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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7. 3. 5. 17:38

과천.군포.안양.의왕의 엣 경관 이야기

제1절 토지이용의 변화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에 대해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 전반에서 계속 새로운 논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여기에 지역별 접근도 가세되면서 논의가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대화 또는 산업화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산업화의 지역적 전개 과정은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어서 그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도 단위에서는 경기도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급격하게 그 변화를 맞이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산업화가 진행되면 여러 부문에서 변화가 포착되지만, 지리학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토지이용의 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토지이용이란 말 그대로 토지가 어떻게 또는 무엇으로 이용되는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예컨대 과천이라는 한정된 지역 범위 안에서 토지는 주택·도로·임야·공원·하천·공장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주택이나 공장, 또는 상가들이 혼재되어 있지 않고 지구화(地區化, zoning)되는 것을 보면 토지가 특정 용도를 갖는 데에는 어떤 원칙이나 규칙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경제적인 것에서 시작되었든, 또는 행정제도에 의한 것이든 현대의 도시는 중심업무지구·상업지구·주거지구·공업지구 등으로 토지의 용도를 지정하여 이용 상태를 조절한다. 토지이용 상태를 분석하면 특정 지역의 기능이나 내부 지역구조, 또는 지역간 계층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으며, 이 점에서 토지이용은 지리학에서 크게 중시하는 개념이다. 토지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지만 그 이용 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임야가 순식간에 대단위 주택으로 변모하고 하천이 도로로 탈바꿈하는 사례는 전국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때로는 급진적으로, 또는 매우 완만하게 이루어진 이들의 변화상을 추적함으로써 과천 땅의 개략적 이력서를 작성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1. 시기별 영역 변화
과천은 고려시대에 과주군으로 불리다가 1413년에 군현 명칭 변경에 대한 전국적 시행령이 내려지면서 지금의 이름인 과천현이 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년경)·『호구총수(戶口總數)』(1789)·『대동지지(大東地志)』(1864년경)·『민적통계표(民籍統計表)』(1909) 등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과천현은 현내·동·남·상북·하북·상서·하서면 등 모두 7개의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영역은 아마도 조선 초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수백 년 이상 지속되어 온 과천의 영역에 변화가 온 해는 1914년이다. 일제는 합병 후 4년 만에 전국적 차원에서 행정구역을 조정하는데, 그 핵심은 지방행정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중·소군을 대군에 병합시키거나 2개 이상의 군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 이래 대대로 내려왔던 330여 개의 군현 가운데 100개 이상의 군현이 통폐합되면서 군의 수가 220개로 줄어들었다. 이때 과천도 안산과 더불어 시흥군에 편입된다. 1914년에 안산군과 과천군을 병합한 시흥군은 동·서·북·과천·신동·남·서이·수암·군자면 등 9개 면으로 편성된다. 이 가운데 과천·신동·남·서이면이 원래 과천 땅이었고, 수암·군자면은 안산 땅이었다. 조선시대 과천의 7개 면 가운데 상북면과 하북면은 1914년 시흥군 북면으로 편입되었고, 현내면은 동면 일부와 함께 과천면으로, 동면은 상북면 일부와 함께 신동면으로, 남면은 그대로 남면으로 바뀌었고, 상서면과 하서면은 서이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500년 이상 내려온 과천군은 면으로 전락하였고, 이후 1986년 시흥군에서 분리·독립하여 과천시가 되면서 다시 옛 읍격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이때 과천의 관할면적은 35.8㎢로 조선시대 141㎢의 1/4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인해 과천군은 7개 면이 5개 면으로 통합되었다. 이 가운데 북면은 시흥군 상북면과 하북면, 그리고 과천군 하북면이 모여서 이루어졌으며, 나머지 4개 면은 모두 예전 과천 소속의 땅으로만 구성되었다. 예컨대 원래 과천군 군내면 소속이었던 관문·내점동 일대는 시흥군 과천면 관문리가 되었고, 옛 하서면 발사리·안양리·후두미리 일대는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로 재편되었다. 1914년에 시행된 행정구역의 변동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추적해 올라가면 조선시대 과천의 영역을 복원할 수 있다.
결국 1914년의 과천면 일대는 지금의 과천시 중앙·갈현·별양·부림·과천·문원동이고, 신동면은 서울시 서초구 잠원·반포·방배·사당·양재·신원·우면·서초동, 북면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본·흑석·동작동, 서이면은 안양시 비산·호계·안양동, 남면은 군포시 산본·금정·당정·부곡동에 해당한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현재의 과천시와 서울시 서초·동작구 일부, 그리고 경기도 안양·군포시 일부 지역이 조선시대 과천현이 관할하던 범위이다.
 
2. 토지이용 변화와 지도
과천의 토지이용 상황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방법으로 지도 분석을 시도한다. 지도는 토지이용의 상황을 알려주는 대표적 자료로, 사물의 위치와 고도를 표시한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인 동시에, 특정 시점의 지역 상황을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게 기술한 일종의 문헌자료이다. 지도가 문헌으로 인식되지 않는 이유는 표기된 문자들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지도에는 알 듯 모를 듯한 기호들이 넘쳐나고 축척 개념이 적용되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은 다른 문헌이 갖지 못한 지도의 최대 장점이기도 하다. 한정된 지면 속에 가능한 많은 지역정보를 담기 위해 지도는 문자를 사용하되 문장을 이루지 않고, 반복되는 문자는 기호로 대체한다. 흔히 범례(凡例, legend)라고 지칭되는 이들 기호는 자연경관·취락·교통로·경계선·일반 시설물을 함축적이면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형태상으로는 점·선·면 기호로 구별되는데, 점으로는 관공서·공장·시장·학교 등의 각종 시설이 표현되고, 도로·철도·항로·경계선·등고선·해안선 등은 선으로, 논·밭·염전·임야·간석지·과수원·도시 지역내 취락 등은 면상(面狀)으로 표현된다. 한국 지도사에서 범례가 사용된 시점은 대략 19세기부터이다. 물론 그 이전 지도들에서도 범례의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靑丘圖)』(1834)의 지도식(地圖式)과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의 지도표(地圖標)에서 범례의 정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후 1910년대에 일제가 제작한 1:50,000 지형도는 이전과는 격이 다른, 훨씬 다양하고 체계적 범례를 사용함으로써 근대 지도의 출발을 재차 확인해 준다. 과천의 토지이용을 살펴보기 위해 분석 대상으로 삼은 지도의 시대적 범위는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이다. 조선 후기의 지도 중에서는 『해동지도(海東地圖)』 (1995, 규장각)와 『조선 후기 지방지도』(1997, 규장각)가 군현 단위로 편집된 지도이기 때문에 그나마 토지이용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해동지도』는 1750년대에 전국의 군현도를 제작한 후 이를 모아 성책한 것이며, 『조선 후기 지방지도』는 1872년에 일괄 제작된 전국의 군현도를 규장각에서 영인한 지도집이다.
한국에서 1:50,000 대축척지도가 제작되는 시점은 19세기 말부터이다. 이 시기 지도는 일본에서 파견한 간첩대원이 조선의 산하를 불법 측량하여 만든 것으로서, 과천 지역은 1895년경에 측도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일제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약 33%에 달하는 지역이 누락되었지만, 이로써 한국도 비로소 근대적인 1:50,000 지형도를 갖게 되었다. 이 지도는 삼각점망을 구축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로 목측(目測)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등고선이나 위치 등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당시의 주요 취락과 시설물, 도로망과 기타 토지의 이용상태 등이 범례와 함께 제시되어 있으며, 한국 고유의 지명이 일본어 가타가나와 병기되어 있어서 조선 말 국토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지도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남영우 편, 성지문화사, 1996)라는 이름으로 영인되었으며, 당시 과천의 영역은 총 484도엽 가운데 한성·송파진·과천·광주 등의 네 도엽에 걸쳐 있었다. 일제는 통감부시기부터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하여 조선의 국토를 측량하는 동시에 정확한 실측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전초 작업으로 삼각점망을 구축,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에 걸쳐 1:50,000 지형도의 제작을 완료한다. 이 지형도는 도엽별로 한두 차례의 수정본 제작을 거쳐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전국 총 722매 가운데 경성·독도·군포장·광주도엽이 과천의 영역을 담고 있다. 8.15광복 직후 이 지도 원판은 미군정으로 넘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 육군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지금은 건설교통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형도를 비롯한 각종 지도 제작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1963년에 1:50,000 지형도가 완간된 이후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수정본이 제작되고 있다. 현재의 과천시는 조선시대보다 면적이 줄어 1:50,000 지형도의 안양도엽과 수원도엽 두 장에 들어온다.1:50,000 지형도 제작사를 되짚어 보면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1895년 경에 제작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이래 도엽 당 일제강점기에 1~3매, 8·15광복 후 5~6매가 제작된 셈이다. 이들 수정본을 모두 확보하면 좋겠지만, 한때 지도가 군사용으로만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부 시기에 발행된 지도에 대해서는 지금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1890년대, 1910년대, 1970년대, 2000년대 네 시기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1890년대와 1910년대 지형도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와 『근세 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라는 책자로 영인되었고, 1970년대 지형도 역시 1975년에 4권의 책자로 묶여 출간된 적이 있다. 자료 획득의 편의성도 고려되었지만, 분석 대상 시기를 결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지도사적·지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890년대 지도는 최초의 1:50,000 지형도로서 과천의 전근대 지역경관을 담고 있으며, 1910년대 지형도는 삼각점망에 근거하여 가장 정확하게 측도된 최초의 지형도일 뿐 아니라 근대적 경관이 처음 이입하는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중시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과천에서도 토지이용의 전환점(Turnning Point)이 되는 시점이고, 마지막으로 2000년대는 현 상황을 알려주어 분석의 종착점이 되므로 빠질 수 없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산업구조는 여전히 농업을 위시한 1차산업이 중심이었다. 이와 같은 산업구조는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사업과 더불어 점차 상공업 중심으로 변화되어 갔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 공장제공업 단계가 시작된 이래 1960년대에 양질 전화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개발도상국의 산업화는 대체로 1960년대에 시작된다. 10여 년 동안 열심히 공업입국으로서의 뼈대를 갖춰가자 그 결과물들이 1970년대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는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애’면서 농촌 지역에서도 일대 혁신이 일어났지만 상전벽해의 변화를 보인 지역은 아무래도 공업을 유치한 도시 지역이다. 농촌과 도시는 사실 서로 엇물려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이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문이 바로 인구변천 현상이다. 53.7%였던 1960년대의 총가구 대비 농가율은 2000년에 9.6%로 떨어졌고, 58.3%였던 총인구 대비 농가인구율은 8.5%가 되었다. 40년 동안 두 부문 모두 비율이 40%p 이상 감소하였음이 확인된다. 이같이 인구는 그 사회가 겪어온 중요한 사회·경제·정치적 변동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인구분포, 인구밀도, 연령별·성별·산업별 인구구조와 시기별 인구규모 등의 인구특성은 사회변동을 알려주는 일차적 지표가 되며, 이러한 사회변동은 필연적으로 토지이용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에 토지이용의 변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과천과 이를 둘러싼 경기도의 인구변천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3. 토지이용의 기저-인구 변천
조선시대에도 3년에 한 번씩 호구(戶口)를 조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으나 정확한 인구가 파악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된 이후이고, 1925년부터는 한국에서도 인구센서스가 시작된다.
합병 당시 약 1,750만 명이었던 한국의 인구는 1930년에 2,000만 명을 넘어서고, 해외 동포가 대거 귀국한 1945년 경에는 3,000만 명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까지 늘어난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인구는 일시적으로 감소하였으나, 1955년부터 베이비 붐이 일어 1960년에는 다시 남한의 인구만 2,500만 명까지 증가한다. 연평균 3%에 달하는 이 기간의 인구증가율은 역대 최고의 수준에 해당한다. 휴전 후 부부의 상봉이나 연기된 결혼의 성사가 출생률을 높이기도 했지만, 전쟁을 계기로 도입된 항생제와 의학의 보급이 사망률을 크게 낮춘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 전쟁 후 계속 증가하던 한국의 인구는 1960년대에 두 가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하나는 이전보다 출생률이 떨어지면서 인구증가 속도가 완화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시인구의 증가가 상대적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흔히 이촌향도(移村向都) 현상으로 일컬어지는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도시 지역의 공업화가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그 효과가 10여 년이 지난 1970년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하나의 커다란 사회변동으로 부각된다. 이촌향도의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도시화율이다. 1970년대에는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둔화됐음에도 도시화율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도시인구의 증가세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촌향도 현상이 시작된 이래 경기도가 유일하게 단 한 번도 인구감소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인구는 1990년대 중반까지 꾸준하게 증가하지만, 서울의 인구증가율은 1970년대에 이미 극점에 달한 후 감소 추세로 돌아선다. 서울의 인구증가율 둔화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경기도의 인구증가는 사실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여기서 경기도의 인구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 경기도의 인구가 남자 168만 명, 여자 167만 명 등 총 335만 명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각기 451만 명, 443만 명 등 총 894만 명으로 늘어난다. 30년 동안 남자는 2.64배, 여자는 2.65배, 총인구는 2.69배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전국 인구가 3,146만 명에서 4,613만 명으로 1.47배 증가한 것에 비하면 경기도의 인구증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2000년 통계에서는 1970년 당시 경기도에 속해 있던 인천이 빠져나간 상황이므로 보이지 않는 격차가 더 있다. 인구분포를 통해 보면 경기도의 인구성장이 더욱 선명해진다. 1970년에 한국 국민 열 명 중 한 명이 살았던 경기도가 2000년에는 그 비율이 근 두 배로 늘어난다. 1985년 비율이 일시적으로 줄지만, 그것은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서울은 17.6%에서 21.4%로 인구비율의 증가분이 3.8%p에 불과하고, 더구나 1990년대 이후에는 절대인구가 감소 추세로 돌아선다.경기도의 인구증가에는 대체로 1990년 경을 기점으로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며, 동시에 두 요인 모두 서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요인은 앞서 언급한 이촌향도에 의한 인구증가이다. 1960년대에 기미를 보이고 1970년대에 본격화된 이촌향도현상은 당연히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서울 입성은 사실 높은 집값 또는 전세값·생활비·교육비 등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은 이촌민(移村民)도 많았다. 이때 이들이 ‘언젠간 서울에서 살리라’는 꿈을 품고 차선으로 선택하여 정착한 곳이 서울의 주변 지역, 즉 경기도다. 결국 그들은 상대적으로 주거지를 확보하기 쉬운 경기도의 인천, 부천, 시흥, 안양, 과천, 성남, 광주, 하남, 구리, 의정부, 고양 등지에 정착하게 된다. 비슷한 경우에 처한 사람들의 일부는 서울의 고지대나 하천변 무허가 불량주택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지금까지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서울의 재개발사업은 대개 이들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일례로 성남시는 서울의 불량주택 정비와 도심재개발의 차원에서 청계천변 빈민들을 축출하여 만든 도시로 유명하다. 경기도 인구증가의 두 번째 요인은 서울인구가 경기도로 이출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왕성해진 이 현상은 주로 과천·하남·분당·평촌·일산 등지에 조성된 신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신도시 개발은 서울의 과밀인구 분산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주택건설사업이다. 이들 신도시는 웬만한 중소도시에 버금갈 정도의 인구규모를 지니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경기도의 강력한 인구흡입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1990년대 이후 경기도의 인구증가는 서울에서 빠져 나간 사람뿐 아니라 신도시를 중심으로 몰려든 새로운 이촌민이 주도한 것이다. 다만 과천만큼은 서울의 행정기능을 분산할 목적으로 계획한 도시이기 때문에 앞의 경우와 성격이 다르다. 이 밖에도 서울로 통하는 교통체계가 지하철·철도·고속도로·고속화도로 등으로 고도화되고 자동차 보유도 증가하면서 서울의 통근권이 점차 경기 외곽으로 확장되자, 부천·안양·성남·고양·의정부 등 서울의 전통적 위성도시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광주·수원·용인·파주·이천, 심지어 안성이나 평택이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초부터 새로운 베드타운(Bed-Town)으로 등장한다. 또한 전원주택을 찾는 노년층 인구의 U턴 현상과, 결혼과 더불어 분가한 신혼부부의 주택마련 등도 서울시민이 경기도민으로 전입하는 주요 사례이다.
통계수치로 이를 다시 기술하면, 1965~1970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전국 평균 수준인 1.9%에 머물렀던 경기도는 불과 5년이 지난 1970~1975년에 3.8%라는 급격한 신장세를 보이고, 인구변천의 안정기를 맞이하는 1980년대에도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 등의 6대 도시와 더불어 8도 중 경기도에서만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한다. 1990년대에는 서울과 부산이 마이너스(-) 성장을 보인 반면에 경기도는 1990~1995년에 4.4%, 1995~2000년 동안 3.2%라는 경이적인 인구증가율을 보인다. 1995~2000년에 늘어난 경기도 인구 129만 명은 전국 인구증가의 94%에 달하는 것으로, 1990년대 한국의 인구증가는 경기도에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2005년 현재, 27시 4군으로 구성된 경기도는 1970년에는 3시 19군이었다. 3개 시는 인천·수원·의정부이며, 19군 안에는 강화와 옹진이 포함된다. 1970년 당시 경기도에서 인구 20만을 넘는 곳은 양주군이 유일하고, 이어서 평택·화성·파주·시흥군 등 관할면적이 넓은 군이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 수원도 당시에는 총 22개 시군 가운데 7위에 머물렀다. 이는 경기도에서 아직 인구집중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1980년 통계에는 성남을 비롯하여 안양·수원·부천 등 서울 주변의 도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른바 신도시 개발로 인해 화성·용인의 일부 지역을 흡수한 수원과 분당을 아우른 성남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2000년 100만 명에 가까워졌고, 각기 일산 신도시와 평촌 신도시를 껴안은 고양과 안양, 그리고 반월공단으로 시작된 안산시의 인구가 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모두 경부선이나 경인천 철도, 또는 경인·경부고속도로 및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서울 주변의 고속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도권 지하철망으로 연결되는 지역이다. 2004년 현재, 차례대로 인구가 많은 수원·성남·고양·부천·안산·용인·안양의 인구는 경기도 전체 인구의 55%를 차지한다. 한편 인구가 희소한 연천·가평·양평·여주는 현재 경기도에 남아 있는 군이며, 시부(市部)에서는 과천의 인구가 가장 적다.
인구가 많은 성남과 안양이 과천과 접경하고 있으며 인구 순위가 높은 나머지 도시들도 모두 과천에서 자동차로 30~60분 이내의 거리임을 고려하면 비슷한 권역 내에서 과천은 그동안 인구집중이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과천이 시로 승격한 이후에도 경기도 내의 인구구성비는 1990년 1.2%에서 2000년에는 0.7%, 그리고 2004년에는 0.6%로 더 떨어져 계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제 범위를 좁혀 과천의 인구가 조선 후기 이후 현재까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 과천의 영역은 지금보다 넓은 서울·안양·군포 일부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전근대 인구자료는 그 절대 수에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분포 양상은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 가운데 『여지도서』·『호구총수』·『민적통계표』 등은 면 단위까지 인구를 기록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과천의 인구는 약 1만 4,000명이었고, 호당 인구는 평균 4.3명 정도였다. 면 단위에서는 상북면과 현내면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내외를 유지하였다. 현내면은 지금의 과천시 중심 지역이며, 상북면은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에서 사당·동작동에 이르는 한강 연안 지역이다. 『호구총수』에 기록된 경기도의 호수는 15만 9,160호이고, 인구는 64만 2,069명으로, 경기도에서 차지하는 과천의 호수와 인구의 비율은 각기 2.1%와 2.2%에 달한다. 당시 경기도에는 39개의 군현이 있었는데 과천은 호수와 인구에서 도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과천의 관할 면적은 경기도의 약 1.4%에 불과하므로 인구밀도는 평균보다 높았다. 7개 면 모두가 여초현상을 보이는 것이 특이하지만 이는 조사상의 오류로 생각된다. 『민적통계표』는 일본 헌병대에서 무력을 동원하여 조사한 자료이기 때문에 정식 인구센서스가 실시되기 이전의 인구통계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에 따르면 20세기 초 과천의 호수와 인구는 각기 3,949호와 1만 7,944명으로 『호구총수』에 비해 각각 120.7%와 126.6%의 신장세를 보였다. 다시 말해 『호구총수』의 호수와 인구는 1909년 당시의 79.0%와 82.9% 수준이었다. 현내면과 상북면의 인구비가 높은 것은 18세기 후반과 같지만,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남초현상은 이전 시기의 여초현상이 비정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 1909년 당시 경기도의 인구는 약 134만 명이었고, 과천의 인구비는 면적비와 비슷한 1.3%였다. 한편 1909년 조사에서는 호주의 직업이 분류되어 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직업계가 총호수보다 많은 것은 일부 호주가 복수의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북면의 경우, 전체 직업 중에는 농업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상업호가 37.2%나 되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농업호의 비율이 18.4%에 불과하고 일가(日稼)의 비율이 상업호와 비슷한 33.6%에 달하는 것도 놀랍다. 하북면은 한강 남쪽 연안에 접해 있는 지금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흑석·본동 일대로서, 하북면의 상업호 비중은 주로 노량진이 주도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6개 대간선도로의 하나인 제주로(해남로, 호남로)가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노량진은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그 건너편의 마포나 서빙고와 더불어 경강(京江) 내의 유력한 유통거점으로 기능한 전통적 상업포구였다. 일가는 일일 고용직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상업포구에는 화물의 하역과 선적, 물품의 운반과 보관, 단순 심부름 등 일당을 받고 일할 수 있는 잡역이 많다.
농업호의 비중이 90%를 넘는 동·상서·하서·남면 등은 토지이용 양상이 일반 농촌과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양재천 연안의 서울시 서초구 양재·신원·우면동 일대와 안양천 연안의 안양시 평촌·군포시 일대이다. 이들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하천 연안의 충적지를 터전으로 삼아 생활해 온 전형적 농촌마을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이들 충적지가 모두 세 도시의 주요 시가지로 바뀌었다. 현재의 과천시는 조선시대의 현내면이 1914년 이래 시흥군 과천면에 소속되었다가 1986년 시로 승격한 것이다. 과천면의 인구는 1960년에 6,068명으로 1980년까지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다가 1982년 출장소가 설치된 이후 급증한다. 1980년에서 1985년까지 불과 5년 사이에 과천의 인구는 3.8배 이상 증가하였고, 1985년 인구는 1960년 대비 10.7배 이상에 달한다. 1986년 시로 승격한 이후 인구는 1990년까지 증가하지만 1995년에는 1990년의 94% 수준으로, 그리고 2000년에는 5년 전의 98% 수준으로 떨어진다. 최근 다시 증가세를 보이지만 연간 인구는 미약한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고 있다. 1914년 이전 과천 땅이었던 지금의 안양시 일대의 서이면은 1960년 이래 지속적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군포시에 해당하는 남면 역시 1960년에는 과천면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증가폭을 달리하면서 인구가 성장하여 지금은 과천시보다 4배 이상 인구가 많다. 그만큼 과천의 인구는 매우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천은 서울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산업시설을 유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구변천은 과천의 토지이용 양상이 서울의 다른 위성도시와 질적으로 다른 변화 과정을 거쳤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 토지이용의 변천-시기별 경관 변화
과천은 서울의 과밀화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1978년에 행정 신도시로 건설할 것을 계획하여 1980년대 초에 완공하였고, 1986년에 시흥에서 분리·독립하여 시로 승격되었다. 어떤 면에서 독립했다기보다는 1914년에 잃었던 군으로서의 읍격을 되찾은 셈이다.
양재천의 상류 지역에 속하는 과천은 서쪽의 관악산(629m)과 동쪽의 청계산(618m) 사이에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남쪽으로는 안양시와 해발고도 50m 내외의 낮은 고개로 접경한다. 비록 고도는 높지 않지만 이 고개는 과천의 양재천 유역과 안양의 안양천 유역을 구분하는 분수령이다. 북쪽에서 서울과 경계를 이루는 남태령은 ‘서울의 남쪽에 있는 큰 고개’라는 뜻이다. 남태령도 해발고도가 100m를 살짝 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서울에서 제주로를 따라 내려갈 때 만나는 첫 번째 고개이고, 남쪽에 있는 고개에 비하면 높기 때문에 큰 고개(태령, 太嶺)로 인식된 듯하다. 남태령도 늘어나는 교통량에 맞춰 크게 확장되었고, 최근에는 과천-봉담간 고속화도로가 개통되어 과천에서 외부로 드나들기가 수월해졌다. 이외 양재천이 흘러나가는 동북쪽으로는 서울시 서초구 우면·양재동과 만나고 있다. 현재 과천시는 시의 중앙부에 거의 유일한 시가지가 크게 형성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서울대공원, 그 북쪽에는 서울경마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시가지는 양재천 양안에 걸쳐 있으며, 공원은 양재천 동안의 충적지와 청계산 서사면에 있다. 남태령에서 내려와 시가지 중심부를 관통하는 중앙로, 그리고 갈현삼거리에서 다시 국도 47호선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원래의 제주로이다. 이 길은 과천의 전통적 간선도로축이었으며, 이후 시가지 외곽을 돌아가는 국도 47호선과 과천-봉담간 고속화도로가 신작로로 크게 정비되었다. 이제 어떻게 과천이 오늘날과 같은 경관을 지니게 되었는지 고지도와 근·현대지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조선 후기의 경관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의 군현도 가운데는 『해동지도』와 1872년 군현도가 참고할 만하다. 『해동지도』에 남태령은 호현(弧峴)으로 표기되었으며, 제주로가 여기서 인덕원평으로 이어진다. 양재천과 안양천, 그리고 북단에 한강이 크게 그려졌으며 관악산과 청계산을 중심으로 한 산줄기가 과천 읍치를 에두르고 있다. 한성은 물론이며 접경하고 있는 금천이나 광주로 이어지는 도로망이 꽤 자세하다. 제주로는 이 지도에서 북쪽 방향으로는 경도대로(京都大路), 남쪽 방향으로는 삼남대로(三南大路)로 표기되었다. 읍치 주변으로는 여단·성황단·향교·사단·객사 등의 시설물이 설치되었고, 읍치 동쪽에 풍수적 발상에서 수구수(水口藪)를 조성한 것이 이채롭다.
취락으로는 노량진·동작진·삼전도 등의 도진취락과 흑석리 등이 표시되었고, 안양천 위에는 양재석교와 읍내석교가 놓여 있다. 1872년 군현도는 전반적으로 『해동지도』보다 정보량이 적다. 호현이 지금의 이름인 남태령으로 표기되었고, 정조의 능행과 관련하여 만안석교와 행궁 등이 새로 등장하였다. 안양천 본류는 군포천으로, 학의천은 인덕원천으로, 양재천은 공수천(公須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수구수는 관수(官藪)로 표기되었다. 노량진·동작진·한강진 등과 같은 주요 나루는 변함없이 지도에 그대로 올라왔다. 읍내 지역은 향교와 행궁만 표시하고 ‘읍’으로만 간단히 표현하였다.
 
2) 19세기 말의 경관
조선 말기 과천의 전반적 토지이용 상황은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과천에서 토지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지목(地目)은 임야이고, 그 다음으로 양재천과 안양천 연안의 경지이다. 경지로 이용되는 부분은 대부분 충적지이며, 산사면의 일부도 밭으로 개간되었다. 두 하천 양안의 충적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도 당시 과천의 토지이용 경관을 주도하는 특징의 하나가 된다. 이 도로가 앞서 설명한 제주로이며, 북쪽에서부터 한강을 건너고 남태령을 넘어 과천 읍내로 들어온 다음 가일마을과 인덕원 사이의 낮은 고개를 넘어 현재의 의왕시 골사그내마을로 이어진다. 과천 치소(治所)에 미약하나마 시가지가 형성되었고, 나머지 취락은 주로 제주로 연변이나 사면 말단부에 산포되어 있다. 산지는 거의 대부분 산림으로 덮여 있고, 능선 고도가 낮아지는 안부(鞍部)에는 고갯길이 났다. 산지에는 오래된 사찰이나 암자가 존재했으나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는 않다. 목측으로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에, 실제 629m로 측정된 관악산 고도가 602m로 표기되는 등 등고선이나 해발고도는 정확성이 떨어진다. 관악-수리산 능선은 시흥군과, 청계-모락산 능선은 광주군과, 그리고 한강은 한성과의 경계를 이룬다.
과천의 경지는 한강 연안, 양재천 연안, 안양천 연안의 충적지가 핵심부를 이룬다. 그러나 한강 연안은 범람이 잦기 때문에 경지로 이용되지 못하고 습지 상태였다. 봉화로가 시작되는 지점의 잠실은 현 송파구 잠실동에 있던 동잠실에 대비하여 서잠실로 불렸다. 현 신동초등학교부터 농가공산품판매센터 부근까지 잠원로를 끼고 발달한 마을로서, 잠원동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잠실마을 동쪽의 독도(纛島)는 현 신사동이다. 서쪽의 독도에 뽕밭이 조성되어 있다. 독도는 뚝섬을 음차하여 표기한 것일텐데, 실제 이렇게 불렸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도 이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노량진에서 서빙고까지의 한강에 모두 네 곳의 나루가 있다. 노량진은 노량(露梁)과 노양(路陽) 두 가지로 표기되었다. 필자로서는 후자에 대한 용례를 다른 문헌에서 본 적이 없다. 고사리에서부터 흑석리까지 도로변에 과천 읍내보다 더 큰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도로 양편에는 가옥들이 줄을 지어 들어섰으며, 이들 중의 상당수는 상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과천에서는 이미 19세기 말에 초기적 형태의 가촌(街村) 경관이 연출되고 있다. 앞서 얘기한 1909년 하북면의 높은 상업호 비중을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활동했던 상인들이 이른바 조선 후기부터 왕성하게 활동했던 경강상인의 일부를 구성했을 것이다. 노량진 상류쪽으로는 흑석리와 동작리, 그리고 서빙고에 도선장이 있었다. 동작리로 이어지는 나루 앞의 수심이 7m에 달한다. 제주로 초입에 위치한 승방평마을은 현재 방배동에 속한다. 사당역에서 남태령쪽으로 오르다 보면 이를 알리는 표지석도 있다. 현재의 길은 확·포장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래보다 고도가 낮아졌다. 이에 노변에 있는 표지석과 마을이 지도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도로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남태령을 넘은 제주로는 남쪽의 첫 번째 영하(嶺下) 취락인 한계[한내]마을을 만나고 곧 과천 읍치로 들어간다. 이 중심가로는 계속 전통을 이어 오늘날 과천시의 최대 번화가를 형성하였고, 지하에는 전철이 부설되어 중심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제주로의 서편, 관악산 동록 끝자락에 동헌이 표시되었다. 제주로는 양재천 유로와 함께 남쪽으로 교동·문원동·세곡·가일마을을 지나 고개 너머 인덕원으로 이어진다. 이들 마을뿐 아니라 냉정[찬우물]·갈현동·야촌[벌말] 등의 마을도 제주로에서 멀지 않다.
인덕원 아래 민백에서부터는 제주로가 과천과 광주의 경계를 이루다가 모락산 서쪽 산자락을 돌아 등곡에서 오늘날 국도 1호선으로 이어져 수원으로 빠진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서는 도로를 크게 네 등급으로 나누어 도로(道路), 연로(聯路), 간로(間路), 소로(小路)로 표시하는데, 제주로는 가장 등급이 높은 ‘도로’이다.제주로와 등급이 같은 길이 군의 동쪽에 또 있다. 이른바 동래로(東萊路) 또는 영남대로로 불리는 길이다. 1770년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은 그의 저작인 『도로고(道路考)』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간선도로를 6대로로 분류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을 기점으로 하며, 서북쪽의 의주로를 제1로로 명명한 후 시계 방향으로 경흥·평해·동래·제주·강화로에 각기 제2·3·4·5·6대로의 명칭을 부여하였다. 동래로는 의주로와 더불어 중국과 일본을 잇는 외교·군사·사신로로 중요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그 역할이 더욱 중시되었다. 동래로는 신원리까지 광주와 경계를 이루다가 다리내고개[月峴]를 넘는다. 서빙고진에서 한강을 건넌 동래로는 말죽거리[馬粥巨里]까지 강남대로로 계승되었다. 말죽거리는 1970년대까지도 이름을 날린 주막촌으로 전형적 가촌의 형태를 보여준다. 양재천 건너 계리는 포이동에 해당하고, 신원은 오늘날 서초구 신원동이다. 이곳에는 정자목으로 기능했을 법한 느티나무 거목 두 그루와 미륵당이 있다. 과거에 쉽게 볼 수 있었던 전통적 도로경관이 남아 있다. 신원은 경부고속도로 서쪽에 있었던 것 같다. 현대 지형도에 새원이라는 마을이 원지동에 표시되어 있다. 이 구간에서의 경부고속도로는 바로 이 동래로를 거의 그대로 따른 것이다.
19세기 말 과천에서 가장 큰 취락은 노량진에 형성되었고, 다음으로 읍내가 컸다. 취락은 대부분 충적지와 산사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면쪽으로 약간 위로 올라간 지점에 입지한다. 충적지를 경지로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홍수시 침수의 피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취락은 일조를 위해 남쪽을 향한다. 마을 앞으로는 충적지와 하천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산지가 바람을 막아준다. 여기에는 좀 더 세세한 원리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풍수 논리로 알려진 배산임수(背山臨水) 형국은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형성된다. 안양촌, 임곡, 세곡, 후동 등이 이러한 취락입지 원리를 따른 대표적 마을이다. 전근대 과천의 영역은 크게 양재천 유역과 안양천 유역으로 나뉜다.
안양천 유역에는 인덕원을 비록하여 삼현, 신천, 덕현, 군포천, 호계동, 안양촌, 금정리, 산본, 당리, 봉성리, 부곡동, 삼성동 등이 취락을 이루고 있다. 광주 곡사근천·전주리 쪽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안양천 본류이고, 광교산 북록에서 발원하여 인덕원, 삼현, 임곡마을로 흐르는 물줄기는 그 지류인 학의천이다. 안양천과 학의천이 만나는 합수점부터 수리산과 모락산 사면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진 충적지는 논이나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의 충적지는 대부분 범람원으로 구성되는데, 안양촌에서 민백마을까지 두 하천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들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들이 넓어 평촌(坪村)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대단위 주택지구와 상업·업무시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충적지는 원래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서 더욱 잘 형성된다. 충적지란 하천이 만든 퇴적지형의 일종으로, 하천의 곡류와 범람에 의해 형성된다. 충적지는 지표면이 평평하고 일반적으로 형성되는 범위도 넓기 때문에 선사시대로부터 취락지 또는 경작지로 가장 선호된 지형이다. 이 점에서 충적지는 아마 인간과 가장 친근한 지형일 것이다.
안양천 유역은 현재 안양시에 속한다. 양재천 유역은 관악산과 모락산이 가깝게 위치하여 안양천 유역보다는 좁고 길게 형성되었고, 그 안의 충적지도 좁고 긴 하곡을 따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안양천 유역보다 취락 분포가 더 조밀한 것은 과천 읍치가 이곳에 위치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과천 읍내 역시 뒤로 관악산을 배경으로 삼고 전면에 양재천을 두른 모습이 다른 일반 취락입지와 비슷하다. 양재천 연안의 충적지 역시 거의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취락들은 주로 사면과의 접촉부에 형성되었다. 가일, 냉정, 갈현동, 문원동, 세곡 등의 마을은 양재천과 안양천의 분수계가 되는 구릉지 상에 입지하여 지금도 충적지에 입지한 취락들보다 규모가 작다. 충적지 가운데 고도가 약간 높은 자연제방 부분은 우기에도 침수되는 경우가 적어 일찍부터 교통로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자연제방이 아니더라도 충적지는 별도의 공사 없이 도로로 이용되었다. 오늘날 하천 연안에 인공적으로 제방을 높게 쌓고 그 위를 도로로 이용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도로입지와 같다. 서울의 올림픽로·노들길·강변북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뚝방길로 불리는 길도 거의 대부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 같이 1890년대에 하천 연안의 충적지는 농경지의 핵심을 이루었고, 일부는 도로로 이용되고 있었다.
 
3) 20세기 초의 경관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1:50,000 지형도 중에서는 군포장·경성·독도·수원도엽이 원 과천의 영역을 포섭한다. 반복하지만 과천은 1914년 시흥군에 병합되면서 과천·신동·남·서이·북면으로 재편된다. 이후 신동면과 북면은 서울로 편입되고, 남면과 서이면은 각각 군포시와 안양시로 독립한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과천면이 오늘날 과천시를 이루고, 이는 곧 조선시대의 현내면이다. 우선 일제강점기 지형도는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 비해 정확도가 크게 신장되었다. 관악산의 해발고도가 629.1m로 수정되었고 등고선도 20m 간격으로 정밀해졌다. 범례도 훨씬 다양해지고 체계화됨으로써 토지이용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890년대에 비해 1910년대에 달라진 토지이용의 변화 가운데, 간선도로가 제주로에서 수원로로 바뀌고 철도가 새로 등장한 점, 하천 연안에 제방이 축조되면서 충적지의 활용도가 높아진 점, 취락이 좀 더 확산된 점 등이 눈에 띠는 특징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처음으로 제10대로로 등장한 수원로는 화성 신도시 건설과 정조의 능행에 따라 신작로(新作路)로 정비된 길이다. 일제는 1914년 「도로규칙」을 반포하면서 도로의 등급을 1~4등으로 구분하는데, 1등 도로는 폭이 약 7m에 달해 우마차가 교행하는 데에 전혀 불편이 없으며, 오늘날 왕복 2차선 도로와 비슷한 규모였다. 1등 도로로 정비된 수원로는 8·15광복 후 국도 1호선의 자격을 부여받는다.『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서 제주로가 ‘도로’로 표시되고 수원로는 ‘연로’로 표시되었던 것은 1907년부터 실시된 치도사업 결과 수원로의 도로 등급이 더 높아진 결과이다. 수원로 연변에는 경부선 철도가 나란히 놓였고 안양리에 안양역이 설치되었다. 역의 설치는 오늘날 안양역 앞의 ‘안양1번지’ 번화가가 조성된 계기이다.
수원로가 1등 도로로 정비되고 경부선 철도와 안양역이 설치되면서 1890년대의 한적한 안양촌(安陽村)은 과천 읍내보다는 못하지만 역을 중심으로 주변에서 제법 큰 시가지를 형성하고 안양리(安養里)가 되었다. 1910년대에는 양지촌(陽地村)이 양지동(陽至洞)으로, 군포천은 군포장으로, 호계동은 호계리로, 카타가나로 ‘タ-マン(담안)’이라고 적혀 있는 장내촌은 장내동으로 한자 이름이 바뀌었으며, 때로는 점촌이 초막동으로, 구리점막이 당정리로, 덕현마을이 도양리(道陽里)로 변경된 사례처럼 언뜻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후두미·신촌·산본리·부곡리·금정리·봉성리·당리 등 이름이 유지된 마을은 앞의 마을들과 함께 안양천 유역의 주요 취락으로 생각된다. 한편, 주점리, 내촌, 신기동, 명학동, 곡란, 도장리, 괴곡, 평금정 등의 마을이 새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새로 등장한 마을 중에는 일부 신생 취락도 있겠지만 대부분 1890년대 지형도에서 누락된 마을로 생각된다. 수리산에서 발원하는 안양천 지류 연안 역시 대부분 경지나 취락 그리고 도로로 이용된다. 이 외 완사면에도 약간의 경지가 조성되었지만 규모가 크지 않다. 면소재지인 당리를 중심으로 하나의 취락군이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안양역의 하행역이 하나 설치되었고 역 앞에는 우체국도 있다. 지금의 군포역이다.평촌은 당시 서이면 소속으로 호계리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관악산 남록에 비산마을로는 시흥 신림동에서 고갯길이 내려오고, 이 길은 호계리로 이어진 후 수원로에 접속한다.
『해동지도』에 그려진 수유현길이 이것이다. 외비산마을 서쪽에는 임곡마을과 안양리가 있고, 동쪽으로는 수촌과 마분리, 일동리, 간촌, 부림촌 등의 마을이 산자락을 돌아가며 입지하고 그 끝에 인덕원이 위치한다. 안양리에서 인덕원까지 이어지는 마을을 따라 놓인 작은 도로는 1970년대에 노면에 잡석을 깐 매커덤도(사리도)로 정비된 후 지금은 국가지원지방도 57번으로 지정되었다. 이 길은 의왕시로 연장되어 학현 너머 성남까지 이어진다. 학현길은 안양천 유역과 탄천 유역 간 가장 중요한 소통로를 담당하면서 여전히 지역 내 간선로로 기능하고 있다.인덕원 남쪽에는 민백리, 갈산, 당산미, 도양리, 군포장, 귀인, 신촌, 신기 등의 마을이 호계리를 중심으로 터를 잡았다. 호계리를 포함하여 이 지역에 위치한 취락들은 해발고도 100m 미만의 구릉지 안쪽에서 고라실(골안마을) 형태로 입지하여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지금 이 구릉지 위로 지나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는 그 전후에 산본나들목과 평촌나들목이 설치되어 있다.
1910년대에도 노량진이 여전히 과천 최고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지만 과천읍내 역시 1890년대보다 훨신 커졌다. 읍내에는 관문동·교동 등의 유교식 지명이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읍내 남쪽에 갈현은 일대의 주막촌으로 유명했다. 홍촌이나 자경마을은 새로 이름을 올린 마을이고, 가일, 냉정, 별왕, 막계, 궁촌, 평촌, 능내 등은 이전부터 있던 마을이다. 반면 1890년대 지형도에 보이던 세곡마을과 사구막동은 이름이 없다. 옥녀봉 아래 광명리(光明里)는 1890년대에 한자 이름이 광명(廣明)이었다. 능내 위에는 삼포동이 있었는데, 1910년대에는 석포·하이포·상삼포 세 마을로 분산되어 표시되었다. 양재천 건너 우면산 아래에 후동은 후곡으로 달리 표기되었고, 그 동쪽에 가락동, 내곡, 임암 등의 마을이 새로 표시되었다. 과천면 북쪽에는 신동면과 북면이 있다. 동작동과 우면산 방향으로 뻗은 관악산의 지맥으로 인해 신동면과 북면은 평지가 발달하지 못했다. 전자의 지맥은 봉천리·상도리를 거쳐 흑석리와 노량진리를 지나 한강까지 이어져 기반암이 하안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북동-남서 방향으로 흐르던 한강은 이 기반암에 부딪치면서 유로 방향을 거의 직각으로 꺾는다. 흑석리에서 노량진까지는 강안이 절벽을 이룬다. 올림픽도로를 건설할 때 이곳에 노량대교를 건설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노량대교는 한강을 남북으로 건너는 다리가 아니다. 노량진에는 인천까지 송수하는 상수도 정화시설이 건설되었고, 철도역·한강철교·한강교가 부설되어 과천에서 가장 큰 시가지를 이루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근래까지 한강 이남의 강남·서초구와 영등포·양천구 사이를 잇는 동서 도로축이 발달하지 못한 것도 관악산 지맥 때문이다. 제주로 변에는 포촌, 동작리, 정감우, 이수동, 도두두, 동산촌, 승방평, 상·하성후 등의 취락이 분포한다. 승방평마을 서쪽에 중석광이 있다. 동작리에서 동쪽으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그중 강변길은 반포리를 지나 잠실리, 신사리로 이어지고 그 아랫길은 천촌리, 방배리, 갈명달리, 정곡동, 마산동, 도감리 등의 마을을 지나 말죽거리에서 동래로와 만난다. 두 동서 길 사이에 사복리, 명달리, 궁현, 서초리, 장선동, 매곡리, 원곡마을이 있다. 지금은 모두 서울에 편입되었다. 위 갈래 길 지점 부근 사복리에도 중석광이 표시되었다. 압구정리에서 반포리까지 한강의 남쪽 연안에는 길고 폭넓은 둔치(Point-Bar)가 형성되었다. 이 지형은 대체로 모래로 구성되는데, 1970년대부터 건설붐이 불면서 한강의 하상과 둔치는 모래와 골재의 공급지로 매우 중요했다. 잠실리 역시 1890년대 지형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뽕밭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마을 내에는 학교가 신설되었다.
 
4) 1970년대의 경관
현대 1:50,000 지형도 중에서 과천시는 안양도엽과 수원도엽에 걸쳐 있고, 원 과천까지 포함하면 서울도엽과 성동도엽이 더 필요하다. 이 글에 사용된 지형도는 1974년에 편집되고 1975년에 발행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옛 과천 땅의 북쪽 지역은 이미 서울로 편입되었고 안양은 시로 승격되었다. 남면과 과천면은 아직 시흥군 소속이다. 1970년대 지형도는 도엽의 판형이 바뀌어 일제강점기 지형도와 한눈에 구분된다. 일제강점기 지형도는 동서 15분, 남북 10분 간격으로 구획하였기 때문에 도엽의 크기가 남북 방향보다 동서 방향으로 길었으나, 현대 지형도는 도엽당 경도와 위도의 간격을 각기 15분씩 구획하여 남북 방향이 더 길다. 이는 지구의 경도를 모두 360。로 나누고 위도를 180。로 구획한 데서 오는 차이이다. 현재의 판형은 1963년부터 시작된다. 1970년대 토지이용의 특징 중 하나는 과천면의 일부 중심 지역과 안양시, 남면 일대를 제외하면 그 주변 지역이 모두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된 점이다. 이 상황에서 안양동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크게 성장하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논밭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양천 변에 제방을 쌓고 연안의 충적지를 주택, 공장, 도로, 상업시설 등으로 개발한 것이다. 초기에는 금성방직·동양나이롱·태평방직·현대양행 등의 섬유업체가 안양의 공업화를 주도하였고, 락희화학·세광유지·한국제지 등의 중화학공업의 유입도 적잖게 눈에 띤다. 1975년 안양시의 인구는 13만 5,000명이었다. 시가지는 주로 안양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동안보다 산세가 낮고 사면도 완만하여 개발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시가지 안에 도로망은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취락이든 도로든 고도 60m 등고선을 거의 넘지 않는다. 남면이나 평촌 일대의 취락은 규모가 커졌을 뿐 그 분포 패턴은 일제강점기의 연장선 상에 있다. 학의천과 안양천 사이의 넓은 충적지 평촌은 거의 대부분 논으로 이용된다. 경지정리가 아직 진행되지 않았고, 합류점 부근에는 여전히 습지가 남아 있다. 이때까지 평촌들에는 제방·수로·저수지·양배수장 등의 수리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평촌들의 해발고도는 30m 가량이고 주변에 입지한 취락들의 고도는 대체로 40m가 넘는다.
집중호우가 내리더라도 물에 잠기는 마을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인덕원동보다 평촌동의 규모가 더 크다.안양의 시가지가 커지고 교통량이 많아지면서 국도 1호선이 포장되었다. 이 길이 조선시대의 수원로 본선이며, 일제강점기에 1등 도로로 개수된 신작로이다. 지금은 동편에 새로 놓인 길때문에 안양시내 도로로 전락하였다. 안양 중심부에서 이 길의 노폭은 왕복 4차선이다. 그 도로 동편에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없던 포장길이 생겼다. 이 길은 후일 계속 확장되면서 국도 1호선으로 지정된다. 서울시 금천구 일대에서 국도 1호선은 따로 ‘시흥대로’로 불리며, 일부 구간에서는 노폭이 왕복 12차선에 달한다. 주요 취락을 따라서 도로망도 정비되었다. 관악산 남록의 임곡동에서 부림동까지, 그리고 모락산 서록의 군포장(구장터)에서 인덕원동까지 난 비포장도로가 전통시대부터 과천 남부의 주요 교통로였다. 후자의 노선이 곧 제주로이다. 제주로는 1970년대에 395번 지방도로였고, 후일 국도 47호선이 된다. 이 길은 남서쪽 부곡리로 연장되는데 군포장부터 부곡까지 포장되었다. 이 밖에 평촌동에서 안양동까지 평촌들을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는 길이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표시되어 있는 소로를 직선화한 것이다. 결국 평촌들에는 외곽을 두르는 순환로와 남북 관통도로가 놓인 형상이다. 이러한 도로망의 정비는 마치 1990년대에 벌어진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예고하는 것 같다. 과천면 일대는 안양 지역에 비하면 아직 휴면 상태에 있다. 치소가 있던 관문동 일대에 약간의 시가지가 조성되었으나 아직 도시 경관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395번 지방도로가 정비되어 반듯해졌지만 도로 변까지 논이 인접해 있다. 읍내 동쪽 광명마을에 과천저수지가 새로 축조된 것이 큰 변화라면 변화이다. 1970년대까지 과천면 일대에서는 농업을 핵심 산업으로 여기고 계속 수리시설을 확충해 왔음이 분명하다. 양재천 연안의 제방 축조가 안양천보다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도 아직 경지정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영농의 기계화도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서울로 편입된 신동면 일대에 시가지가 들어선 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태령길도 서울시역까지만 포장되었다. 1975년 과천면 인구는 1만 2,000명으로 안양시의 1/10도 채 안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갈현동 부근에 가루개·옥탑골·제비울 등의 마을과 읍내의 동북쪽으로 산골말·사거리·광창·중촌 등의 마을이 새로 나타났지만, 전반적인 취락의 분포는 20세기 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마을 이름이 한글로 많이 바뀌었다. 양재천 하류부의 양재동·말죽거리·서초동 일대도 우선 도로망만 갖추었을 뿐 아직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과천의 중심지였던 과천면 일대는 여전히 목가적 풍경을 자아낸다.
 
5) 2000년대의 경관
정부과천청사가 1982년에 이전해 오면서 과천 땅에 일대 혁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미 1978년에 수립된 과천 신행정도시 개발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청사가 이전하고 4년이 지난 1986년에 과천은 시가 된다. 1914년 시흥군에 병합된 이후 72년 만에 기초 지방행정단체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2004년 현재 과천은 2만 4,528가구에 인구가 6만 8,333명이고, 주민들의 89%가 3차산업에, 9%가 2차산업에, 그리고 2%가 1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들의 80%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35.86㎢의 관할면적 가운데 임야가 23㎢로 64%를 차지하고, 밭·대지·논·기타·공공용지가 순서대로 2.9~2.2㎢에 걸쳐 있다. 국내에서는 공장용지가 없는 유일한 시일 것으로 생각된다. 여전히 임야의 비중이 높지만 2000년대 과천의 토지이용 상황은 1970년대와 비교하면 도로망이 크게 확충된 것이 눈에 금방 들어온다. 애초의 제주로는 국도 47호선이 되어 시내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 도로와 평행하게 난 도로들과 직교하는 도로들이 시가지 경관을 주도한다. 서울쪽으로 난 국도 47호선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과천의 역내 간선도로로 이용이 많았던 길이다. 외곽에는 과천터널이 뚫려 의왕-봉담간 고속화도로와 접속하고, 동북쪽으로는 동래로를 근간으로 한 경부고속도로가 확장된 모습을 보인다. 남태령로가 포장된 것은 물론이고 도로가 확장되면서 직선화 공사도 더불어 진행되었다. 남태령으로는 지하철 4호선도 통과한다.
주암동 일대의 양재천 본류는 제방이 완비되었고 주변은 아직 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서울과 가깝고 고속도로 등으로 쉽게 연결되는 입지조건에 맞춰 화훼농업이 매우 활발한 곳이다. 광창마을과 하삼포마을 사이에는 서울경마공원이 커다랗게 자리를 잡았다. 원래 이곳은 1970년대 지형도에 잘 나타나듯이 완사면과 충적지를 터전으로 농사를 짓던 땅이었다. 1988년에 완공되었고 올림픽을 치른 후 이듬해에 경마장으로 개장하였다. 경마가 도박의 일종이라는 이미지를 상쇄시키기 위하여 경마장 부지에는 각종 휴식공간과 마사박물관 등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공원화하였다. 1970년대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한 과천저수지 주변으로는 서울대공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랜드 등이 들어섰다. 이들은 차례대로 1984, 1986, 1989년에 개장하였다. 과천에 있으면서 경마공원과 더불어 위락시설들의 이름에 ‘서울’이 붙어 있다. 과천은 지역전화번호도 서울과 같은 02번이다. 이들이 유치되면서 막계동과 주암동 일대에는 도로망이 크게 증설되었을 뿐 아니라 외부 지역과의 연계를 위한 지역간 간선도로망을 건설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과천시는 중앙·갈현·별양·부림·과천·문원동 등 모두 6개의 동으로 구성되는데, 별양동과 부림동은 관할구역이 시가지 안에 국한되어 있고 나머지 동은 모두 시가지를 조금씩 걸치고 있다. 동별 인구는 큰 차이가 없지만 시가지 안에 있는 2개 동의 인구가 가장 많다. 관악산 자락과 만나는 시가지 끝에는 종합청사·시청·중앙선거관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기술표준원 등의 관공서가 모여 있으며 반대편 시가지 외곽은 주공아파트를 비롯하여 대단위 주택단지로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중앙부에 교육시설과 각종 상업·위락·공원시설이 밀집해 있다. 이 중심 시가지는 1970년대 지형도에서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일제강점기 지형도에서 뿐만 아니라 1970년대까지도 국도 47호선과 노변에 일렬로 늘어선 취락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논밭으로 이용되던 곳이 정부기관과 대규모 위락시설이 계획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이름만 남아 있는 형상이다. 오늘날 과천은 전국에서 인구나 관할면적에서 가장 작은 지방자치단체에 속한다. 그러나 재정자립도가 가장 높고 시 외곽에 관악·우면·청계산 등이 쾌적한 자연경관을 제공함에 따라 매번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순위의 수위를 장식한다. 일제와 중앙정부의 정책논리에 따라 옛 땅을 주변 시군에 넘겨주게 되었지만 다행히 그 핵심부는 간직하게 되었고, 이로써 과천의 전통과 고유의 지역성을 정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갖추어 놓았다. 토지이용의 변천사는 곧 지역과 땅의 역사이면서 지역문화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살기 좋은 도시, 경치가 수려한 도시, 문화공간이 풍부한 도시, 행정중심도시 과천에 아직도 남아 있는 땅은 많다. 신행정도시가 충청북도에 마련되는 시점에서 과천은 또 다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과천 시민 중에서도 당연히 신행정도시 정책을 반대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행정기능이 이전하더라도 땅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땅까지 이전할리 만무하다. 그리고 지금 자라고 있는 과천 시민의 어린 자녀들도 바로 이 땅 위에서 계속 발붙이고 살게 될 것이다. 어떻든지 남은 과제는 남아 있는 땅을, 또는 활발하게 이용 중인 땅을 앞으로 어떻게 가꾸는가이다.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과천시지에서 발췌
제1권 관악산과 청계천이 펼쳐놓은 터전
제1편 자연·인문환경
제1절 토지이용의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