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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2)

안양똑딱이 2017. 3. 2. 14:58

안양의 역사와 각 동 지명유래(2)


■수푸루지(林谷洞, 林川) <비산1동>
비산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 ?∼1644)이 그의 부친인 심간(沈諫. 1560∼1624. 청풍군수 역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그 뒤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박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수푸루지(林谷洞)’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푸루지는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 정상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샘모루(泉隅) <비산2동>
삼호아파트 및 희성촌과 임곡아파트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에 시흥시 능곡동 뒤일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 한 사람이 분가해서 살다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이 마을에 정착했으나 크게 번성하지 못해 5호의 작은 취락을 이루다가 그 중 2호가 외지로 떠났고, 현재는 3호가 남아있다. 샘모루란 마을명은 구름울(雲谷洞) 초입 산 모퉁이에 샘물이 있는데, 그 주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안날미(內飛山) <비산3동>
안양종합운동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내 비산리(果川郡 上西面 內 飛山里)라칭했다가, 1914년에 내비산리와 외비산리를 통합, 비산리로 통칭 되자 자연취락으로 전락되었다. 이곳에 처음 세거한 성씨는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덕수 장씨, 문화 류씨, 보성 오씨 등이 살아와 현재는 전주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비산동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날미라 칭하고 있는데,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동쪽 지역은 웃말(또는 음짓말), 서남 쪽지역은 아랫말(또는 양짓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태해 안양종합운동장 북쪽 류덕옥(柳德玉1653 - 1711 안악군수 역임)묘소 위에 있는 노송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위해 산신제를 지내다가 외지인이 많이 입주하자 1970년대 말부 터 제(祭)를 지내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류덕옥의 묘를 비롯하여 유탁 (1686- ?, 문과급제), 장언방(병조참판 역임) 등의 묘가 있다.
 
■박날미(外飛山) <비산3동>
삼호아파트 서북쪽에 있는 매곡동과 수푸루지 등의 제 지역을 통칭해 일컫는 말로, 비산동 골짜기 밖에 위치해 있어 박날미(外飛山)라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라 불렀다.
 
■마장골(梅谷洞) <비산3동>
구름울과 안날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에는 구름울에 속해 마장골을 웃말, 구름울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했다. 이 마을은 샘머루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들이 분가를 하면서 형성되었고, 그 후 청주 한씨 등이 세거하기 시작해 광복직전에는 30호가 있었다. 그 후 관청 자리에 1978년 비산국민학교(비산동 315)가 건립되고,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화남아파트(1986), 호성빌라(1986), 삼호빌라(1989), 두산빌라(1989) 등의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장골 이란 조선시대 관가에서 사용하던 말(馬)을 이곳에서 사육했기 때문인데 후대에 내려 오면서 다음과 같은 전설로 인해 매곡동(梅谷洞)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조선조 중엽, 마장골에 사는 어느 농군의 아낙네가 갓난 아이를 풀밭에 뉘여 놀게 하고 자신은 김을 매고 있는데, 매가 갓난아이를 채어 날아갔다고 한다. 아이를 잃은 아낙네는 그 날로 몸져 눕게 되었는데, 그 후 이 마을 나무꾼이 이곳에서 나무를 하려고 산을 오르려는 순간 커다란 매가 공중을 빙빙 돌기 시작하자 주위를 살핀 이 나무꾼은 갓난 아이가 있는 곳을 확인한 다음 곧 마을로 내려와 마음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자, 이 소문이 널리 퍼져 임금님까지 알게 되어 급기야는 어전회의(御前會議)까지 열리게 되었는데, 대신들이 이는 좋지 않은 징조이므로 퇴치해야 한다고 하여 어명을 받은 원님이 포졸과 함께 현지에 도달했으나 보금자리만 있을 뿐 갓난 아이와 매는 온데간데 자취가 없어졌다. 이상하게 여긴 원님은 갓난 아이가 필경 독수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철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후부터 이 마을에는 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며, 마을이름도 매곡동(梅谷洞)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마장골에는 흥국사(비산3동 306-12)와 약수암(비산3동 292-1) 등의 사찰이 있고, 마을에서는 구름울, 수푸루지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 월 2일 평화보육원 동쪽에 있는 당봉(또는 매봉)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구름울(雲谷洞) <비산3동>
삼호아파트와 안양시 제1정수장(위치 비산동 산 142)사이에 있으며, 마 을의 지세가 흡사 구름에 둘러 쌓인 것 같다 하여 구름울 (雲谷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보통 삼호아파트 안동네라 칭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샘머루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들이 분가를 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현재도 안동 권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름울은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33호가 있었다가, 마을 앞에 삼호아파트가 들어선 후 1986년에 영진빌라를 비롯하여 1989년에 현대빌라, 선영빌라, 산정빌라 등의 다세대 주택이 건립되었다. 마을에서는 마장골, 수푸루지 주민들과 함께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또는 매봉)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7월 2일과 10월 2일에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다가, 1980년대부터 음력 10월 2일에만 지내고 있다.
 
 ■달안이(達安洞) <달안동>
이 마을은 1944년 박흥식(朴興植1903년생)씨가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 주식회사 (현 대농단지)를 인수한 후,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할 만큼(1945년 광복으로 중단) 지역이 넓어,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다 하여, 삿갓들 (笠坪) 또는 다라니(達安洞)이라 불렀는데, 일명 섬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달안이는 허허벌판이라 겨울이면 추워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라 하여, 농경지 외에 민가가 없었다가 1940년대 초에 의지할 곳 없는 외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취락이 처음 형성될 때에는 문화 유씨, 진주 강씨 등 모두 12호가 있었고, 이 후에도 이곳이 절대농지 지역이라 민가의 신축이 안돼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달안이 일대가 평촌신도시 구역에 편입되자 1989년에 폐동 되었다. 달안이에는 예로부터, 안양은 금소반이요 달안동은 오씨의 천년 도읍지이다. 안양금소반 오달안동천지지(安養金小盤 吳達安洞千年之地)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가운데말(中村) <관양1동>
조선시대 대궐안의 식사와 왕명(王命)의 전달, 수문(守門) 및 청소를 맡아 보던 곳을 내시부(內侍府)라 칭하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내시라 불렀다.
내시는 4품관 이하는 다른 문무관(文武官)과 같이 계급이 올라가고, 3품 이상은 왕의 지시로 올라 갈 만큼 권세가 당당해 사회 신분상 중인에 속했다.
과천 지역의 내시는 인덕원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다가 이들이 수(壽)를 다해 죽으면 오늘 날의 공원묘지처럼 내시묘원(內侍墓園)을 조성해 예장을 치뤘다. 가운데말, 즉 중촌(中村)은 내시(中人)가 죽어 묻히는 곳이란 뜻인데, 실제로 최근까지 이 마을 곳곳에 내시 무덤이 있었다가 주변 환경변화로 모두 이장, 또는 화장된 사례가 있다. 즉 효성다세대 주택(관양동 356)에 4기 와, 관양동 산 65-1 속칭 내시땅에도 1기가 있었다가 1970년대 말 내시 후손이 화장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어떤 내시 묘 앞에 있는 묘비명에는 「내시 김공 지묘」라 쓰인 비석도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말은 김해 김씨, 나주 나씨, 평양 조씨, 안동 김씨등의 세거지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까지만 해도 20여호 남짓한 촌락이었으나, 1978년 안양 7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택지로 변모되면서 남광 1차 아파트(농경지), 동산빌라(안동 김씨 소유), 뉴한신빌라(안동 김씨 소유 임야) 등이 들어섰고, 1973년에는 시제가 실시되면서 관양1동사무소가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뺌말, 말무덤이 주민들과 함께 해 마다 음력10월 1일 뺌말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골안(谷內) <관양1동>
 뺌말(秀村)에 속했던 마을로 뺌말 서북쪽에 있다. 작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골안(谷內)이라 칭하며,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가 3호가 있었다. 그 후 1978년 안양7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와 연립 주택, 다세대주택 등이 들어섰다.
 
■동편(東便) <관양1동>
샌말(間村)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 곳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조선중기에 전주 이씨 익양군파인데, 현재(1991) 동편의 57가구 중 30여 가구가 전주 이씨일만큼 전주 이씨가 크게 번성했다. 후손 중에 이면훈(李冕薰,작 고, 전매청장 역임), 이서구(李書九1923 .대림콘크리트 상임고문)가 있다. 관양1동 28통에 속한 동편마을은 서남지역을 아랫말, 동북지역을 웃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인데다가 수도물도 안들어오는 도시속의 농촌이다.
 
■말무덤이(馬賁洞) <관양1동>
뺌막(秀村)과 가운데말(中村)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마장골 (현 매곡동)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이곳에 매장했다고 하여, 말무덤이 (馬音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큰 무덤이 있는 곳이라하여 말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현 관양중학교 아래에서 말에게 편자했던 쇠 조각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 촌로들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무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해 김씨, 나주 정씨, 위씨 등이 오래 살아온 말무덤이 마을이 오늘날처럼 크게 번창되기는 1978년에 시작된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다. 이후 1982년 현대식 건물이 간간히 신축되다가, 1985년에 이르러 농경지 (논)이었던 곳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선데 이어, 야산이었던 곳에 아리랑 아파트와 남광 2차아파트가, 밭과 논이었던 곳에 태광아파트가 각각 신축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또 밭과 임야였던 관양동 538 일대는 1948년 관양국민학교가 세워졌는데 이는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동시에, 이 학교 校名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이 일대를 관양동(冠陽洞)으로 명명 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1977년에는 포도밭이었던 관양동 산 90-3에는 관양중학교가 세워져, 한낱 말의 매장지에 불과했던 불모지가 오늘날에는 교육의 요람지로 크게 탈바꿈 되었다. 마을에서는 뺌말, 가운데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뺌말 뒤에 있는 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 뺌말 지역이라는 연유로 196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망령골(亡靈谷) <관양1동>
망령골 고개주변에 있다. 본래 동편에 속한 마을로 청주 한씨 등의 세거지이며, 민가 7호의 작은 취락이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나무를 팔고 과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이 소복을 하고 나타나 하룻밤을 유숙하며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하는말이 관악산 바위 틈에 아이가 있으니 가보시오 라고 한마디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이 일러준대로 현장에 가보니 과연 바위 틈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 데려다 정성껏 기르니, 후에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라는 것이다. 망령골이란 망령(亡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났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일설에는 어느 여인이 이곳에서 3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기도했다고 하여 망령골(亡靈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부림말 (富林洞) <관양1동>
가운데말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남평 문씨와 밀양 박씨가 배판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부 자가 많이 산다고하여 부림말 (富林洞)이라 칭한다. 부림말은 비산동- 인덕원간의 도로확장후 대도, 한미, 골드, 남광, 삼광, 원주 등의 연립 및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관양우체국 옆에 있던 박우물과 신 장로우물, 부림우물(윗우물)에서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제(井祭)를 지내다가, 우물 주변에 민가가 건립되면서 샘물이 끊겨 폐정되자, 1988년 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뺌말(秀村) <관양1동>
말무덤이 서편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로 알려지고 있다. 경상도 김해에서 과거를 보러왔던 김해 김씨 금영군파(金寧君派)의 유생 한분이 과거를 본 뒤 귀향하다 인덕원 쯤에 이르러 관악산을 바라보니 서북쪽 언덕의 지세가 완만하고 남향으로 살기 좋은 곳임을 간파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상주 김씨, 연안 차씨가 세거해 이들 세 성씨를 뺌말의 삼대성씨(三大姓氏) 라 일컫는다. 뺌말(秀村)이란 취락명은, 마을 내에 뺑대쑥(준말로 뺑쑥 이라함)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뺑말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지금의 지명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관악산 줄기 나즈막한 봉우리에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관악산산신제(冠岳山 山神祭)를 올린다. 산신제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산신제를 주관할 당주(堂主)를 선정하는 일이다. 당주는 몸가짐이 바르고 집에 상을 당한는 등 부정타지 않은 사람중에서 선정된다.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지날 때까지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며, 대문앞에 진흙(또는 황토)을 발라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예전에는 말무덤이, 가운데말과 함께 지내다가 부림말 등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뺌말 주민들만 지낸다
 
■샌말(間村) <관양1동>
동편과 부림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샌말 (間村)이라 부른다. 전주 이씨, 보성 오씨, 경주 이씨, 광주 이씨의 세거지로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룬 샌말은 안양일대에서는 오지에 속하며, 인근의 마을이 하나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도시화 추세로 변모되어 가고 있으나, 이 마을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에는 중종조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류계장(柳秀獐1435-1515), 이의준(李義駿 황해도 관찰사), 유영(柳寧1507-1583, 전주판관 역임), 오병선(吳炳善1904-1979, 만안.안양.관양국교장역임)의 묘가 있다
 
소능골(小陵谷) <관양1동>
본래 샛말에 속했던 마을로, 샛말에 살던 보성 오씨 후손들의 분가로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샛말과 동편 사이에 위치해 있는 소능골은 5 호 남짓한 작은 취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능골 아래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소능골 이라 칭하는데, 이곳에 숙종 때 문종가로 이름이 높았던 吳文瑞의 묘가 있었다가 1985년 충남 조치원으로 천묘하였다.
 
■오촌말(吳村洞) <관양1동>
샌말 북쪽에 있다. 이곳에 최초로 산 사람은 조선 숙종때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오익성(吳益瑞자는 龍佰, 호는 三山散人)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그의 후손인 보성 오씨가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져 오씨의 마을이란 뜻으로 오촌말 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그가 생존시에 암각한 삼산동천(三山洞天) 이란 바위가 있다.
 
■신흥마을(新興洞) <관양2동>
인덕원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관양2동의 9통.10통.11통.12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1972년 안양읍 관내의 천변(川邊)에 난립되어 있던 주택을 정비하면서, 하천을 매립하여 철거민들에게 집단 이주시켰다. 그 후부터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흥마을이라 칭하고 있는 데, 마을 내에는 강남빌라, 그린파크빌라, 럭키빌라, 삼우빌라, 삼인주택 등이 다세대 주택이 있다.
 
■인덕원(仁德院) <관양2동>
이 마을은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록 거세(去勢) 된 몸이지만 환관이라 하여 궁중을 출입하여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분으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에게 덕화를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했다가, 공용(公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仁德院)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 인덕원은 조선 초기부터 이미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사 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때의 일기인 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 가있다. 정유(1597) 4월 초 3일 조 (계해)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민,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하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 경기관찰사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용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인덕원은 정조의 수원 능행로(陵幸路)로도 유명하다. 즉 정조는 정조 13년 (1789) 10월 5일 양주 배봉산에 있는 묘(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부왕(사도세자)의 영여와 함께 과천행궁에서 경박한 후 이튿날(10월 6일) 인덕원을 지나 수원을 향했다.
그 후 정조 14년(1790) 2월 29일, 정조 15년(1791) 1월 16일등, 정조 16년(1792) 1월 24일, 정조 17년(1793) 1 월 12일, 정조 18년(1794) 1월 14일등 모두 6차에 걸쳐 인덕원을 왕래 하였는데, 특히 제5차 행차 때인 1793년 1월 12일에는 인덕원들을 지날때 인근에 있던 부노(父老)들을 접견하고 그 노고를 위로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정조의 인덕원 행차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행로를 시흥-안양-수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곳은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불과 33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 차에 걸친 도시계획등으로 북쪽으로는 과천시, 동쪽으로는 의왕시, 남쪽으로는 군포시, 서쪽으로는 안양시 진입에 이르는 사통팔달(四通八達)로 교통이 발달되자 급성장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상서면(현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제일 부촌이었다가 광복직전부터 빈촌으로 전락된 후 1970년대부터 다시 부촌으로 부상해 관양동 관내에서는 땅 값이 제일 비싸다고 한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수원방향으로 약 200m 지점 도로변에 현감 이태응의 송덕비가 있다. 이 비는 본래 조종내 개울둑에 있었다가 마을내로 수차 옮겨지고, 다시 1984년 도시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보존되고 있다. 이 비석이 인덕원에 소재한 것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첫째는 현감 이태응이 인덕원지방에 선정을 베풀어 이곳 주민들이 그 은공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세웠을 경우, 두번째는 조선시대 과천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와 과천국교 사이에 있는 역대 과천현감의 선정비군과 함께 있었다가 후대에 주민에 의해 이곳으로 옮겼을 경우 등을 추론할 수가 있는데, 현재로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소재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현감 이태응은 조선 고종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다가 고종 3년 (1866) 12월 5일 과천 현감에 제수를 받아 그 해 12월 18일에 부임하여 13개월간 재직하다가 고종 5년(1868) 1월 29일 송화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송덕비는 과천현감에서 물러난후 14개월만인 고종 6년(1869) 3월 에 세워졌다. 인덕원 마을에는 신성중(관양동 188-2, 1969설립), 신성고(188-2), 관양여 중(제7지구 34블럭, 1982 설립), 인덕원국교(관양동 210, 1987설립)등의 교육기관이 소재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중앙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내다가 한국전쟁 직후부터 인근에 주택을 지으면서 수원(水源)이 딸리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민배기(禿朴只, 民伯洞) <평촌동>
삼태기처럼 오목하게 생긴 마을로 벌말과 갈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 과천.인덕원.갈미 등은 관아와 院이 있어 지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데 반해, 이곳은 좀 외진 곳이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행려자들이 날이 저물면 민박을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민박이(民伯洞)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민배기(民伯洞)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는 독박지(禿朴只)로 기술되어 잇는데, 이 는 민배기를 한자화한 표기라고 한다. 즉 독(禿) 은 석독(繹讀)하여 민- 으로 읽어 민배기 로 나타낸 것이다. 괴산 음씨가 처음으로 세거한 민배기마을은 동쪽 지역을 등너머라 칭하고, 그 외 지역은 민배기로 통칭된다. 또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 그 서쪽지역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었다
 
■벌말(坪村) <평촌동>
인덕원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없는 허허 벌판에 자리잡고 있어 벌말 (坪村)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이 또 생겨 두 벌말 또는 이평촌(二坪村)이 라 했으며, 이를 줄여 이동리라 칭하였다. 예전에는 한강에서 과천-안양에 이르는 모든 취락 중 가장컸던 벌말은 조선 초기에 괴산 음씨가 최초로 살아 음촌 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그 후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해 왔다. 벌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울-과천-군포-남양간 도로를 개설한 후 1969년에 동일방직(평촌동 1)을 비롯하여, 오뚜기식품(평촌동 160), 1982년에 가나안제과(평촌동 81-4)등의 공장이 건립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지역이 넓어 동북쪽 지역(동일방직 주변)은 웃말 또는 상평촌(上坪村), 서남쪽지역(오뚜기식품, 삼화왕관 주변)은 아랫말 또는 하평촌(下坪村)이라 각각 불렀으며, 이 마을이름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동명칭이 평촌동으로, 이어 신도시 개발지구 명칭도 이 마을명을 취했다. 장차 안양 시가지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미래의 땅이다.
 
■귀인(貴仁) <귀인동>
신말(新村)동쪽으로, 온양 정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이 마을에 들려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 때(1789)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을 편찬한 호구총수에 의하면 귀인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동, 귀인2동으로 분동해 안양에서는 가장 번창했던 마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귀인강습소 가 있었다가 광복 직후에 이르러 학 생의 감소와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70여호의 대촌인 귀인마을은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내의 몇 안되는 마을 중의 하나로, 1990년 4월에는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곳은 마을 뒷산으로(해발60m)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크기는 175*110*20-30cm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성혈(性穴)이 7개가 있다. 학술적 자료로 이용하기 위하여 명지대학교에 이전, 복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곳에는 지석묘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기도 하였다. 동 주거지는 지석묘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떨어진 산의 능선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주거지로 확인 조사된 예는 불과 3-4곳에 불과했는데, 귀인마을에서 발견된 백제초기 주거지는 아궁이, 온돌시설인 三列의 구들골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엌곁에 마련된 저장고와 기둥 구멍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원형의 가상복원이 가능하므로 백제의 주거문화를 헤아릴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마을의 풍요와 무해를 기원 하는 정제(井祭)를 지냈다.
 
■금성마을 (金星村) <호계1동>
일제강점기만 해도 고구마.콩.감자 등이나 심던 박토로, 한때는 일본인 들이 소나무, 잣나무 등을 가꾸던 묘포가 있었을 만큼 불모지였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럭키금성 그룹에서 무주택 사원을 위한 새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 입주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덕고개(德峴)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홍안주유소 일 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 (德峴)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軍浦場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인데, 우물을 여러 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 아래 라 부르고 있다. 나주 오씨와 경주김씨, 남평 문씨, 함흥 노씨 등의 오랜 세거지인 이 곳은 동쪽 지역(흥안주유소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 (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 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 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 말이라 각각 불렀다. <대한그리스도인회 보>(1895)에 의하면 이 마을의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덕고개교회 는 1908년까지 감리교회였다가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교회 (현 군포시 군포2동)로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현재 건국 빌라가 들어섬)에서 소 머리를 나호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水源)이 끊긴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 되는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祭)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축말 (房築洞)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하서면(果川郡 下西面)의 관아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시흥군 서이면(始興郡 西二面)의 면사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제언조(堤壙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 제언조(堤壙條)에 호게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 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 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新其洞)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 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은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는데, 안양6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택지로 조성되자 미주아파트, 강남3차 아파트등이 들어섰다.
 
■안말(內村) <호계2동>
방죽말 북쪽에 있다. 숲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안말 이라 칭하는 데, 일설에는 골짜기 안에 위치해 있어 안말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 영응대군(永廣大君1434-1467, 세종대왕의 8남, 시호는 경호(敬孝)후손들이 배판한 이래 함평이씨. 경주 최씨 등이 세거해 왔다. 안양 6 지구 구획정리사업(1974-1979)으로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마을 내에 현대아파트.경남아파트 등이 있다.
 
■구군포(舊軍浦) <호계3동>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천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 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구군포(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군포(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란 지명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원행정례(1789) 도로교량조道路橋梁條에 군포<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군포(軍浦)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국역을 말하기도 하고, 정병을 돕는 조정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유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군포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군포로 되었으며, 군포(軍飽)가 군포(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 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사무소, 호계파출소,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파출소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에서 군웅제(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파출소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신말(新村) <신촌동>
평촌등의 자연취락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풍양 조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마을 서북쪽인 호계동과 경계지점에는 안양남국교의 전신인 흥안국교가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다가 1958년 경에 갈미로 이전했다. 귀인 남쪽에 위치한 신말은 1990년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4기의 지석묘가 발굴조사 되었다.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되었고 호수는 30여호였다.
 
갈미(葛山) <갈산동>
당살미 동쪽에 위치한 마을.의왕시 내손동 갈미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본래 의왕시 갈미와 함께 광주군 의곡면 손리(廣州郡 儀谷面 蓀里)에 속한 마을이었데,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을 연계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동쪽 지역은 의왕 내손리(현 의왕시 내손동) 갈미가 되었고, 서쪽 지역은 서이면 이동리(현 안양시 평촌동)갈미로 되었다. 이곳은 정조가 부왕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능을 참배할 때 다니던 능행로(陵幸路)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과천-인덕원을 경우, 수원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분기점(分岐點)이었다. 철종 12년(1861) 김정호(金正浩) 가 제작한 대동여지전도에보면 당시 안양지방은 인덕원, 관악산, 갈미 등 불과 수 개의 지명만이 표기된것만 보아도, 조선시대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상당히 북적댔던 것으로 보인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 광주읍지에 이 곳에 원(院)과 주막(酒幕)이 있었다 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와 같이 갈미란 길(道)이「갈라지다」 (分岐)라는 동사의 첫음절 갈∼의 음차(音借)로 갈마(葛山)가 된 것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유씨 (劉氏)를 비롯하 여 전주 이씨(임영대군파)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갈미는 20여호의 작은 취락이나 예로부터, "갈미봉에 비들어 온다. 멍석 뚤뚤마러 세워라." 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는데 이는 모락산(募洛山) 연봉인 갈미봉에 구름이 끼면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는 속설 때문에 퍼진 얘기로 보인다. 주막과 원 등이 있어 북적대던 갈미 마을도 1990년 평촌신시가지 개발지구에 편입되어 폐동되었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당살미, 뒷말 주민들과 함께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당살미(堂山尾) <갈산동>
죽산 안씨의 세거지로, 갈미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만 해도 의왕시 내손동 갈미마을과 평촌동 갈미마을은 본래 한 마을로, 오손도손 함께 살아오면서 모락산 중턱에 당집(堂宇)을 짓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지냈는데, 당살미 (堂山尾)라는 마을명은 이 堂을 모신 모락산의 산세가 이곳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붙여졌다. 민가라고는 7호밖에 안되는 취락이나 대안중학교(1984년에 개교 평촌동 784), 대안여자중학교(1985년에 개교, 평촌동 824-3)등의 교육기관이 있고, 1990년에는 명지대에서 지석묘를 발굴했다. 이 지석묘는 대안여중에 서 남쪽으로 약 20m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신 시가지 건설지구에 자유공원 조성된 산의 끝자락이다.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된 당살미 마을은 1960년대 까지 뒷말, 갈미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뒷말(後村) <갈산동>
안양남초등학교 동북쪽에 있었다. 본래 갈미에 속했던 마을로, 죽산 안씨의 세거지였다. 갈미주막(葛山店)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뒷말 (後村)이라 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되어 5호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이전만 해도 당살미(堂山尾), 갈미(葛山)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