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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의 역사와 문화유산 해설

안양똑딱이 2017. 3. 2. 12:43

안양의 역사와 문화유산 해설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한 안양은 예로부터 산좋고 물좋고 인심좋아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정토 안양이라 일컬어져 왔으며, 북쪽으로는 수도 서울과 인접해 있고 동으로는 과천, 의왕, 남서쪽으로는 안산, 군포, 서쪽으로는 광명, 시흥등이 접하고 있어 오랜동안 7개 도시를 잇는 중핵도시로 중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김포 국제공항과는 1시간 거리에 있으며, 한국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와는 10분대 거리, 서해안 시도와 더불어 경인 고속도로는 우리 안양 북단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한국 놀이 문화의 메카라 할 수 있는 서울 대공원과는 10분 거리이며, 용인 에버랜드와 민속촌은 40분 거리, 예술의 전당과 서울 잠실 운동장과는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기도 하다.
안양의 CD는 빛나는 태양과 시민의 단결을 상징하며 안양 주변의 명산 관광지로서 아름다운 자연을 상징하고, 사방으로 뻗어가는 희망찬 발전과 문화적 교류의 현대화를 상징하고 있으며, 시목시목인 은행나무는 온갖 역경속에도 견딜 수 있는 시민의 강인함과 끈기를 나타냄과 함께 시의 큰 번영을 의미하며, 시화인 개나리 꽃과 시조인 독수리가 우리시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안양은 현재의 박달동, 석수동을 제외한 전 지역이 고구려 시절 율목군으로 시작하여 통일신라의 율진군, 고려의 과주, 조선시대의 과천면과 과천군, 시흥군 안양면을 거쳐 1973년 시로 승격됬으며, 지난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로 인해 안양역이 표시되면서, 전국 각지의 인구가 모여들며 수도권의 중추 도시로 성장, 지금의 거대 도시에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안양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신라 효공왕 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안양터를 창조하며, 안양이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됬으며, 또한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하는 극락정토 세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삼성산의 안양 사딩의 사찰면과 삼성산에 경기를 한 이 지역이 안양으로 불러졌음을 볼때 안양의 명칭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안양은 예로부터 정겹고 풍요로운 살기좋은 고장으로 조상의 얼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이 보존되고 있다. 먼저, 보물 제 4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추사지 당간지주는 유유산업에 중추사지 3층석탑과 함께 보존되고 있으며, 조선중대 명문이 새겨져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지주로 신라 흥덕왕 원년인 826년 제석해 다음년 827년 완공되었으며, 이곳에 중초사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간지주란 사찰의 입구문에 지주를 세우고 당의 깃발을 달아 불심의 위신과 공덕을 기리고, 중생을 계도할 목적으로 세운 당간을 고정하는 지지대를 말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64호로 지정되 있는 중추사지 3층 석탑은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면에 두꺼운 지대석이 놓이고 그 위에 입양괴음으로 된 결석이 놓여 기반중턱을 받치고 있다. 기반중턱은 매매석으로 짰으며 두뇌에 몸돌은 하나이며, 지붕돌은 세개로 맨 위층에 상문부는 멸실됐다.
또한 삼성산과 관악산에는 삼막사, 안양 사, 염불암, 마애암등 4개의 전통 사찰과 장월암, 망월암, 불성사 등의 유서깊은 사찰이 안양의 역사와 함께하며 사찰 주변의 불교유산은 우리 고장의 문화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막사 사적기에 의하면 삼막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원효, 의상, 운필등 세사람이 암자를 지어 정필한것이 삼막사의 근본이며, 삼성산이란 산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되어있는 삼막사 마애삼존불은 얼굴이나 상체의 활달한 구조로 생동감이 넘쳐 조선 불상에서는 파격적인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불상아래 걸린 28년 명문이 있어 조선 명조때엔 1763년에 조성되었음과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 상태를 알 수 있는 조선 후기 불교 조각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막사 3층 석탑은 고려시대 삼막사 수성도였던 김윤후가 몽고군 장수 살리타이를 활로 쓰러뜨리며 싸움을 이긴 승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탑으로 일명 살리탑이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이와함께 삼막사 사적비는 사찰의 위치와 시주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살짝 지붕에 비문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명문에 있어 조선 숙종 34년인 1707년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막사 명부전은 1880년에 건립되었으며, 1975년에 다시 증축되었다. 삼막사 명부전의 내부를 살펴보면 천장은 우물정자 구조에 중앙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도기왕이 십대명왕과 함께 있으며, 지장보살 뒤로는 1928년에 염불암에서 기증한 지장 탱화가 잘 보존되 있고, 건물의 구조는 정면 세칸에 측면 한칸으로 맛대 지붕에 약 열평 크기이며, 지붕의 무게를 분산하는 기둥위에 군포는 주심포 형식으로 건물의 특심등이 되어 명부전의 건립은 조선 말기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삼막사 삼귀자는 비규정 문화재로 조선후기 중지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형이 이곳 백년암지에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위면에 음각으로 거북규자를 세겨놓았다. 삼귀자 좌측엔 불기 2947년 정심주년 불재자 지운영 정수란 명문을 써 1920년에 쓴 것이며, 서체는 전서로 우측에는 관음명수 장수영자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로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고 있는 삼막사 남녀근석은 선바위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소망을 빌며 치성을 드리는 의식행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사월 초파일과 칠월 칠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소망을 빌며 남녀 근석에 동전을 붙이는 미공행위가 이뤄지고 있다.
안양사는 고려때 태조왕건이 능경이라는 스님을 만나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지고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세운지 왕건이 7층 벽돌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새로 지은 건물로, 과거의 사재의 흔적으로는 안양사 귀부와 부도만 남아있다. 안양사 귀부는 승려 행적을 기록한 비신과 이신은 없어지고 거북모양의 비석 하층돌인 귀부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전하는 말로는 무지한 농부가 비신으로 숫돌을 만들어 팔아 그 후로 가족 모두가 멸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지대석 위에 조성된 안양사 귀부는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비지정 문화재인 안양사 부도 역시 양식의 특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스님의 사유와 유골을 보관하는 석조물을 말한다.
안양사에서 북쪽으로 20미터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 석실분은 96년 11월에 조사되었으며, 내부에 덮혀있던 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1내지 12세기에 승천좌평과 벼루조각이 출토되므로써 조선년대는 물론 고려시대 묘지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통사찰 망해암은 조선 명조때 신경준이 지은 가람고에도 기록되어 있는 유서깊은 사찰로 망해암 경내에 있는 사적비의 기록을 보면 신라시대의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미륵부처를 조성해 별명을 망해암이라 하던 중 조선 태종 7년인 1407에 증축되었으며 이후 여러차례 사찰의 수리를 한 바 있고 현재 망해암 건물 대부분이 1960년 이후 새로 신,증축된 것으로 탑과 사적비 범종도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이곳 망해암에는 비지정 문화재인 망해암 미륵불이 용화전에 모셔져 있다.
망해암 미륵불은 망해암을 대표하는 불상으로 예전에는 안양의 미륵보살이 효시였는데, 그 한분이 망해암 미륵불이고 또 한분은 용화사 미륵불, 나머지 한분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망해암 미륵은 암미륵으로 갓이 머리에 있으나, 용화사 숫미륵은 갓이 자꾸 떨어져 시멘트로 갓을 만들었었는데 실제로 용화사 미륵갓은 미륵불 옆 땅위에 있으며 쓰고 있는것은 시멘트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다.
염불암 역시 전통 사찰로 고려시대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7년인 1407년 한양의 백호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 기맥을 누리기 위해 왕명으로 사찰을 중건할때 염불암도 중창 됐으며, 현재 염불암 건물의 대부분은 1910년 이후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이곳 염불암에는 1810년에 조성된 서용담 지원 부도비와 1816년에 만들어진 봉인당 부도비가 있으며, 이 외에 염불암과 불성사 박람 마애불에는 매우 특별한 형태로 먼저 바위 절벽을 갈아 만든 아치형의 마애불에는 부도 중앙에 사리를 모시는 사각의 감실이 있으나 감실의 입구돌은 분실되었으며 감실 아래는 불자들이 소망을 비는 작은 돌들이 올려져 있다.
또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되어있는 만안교는 1795년에 만들어진 돌다리로 조선조 제 21위 정조 대왕이 억울하게 참화를 당한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로 갈때 참배행렬이 천을 건너도록 축재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외석교이며 정조대왕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한 후 자주 능을 참배하며 부친의 원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충과 효를 상징하는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문화재 만안교는 오늘날 만안구청, 만안문화재, 만안초등학교 등의 명칭에 사용되며 매년 10월 정조대왕의 화려한 어가 행진이 펼쳐지고 있으며, 특히 만안 닥교 놀이는 매년 정월에 세시 풍속 행사로 다리밟기를 통한 무병과 장수, 풍년의 기원이 담긴 오래된 우리의 민속놀이다.
스님이 종을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우리나라 유일의 마애존인 석수동 마애종은 조각 수법이나 종류, 종신의 표현등에 있어 신라말 내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마애존의 유일한 예로 귀중한 자료로 보존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49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영수양관 연명지도는 황해도의 가명 전경으로 오이문 비치와 현조식 자문이 1581년 연해암 부사로 재직시 그 해 2월 자신이 10년 전 황해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그린 그림으로 우측에 칠현시 56자와 끝에 오음단 인장과 수행 용사의 이름, 지명을 표시하고 이 후 자손들이 선대의 공덕을 기리며 그림의 유래와 사실을 기록하여 연명조로 완성되 현재 후손인 윤창열씨가 소장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50호로 군호재가 문서가 지정되 있으며, 군호는 경주에서 야경순시에 쓰이는 암호로써 1794년인 정조 18년 5월3일의 군호를 당시 병조의 시장인 윤장렬이 대전의 재가를 받고자 장양이라는 두 글자를 올리자 왕세자 순조께서 수결과 함께 태평이란 두 글자와 가짜로 재가한 조선시대 야경군호의 양식화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석수 3동에 위치한 주요 지정문화재인 박서 신도비는 종 2품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로서 박비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신도비로 부터 20미터 지점에 박서묘가 위치해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24호로 지정되 있는 비산동 도요지는 11세기에서 14세기까지 도려청자와 도려백자를 제작하던 가마터로써 특히 이곳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려 백자류로 용인 서리오제에 이어 국내에서 두번째로 발견되어, 고려후기 백자와 조선백자의 성립과정을 밝힌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우리나라 도자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26호로 지정되 있는 석수동 석실분은 석실의 방향이 남북으로 축조되 있으며, 석실의 위치, 규모, 조성시기 등을 볼때 석실의 주인은 상당한 계급의 신분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실의 내부 구조는 다듬은 화강암 석재와 남쪽은 한장의 판석을 세운 후 석실 위는 세매의 뚜껑돌을 덮어 석실분을 완성하였다. 또한 비 지정문화재로 갈산동 자유공원 내에있는 지석묘는 평촌 신 시가지를 조성할때 평촌 전역에서 조사 발군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모두 남방식 형식의 하부구조는 매우 다양하며 석관실, 또는 석곽실, 다곽실등이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돌 화살촉과 민무늬 토기들이 있으며, 발굴 조사시 석기 시대의 각기 타제석기와 마제석기, 토기등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귀인마을에서 백제시대의 초기 주거시 형태가 발견되 안양의 오래된 역사적 주거 근거를 선사시대까지 규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비지정문화재인 비산동 석실분은 고려시대에 축재된 것으로 짐작되며, 자연암석을 덮개별로 삼아 축재한 것으로 1호분과 함께 임시분석실은 전체적인 구조가 잘 남아있는 돌방무덤이다.
비지정문화재인 풍양조씨의 정려는 조선 정조때 인물인 풍양조씨가 지아비 이호진이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중 황해도 관양의 화재로 큰 화상을 입고 순직하게 되자 의연하게 장례를 치룬 후 10일간의 단식끝에 운명하자 1799년인 정조 23년 조정에서 열녀의 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앞에 붉은문을 세운것이다. 지난 97년 9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7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손복남씨의 생칠은 옻나무액의 수액을 원료로 채취한 손칠을 기울여 칠하여 수분이 증발할 때 반투명의 조청빛깔이 나게하는 색채기법으로 은은한 색과 아름다움이 오래동안 지속되는 우리의 아름다운 칠기공예이다. 기능보유자 손복남 선생은 13세때부터 옻칠을 시작하여 서울시 주요 무형문화재 1호인 고 홍순택 선생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전국 주요 사찰의 불상과 강한단상등의 옻칠 작업을 해오고 있다. 기능보유자 김재의 옹의 짚공예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조상들의 삶속에 한께한 짚을 서민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생활속에 고수한 공예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짚 제품의 종류는 시약그릇, 양만태, 소모걸이, 깔게방석등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특히 사금방석은 단순하고 과학적인 사금채취 기구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고있다. 김재의 옹은 고령임에도 불고하고 각종 공모전에 직접 공예품을 출품해 다수의 입상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88년 서울 올림픽때는 짚제품을 전시하여 전통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세계인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예능보유자 이봉애씨는 평양검무의 보전과 전승을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전통 문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검무란 신라의 화랑 황천량이 백제왕을 시해하려고 칼춤을 춘것이 그 시초라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궁중과 지방관아 향연에 빼놓치 않고 들어가기도 했다. 북메우기 기능보유자인 임선빈씨는 36년간의 북만들기 장인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안양 시민의 소리북을 제작 안양시에 기증하여, 우리시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97년 11월 안양 시청에 입고된 안양 시민의 소리북은 춘향목과 쇠가죽을 재료로 해 총길이 220센치미터, 울림판 240센치미터 등 세계 최대의 규모로 이름은 두개의 여의주는 서로 여의주를 탐내며 싸우지 않는 의미로 넉넉하고 풍요로운 안양시민의 정서, 화합을 상징하며 봉황새를 배치하므로써 봉황의 깊은 참뜻과 그 복이 안양시에 고루 넘치는데 그 의미를 두고있다. 북메우기란 가죽을 이용해 북을 만드는 기술로 예전에는 이를 고장이라 불렀으며 고대 사회부터 제사와 주술용, 경고와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는 한편 음악적으로는 리듬과 선율악기로 중요하게 취급되오고 있다.
방자유기 기능보유자 이형근씨는 무형문화재 77호 방자유기자인 부친 이봉주옹으로 부터 유기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방자유기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섞여진 놋쇠를 두들겨 늘어나는 특성을 이용해 각종 생활용기를 만드는 기술을 말하며, 놋쇠의 가장 큰 특징은 인체에 무해한 점을 꼽을 수 있어 예로부터 유기의 값이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수저나 식기는 반드시 놋쇠를 사용하였다. 기능장 이형근씨는 15세부터 유기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94년에는 세계 최대의 크기로 알려진 징을 제작 우수한 방자유기 제작 기술을 세계인에게 선보였다.
재래신앙으로 전래되오고 있는 마애전은 풍요와 무병장수, 번영을 기원하는 마을 공동의 의례로 오래도록 이어져오고 있는 신앙의 한 형태이며 옛부터 마애 주민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다. 현재까지 관양동은 수천마을 도당제와 석수동의 쌍탈심제, 섬막골 느티나무제에 있어 강직과 신앙의 대상물인 산과 바위, 주목인 느티나무를 향한 마을제가 매년 음력 10월에 행해지며, 예전에는 규모가 큰 굿판에 한밤중에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된 형태로 지켜지고 있다. 특히 마을제와 관련한 수령 500년의 높이 20미터의 삼막골 느티나무와 염불암에 있는 수령 500년의 높이 15미터의 보리수 나무는 도지정 천연기념물인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고, 이 외에도 수천마을 도당제와 관련하여 김해김씨 유생이 심었다는 수령 500년 느티나무도 소중한 자연 유산이다. \
이밖에 우리시에는 1905년 안양을 지나던 민족의 원흉 이등방문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입힘으로 안양인의 기개를 만방에 떨친 원태우 지사와 학생의 신분으로 항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조국의 국가 부흥을 위해 공업기술 교육에 평생을 바친 한항길 선생도 자랑스런 우리고장의 인물이다.
그리고 수리산에는 최경한 선역지가 예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과 함께 있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아버지이며 1830년대에 안양에 천주신앙을 전파하다 순교한 최경환과 그의 부인 이성리의 신앙적 아픔과 고행을 경건하게 엿볼 수 있는 장소로 많은 사람이 참배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안양은 문화예술의 도시로써 시민성 찬양은 물론 전통 문화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매년 5월에 펼쳐지는 안양예술제는 문학, 음악, 사진, 연극, 무용, 국악등의 다채로운 예술제로 펼쳐지며 시민성 찬양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10월에 개최되고 있는 만안 문화재 행사는 정조대왕의 능행을 기원하는 어가 행진의 거리축제를 비롯해 탈춤, 풍물놀이, 수석전등이 펼쳐져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되새기는 행사로 치뤄져오고 있다.
또한 시립 합창단과 소년소녀 합창단은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며 안양 1번가 거리축제와 평촌 먹거리 축제는 매년 벌어지는 정례적인 행사로 시민들의 화합의 장으로 펼쳐지고 있다. 이밖에도 우리 안양에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안양의 역사와 함께하며 전통있는 문화도시로 성장해 가고 있다. 멋과 향기가 흐르는 안양,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속에 조상의 얼이 숨어있는 안양은 후손들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삶의 터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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