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이한성]안양 미륵불(彌勒佛) 어디로 갔을까?

안양똑딱이 2017. 3. 5. 17:41

[이한성]안양 미륵불(彌勒佛) 어디로 갔을까?

[이한성 교수의 옛절터 가는 길 - 54]안양 비봉산 ~ 삼성산 절길
부국안민(富國安民)의 꿈, 미륵불(彌勒佛) 어디로 갔을까?
[ CNB저널 제389-390호] / 등록일 : 2014.08.04 14:44:02
 
정조(正祖)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 현륭원(顯隆園)을 수원으로 옮긴 후 자주 원행(園幸)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남태령을 넘는 과천길을 택하였으나 시흥 방향으로 신작로를 뚫어 수원별로(水原別路)가 열리자 이 길을 이용하였다. 가장 장관이었던 원행길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가 환갑을 맞은 해인 1795년(정조 19년) 을묘년의 원행이었다.
 
이 때의 행차(幸次)길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로 기록되어 지금도 그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더욱이 요사이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청계천길에는 이 원행의 일부분을 타일에 반차도(班次圖)로 그려 보여 주고 있다.
 
오늘은 안양의 절길을 찾아가면서 그 때 행렬이 지나갔던 안양 미륵당참(彌勒堂站)이 궁금해진다. 행렬은 배다리(舟橋)로 한강을 건넌 후 시흥을 지나 석수역 앞(大博山 前坪), 안양예술공원 앞(念佛橋), 만안교(萬安橋)를 지나고 지금의 안양역 근처인 미륵당참을 거쳐 명학역(鳴鶴驛) 앞으로 지나갔다. 미륵당이라 하면 미륵불(彌勒佛)을 모신 당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어디에 있었으며 그 미륵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다행히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 염불암 편에 그 힌트가 있다. 안양사지(安養寺址)를 설명하면서, 절 서쪽 30여 정(町: 1町은 110m 정도) 안양역 앞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면서 석탑개(石塔蓋: 석탑 개석) 3개, 석감개(石龕蓋: 불상, 불구를 모시게 파낸 홈 덮개) 1개, 석미륵 1상(像), 석동자 1, 석종 1이 남아 있고 건물로는 미륵전 수간(數間)이 있으며 삼수(杉樹: 삼나무) 4그루, 자단향나무 2 그루가 옛절의 면모를 전하고 있다 했다.
 
그렇다 미륵당은 지금의 안양역 앞쪽에 있었던 것이다. 봉은본말사지를 기록한 안진호(安震湖) 법사는 비록 그 당시까지 밝혀진 문헌이나 발굴자료가 없어 미륵당이 있는 곳을 안양사지로 오해하였지만 미륵당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면 그 곳에 있던 석물들은 어찌 되었을까?
 
다행히 미륵불과 석탑 개석 3개는 의왕시 용화사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용화사 홈페이지를 보면 1943년 금강산에서 화응큰스님이 안양으로 와서 지금의 본백화점 자리에 용화사를 열었다 한다. 아마도 미륵당지(만안로 249, 버스터미널 자리) 옆에 절을 열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이 지역이 개발되자 1983년 절을 옮겼는데 그 때 미륵불과 석탑의 부재들도 옮겨졌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미륵불과 석탑 이외 석물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지금도 용화사 미륵전에 주불로 자리한 미륵불을 대하면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키가 4.3m나 되는 훤칠한 키로 을묘년 정조의 원행길은 물론 이 길로 지나간 조선의 역사를 모두 보셨을 것이다. 이 미륵불이 이 지역 랜드마크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은 안양역 앞이라 부르는 지명도 그 때는 미륵당참이었다. 또한 개석 3개만 남았던 고려 3층탑도 촌스럽기는 하지만 제 모습을 찾아 3층 석탑으로 용화사 정원에 서 있으니 그래도 미륵당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양역 앞 본백화점 길을 둘러보고 역전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온다. 안양이나 수원 가는 길에 보면 삼성산 남쪽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산을 수십 년 보아왔건만 한 번도 올라 보지 못해 궁금했었다. 산은 작아도 위치로 보아 비산동의 주산(主山)인 셈이다. 그 산에 있다는 망해암(望海庵)도 올라 이름 그대로 바다를 보고 싶었던 날이 오래 되었다.
 
마을버스 3번, 3-1번은 대림대학교 골목길로 들어가 종점 임곡주공아파트 앞에 내려 준다. 절 이름이 적혀 있는 안내판에 많은 절 이름이 적혀 있다. 아니 이 작은 산에 가히 불국토를 이루고 있구나. 망해암은 안내판에 1.8km를 알리고 있다. 길은 국가시설물 무선항공표지소로 가는 길이라 그런지 산길 구불구불 깔끔한 포장길이다. 차도 거의 없고 숲도 많아 쾌적하게 오를 수 있다.
 
 용화사서 새 생명 얻은 미륵불, 당시 정조의 원행길 굽어 봐
 
옛 자료에는 미륵봉이라 했는데 요즈음에는 비봉산(飛鳳山)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만장사와 보덕사를 지나 드디어 망해암(望海庵) 도착. 절로 내려서기 전 뒤 바위 서 있는 곳에 지어 놓은 ‘망해암 일몰관광대’부터 들려 본다. 아쉽게도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날씨 좋은 날 일몰은 아름다울 것 같다.
 
절 마당으로 내려간다. 아담하지만 앉은 자리가 탁 트인 절이다. 옛 기록과는 달리 사세도 많이 커져 있다. 사(寺)라 하지 않고 초심을 지켜 망해암이라, 암(庵)을 지키고 있는 하심(下心)이 길손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요즈음 옛 친구 찾아가듯 오래 전 갔던 고즈넉한 OO암에 갔다가 갑자기 울긋불긋 시멘트로 크게 불사하고 개명한 OO사를 만나면 옛 친구가 갑자기 출세하여 거드름피우는 듯 참담함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다.
 
망해암의 연혁은 분명치 않은데 봉은본말사지에도 ‘원효가 창건하였다 하나 증빙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적어도 고려 때부터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가장 빠른 유물로는 조선 성종 10년(1479년) 4월 조성한 미륵석불이 있다(石佛刻云: 成化十五年 四月二十五日造). 이 석불에 관해 봉은본말사지에는 이런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전언에 의하면 인조 때 인천 팔미도(八尾島)에서 표류하던 세미를 싣고 가던 배(上納穀船)가 이 석불의 인도를 받아 구호된 사실이 있다. 그 후로부터는 내사(內司: 궁중에서 쌀, 베 등을 관리하던 부서)에서 봄가을로 불공을 올리고 매달 백미 1석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망해암 미륵불께서 멀리 서해를 내려다보시다가 배가 표류하니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이 미륵불은 용화전에서 지긋이 서쪽을 바라보고 계신다. 필자가 찾아간 날 용화전에는 스님 한 분 가부좌하고 앉아 염불 삼매에 빠져 계신다. 슬그머니 그 옆에 앉아 56억 7천만년 뒤에 하생하여 긴한 말씀해 주실 미륵불(메시아)의 말씀 미리 귀동냥이라도 하고 싶건만 스님의 삼매경을 차마 깨울 수 없어 눈으로만 미륵불께 윙크를 보낸다.
 
망해암은 절은 작아도 왕실과는 유대가 있었던 것 같다. 전설의 이야기처럼 인조 11년(1633년) 조가(朝家: 왕실)에서 봄가을로 불공드리고 매월 공불미(供佛米) 1석을 하사하는 것을 정례화했다는 것이다. 또한 순조 3년(1803년)에는 순조의 할머니 혜경궁 홍씨가 암자를 중건하고 특히 수호(守護)했다는 것이다.
 
수호란 의미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국시로 삼아 불교를 천시(賤視)하다 보니 유생(儒生)들이 절에 난입하여 패악하는 일도 잦았고 심지어는 절의 기물을 파괴하거나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관가도 마찬가지여서 절에다 가혹한 수탈을 가하고 승려를 괴롭게 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이것을 막아 준 것이니 시주치고는 큰 시주였던 것이다.
 
암자 경내에는 몇 가지 둘러 볼 것들이 있다. 기록에는 두 분의 약사불이 있다는데 그 중 하나는 1921년 이응선이란 이가 금강산 불지암 숲에서 발견한 높이 1.1척(尺) 되는 자그마한 약사불이다. 삼성각 우측에 서 있는 작은 석불이 아마 이 석불인 것 같다. 감로천(甘露泉)으로 알려진 약수 한 잔 마시고 샘 앞쪽을 보면 작은 석불로 가려진 야트막한 굴이 있다. 원효굴(元曉窟)이다. 원효가 창건했다는 전설처럼 굴의 이름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또한 용화전 건물 뒤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바위가 깎여 서 있다. 그 곳에는 비밀스럽게 ‘佛’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석두(石斗)란 이가 새긴 것인데 비바람이 닿지 않는 곳이라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망해암 앞마당은 새로 만들어진 ‘관악산둘레길’에 포함되어 있다. 삼성각 아래 장독대 옆으로는 둘레길이 이어진다. 안양예술공원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염불암 옛터인 절터골을 찾아가려 한다. 망해암을 벗어나자 열쇠처럼 생긴 서울대 심볼마크에 33이라 쓴 경계석이 보인다. 서울대수목원의 경계가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안양역으로 빠지는 갈림길을 버리고 예술공원 방향 둘레길을 이어 간다. 관악천 약수터가 있다. 산신제단이란 글자를 새겨 표지석도 세워 놓았다. 약수를 주시는 산에 대한 경배(敬拜)의 마음이 읽혀진다.
 
세대가 젊어질수록 무엇인가 받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잊고 사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이 주는 고마움, 이 땅에 먼저 나서 살다 가고, 살고 있는 이들이 땀 흘려 마련한 유산에 대한 고마움… 이런 것들이 어찌 다 공짜겠는가.
 
비봉산(미륵봉) 망해암, 혜경궁 홍씨가 중건하고 수호
 
1.5km를 지나오니 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길에 닿는다. 안내판에는 관악역 1.8km, 망해암 1.5km, 삼막마을 50m를 알리고 옆으로는 현대적 조형물이 서 있다. 우측 삼막마을로 표시된 곳으로 50m를 옮겨 다리를 건넌다. 공원의 계곡은 깨끗하게 가꾸어져 있다. 다리 건넌 곳에서 좌로 50m 계곡을 끼고 내려오면 관악산둘레길이 이어지는데 둘레길을 따라 가는 방향이다. 이 길은 안양사와 명상의 숲으로 이어진다. 잠시 오르면 안양사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건너서 우회전, ‘명상의 숲’ 길로 방향을 잡는다.
 
명상의 숲은 계곡을 끼고 오르는 길이다. 약 500m 지난 지점 등산로에 반듯한 사각형 바위판이 놓여 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가도 관심 갖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있었을 탑의 기단석(基壇石)일 것이다. 눈여겨보면 사람들 발길에 닳아 둥그러진 기와편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절터가 가까워 온 것이다. 100m 쯤 위, 명상의 숲으로 이름 지어진 쉼터 공간이 나타난다. 등산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쉼터를 조성하였다. 편한 의자에 등 기대고 심호흡도 해 본다. 주변을 눈여겨보면 곳곳에 기와편이 숨어 있다. 오래전부터 절터 골로 불리던 곳이다.
 
과연 무슨 절이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는데 봉은본말사지 염불암편에 힌트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치러 남행하던 중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는데 구름 아래 능정(能正)이라는 노승이 있었다. 태조가 그와 뜻이 맞는지라 그가 앉았던 토굴에 암자를 세웠는데(이야기가 있는 길 16 참조) 그 이름을 안흥사(安興寺)라 했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안국흥민(安國興民)을 뜻한 것이었다. 다시 산 아래 한 절을 창건하여 안양사(安養寺)라 하고 7층 전탑을 세웠다 한다(동국여지승람 금천현조).
 
안흥사는 그 뒤 폐사되었다가 다시 중흥하여 염불암이 되었으며 산 동남쪽 기슭 현재의 염불암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 폐사된 염불암 터(구 안흥사 터)는 염불암 서쪽 5정(町 약 550m)에 있다고 했다. 이 기록을 더듬어 보면 이곳 명상의 숲은 염불암 터가 맞을 것이다. 안양(安養)이라는 도시의 지명이 유래한 근원은 이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절터골이라는 이름도 잊혀지고 명상의 숲이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안양(安養)은 불교에서 보면 극락세계(極樂世界) 즉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뜻하는 말이다. 안양시의 이름은 모름지기 안양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니 극락세계인 셈이다. 그러나 곰곰 살펴보면 안흥사(安興寺)의 의미가 안국흥민(安國興民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흥하게 함)이라 했으니 안양사 또한 안국양민(安國養民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키운다)을 뜻하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명상의 숲을 떠나 계곡길을 오른다. 주위에는 회양목(淮陽木)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서울 근교 여느 산에서는 군락을 보기 힘든 나무인데 관악 일명사지 오르는 길에서 보듯 혹시 절에서 키우던 나무의 자손들은 아닌가 모르겠다. 700m 올라 도착한 능선쉼터에는 바람이 시원하다. 길 안내판(삼 1-4)이 서 있다. 능선길 학우봉(옛 기록에는 鶴後峰)도 보이고 넘어가야 할 삼막고개 쪽 봉우리도 보인다. 잠시 고개 넘어 300m 지나 삼막고개에 도착한다.  이곳은 사거리로 삼성산 교통의 요지이다. 동으로는 올라야 할 국기봉(삼성산 최고봉)300m, 서로는 제2전망대(학우봉) 750m, 남으로는 염불암 300m, 북으로는 삼막사 450m를 알리고 있다.
 
가파른 나무층계를 타고 삼성산 최고봉으로 오른다. 고도 477m 암봉이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공군전우회가 세웠다고 쓰여 있다. 산은 낮아도 기상(氣相)은 단단하다. 흔히 남자들이 풀이 죽은 날에는 기상 좋은 바위산에 오를 일이다. 그 곳 기상을 몸에 받고 오면 뭔가 기(氣) 생긴다. 정상 주위에는 기와편이 많이 흩어져 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삼성산 상불암, 부처의 미소는 여전
 
내력을 아는 이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났고 기록도 찾을 수 없으니 그 연유가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이 땅 민속이나 절의 풍속으로 볼 때 그 곳에는 당(堂)집이 있었을 것이다. 추측해 보면 산신님과 칠성님 한 분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이제 삼성산 최고봉을 뒤로 하고 봉우리 뒤로 넘어간다. 봉우리를 감도는 좌측 길을 택하면 이내 사거리(삼-6, 국기봉 밑 사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측은 삼막사, 우측은 상불암, 앞길은 통신탑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도 많은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청자편도 눈에 띈다. 아마도 고려 때에도 이곳에 건물이 서 있었을 것이다. 터서리가 암자도 들어서기 마땅치 않으니 역시나 당집이 서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내리막길을 잡아 200m 아래 상불암으로 간다. 수십 년 전 필자가 젊었을 때 본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필자는 20살 되던 해 여름 이곳에 와서 열흘쯤 지낸 일이 있었다. 무슨 큰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시생도 아니었으니 여름 한 때 책 읽고 게으름 피우는 게 목적이었다. 그 날을 생각하며 반석굴 대웅전 부처님께 인사드린다. ‘안녕하셨습니까? 저 잘 살고 있습니다. 부디 남은 날도 편안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상불암을 뒤로 하고 하산길에 오른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좌측은 계곡길, 우측은 능선길이다. 어느 길을 택해도 결과는 같은데 편안히 능선길로 내려온다. 잠시 후 4거리에 닿는다. 앞길은 천인암, 우측은 안양, 좌측은 망월암으로 가는 길이다. 좌측 망월암길을 택한다. 계곡길을 만나고 100m쯤 내려가면 좌측 샛길이 나타난다. 이 샛길의 끝에 망월암(望月庵)이 있다.
 
봉은본말사지 기록에 의하면 신미대사(信眉대사 조선 초 정치가 김수온의 형)가 태종 7년(1407년)에 삼성산 동서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땅의 힘을 누른 신미대사가 삼성산에 절을 창건하거나 증수하였으니 이 때 세워진 절 가운데 하나가 망월암이라 한다. 처음 이름은 망일암(望日庵)이었는데 언젠가 해가 달(月)로 바뀌어 망월암이 되었다.
 
어째 암자가 조용하다. 스님도 보살도 아무도 없다. 잠시 외출인가, 아니면 신도가 드물어 절을 비우고 떠난 것인가? 고즈넉한 절 마당을 지나 저 위에 앉은 극락전으로 오른다. 극락전은 이 절에 주 불당이다. 옛 건물은 한국전쟁 중에 불타고 근세에 세운 건물이 서 있다. 비어 있는 절 극락전으로 들어 간다. 조그만 아미타불이 좌우에 커다란 두 보살의 협시를 받으며 봉안되어 있다. 기록에 남겨진 그 아미타불 소상(塑像)인 듯하다.
 
기록에 남아 있던 불상, 탱화, 불경들은 모두 한국전쟁 중에 사라진 것 같다.
 
다만 극락전 앞에 3층탑이 서 있을 뿐이다. 봉은본말사지에는 조선 태종 때 조성한 것이라 하나 불상 전문가들은 고려 중기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수십 년 전 상불암에 머물던 때, 며칠은 이 절에서 머물렀던 기억이 새롭다. 부디 법등을 잘 이어가십시오.
 
망월암을 뒤로 하고 하산길에 나선다. 큰 계곡은 가뭄으로 메말랐다. 계곡길을 따라 안양쪽으로 내려간다. 간간히 길에 기와편과 자기편이 밟힌다. 이곳 근처에도 옛절터가 있으리라. 서울대수목원에 도착한다. 실험중인 식물보호를 위해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주말에는 하산로를 개방하여 힘든 우회산길을 지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인솔자를 따라 수목원으로 들어서니 좌측 산기슭에 청자도요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1987년 10월 발견된 곳인데 이듬해 등산객을 가장한 도굴꾼들이 모두 파헤쳤다. 이 땅에서 함께 살기 싫은 사람들 중 한 부류이다.
 
계곡길 따라 내려오면 안양예술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보아야 할 것은 바위에 새긴 마애종과 김중업 박물관이다. (이야기가 있는 길 16 참조) 김중업 박물관은 신라의 중초사, 고려의 안양사, 우리시대의 유유산업이 있던 유서 깊은 자리이다. 중초사 당간지주와 고려 3층탑이 있으며 안양사의 유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역사적 유적이 한 자리에 겹겹이 자리한 곳이니 ‘시간의 켜’가 고스란히 쌓인 것이다. 아 시간 위에 쌓인 시간이여.
 
 
교통편 - 안양역 앞 3,  3-1 마을버스~ 종점 임곡주공아파트 하차
 
걷기 코스 - 임곡주공아파트 ~ 망해암 ~ 관악천 약수 ~ 안양예술공원 길가 ~ 명상의 숲 ~ 능선쉼터(삼1-4) ~ 삼막고개(삼1-5) ~ 삼성산 깃대봉 ~ 국기봉 밑 사거리(삼-6) ~ 상불암 ~ 염불암 ~ 서울대 수목원 ~ 안양예술공원 ~ 김중업 박물관 ~ 관악역/안양역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글 출처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3889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