하여 십분 지도적 역할을 결과했다고 볼 수 있다.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