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조성현]수리산 최경환성지를 찾아 성인의 삶과 일대기를 조명하다

안양똑딱이 2016. 5. 2. 21:48
[조성현]수리산 최경환성지를 찾아 성인의 삶과 일대기를 조명하다

[04/15]

 

안양8경중 제5경인 수리산성지는 천주교 기해박해(1839)당시 교우촌이 있던 장소로 한국교회의 역사와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신부와 함께 목회활동을 했던 최양업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시스코, 1803~1839)성인의 묘가 병목안 수리산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최경환성지에는 최경환성인을 기리는 고택성당과 야외미사터, 묘소(동굴성모상과 가묘)가 있고 순례자들이 묵상하며 예수의 십자가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동산이 있다.

수리산성지가 있는 안양9동 병목안은 병의 목처럼 입구는 좁지만, 마을에 들어서면 골이 깊고 넓다하여 붙여진 자연지명이다. 조선시대에는 과천지방에 속해 있었고, 당시 ‘뒷뜸이’이라 불리던 수리산 골짜기에 혹독한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산수가 화려하고 아늑한 이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담배농사를 짓고 거주하던 터전으로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하여 소위‘담뱃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생겨서 ‘병목골’이라 불리던 수리산은 박해를 피하기 좋은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왔다. 박해시대 옛천주교인들이 외계와 단절된 피난처로 당시 은거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거주지터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최경환성인은 우리나라의 김대건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의 부친이다.

최경환신부는 조선조 헌종 3년인 1837년 7월 그의 일가족(아내 이성례마리아와 신학생 유학간 최양업을 제외한 어린아들 5명)과 함께 유교전통의 천주교신앙에 대한 사회적 냉대와 정부의 천주교박해를 피해 수리산 골짜기에 정착,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을 모아 (순교전 3년여 간)교우촌 신앙공동체 터전을 형성하며 천주교신앙 선교활동을 펼친다. 최경환신부는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토마스)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선교사로 한국에 최초 입국했던 모방신부(1803~1939)에게 신학생을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다. 최경환은 아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보낸 상태였고 그러던 중 1839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기해박해사건이 터진다.

하지만 그를 쫓던 발길은 깊은 산속에도 미쳐, 1839년 천주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하던 기해박해 당시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1839년 7월 31일 일곱 식구 모두 압송되면서, 파란만장한 최씨 일가의 비극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그의 집을 급습해온 포졸들은 부인 이성례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난 뒤 40여 가구 한명씩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공소회장인데다 아들(최양업)을 유학 보내 신학을 공부시키는 신학생의 아버지란 이유로 죄목을 추가하여 부인 이성례, 자식4명(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젓먹이(스테파노)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옥에 가두는 등 남달리 혹독한 고통의 형벌이 가한다.

배교하라는 모진 고문과 회유 속에서 신앙을 고수하며 모진 형벌을 받다가 기해박해가 일어났던 1839년 9월 12일 최경환성인은 그의 나이 34세 꽃다운 나이에 볼기매(곤장) 110대를 맞은 후휴증으로 그렇게 옥에서 장렬히 순교한다.

그리고 이듬해 1840년 1월 31일 그의 부인 이성례마리아는 용산 당고개에서 그녀의 나이 39세 때 참수된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다. 당시 망나니가 천주교인을 참수할 때는 녹슨 칼,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목을 베어 고통을 주면서 죽인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4형제는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들고 망나니를 찾아가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고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눈물겨운 부탁을 하니,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간청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부모의 순교로 고아가 된 4형제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는 가슴 찡한 일화가 심금을 울린다. 최경환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왕과 백성, 양반과 천민, 남존여비, 장유유서, 적서차별 등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심했던 유교 전통사회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냉대, 그리고 정부의 탄압과 박해 속에 남녀노소 귀천 없이 모두가 천주신앙 안에 하나 되어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끼리 절절한 사랑을 나누는 지상천국을 건설한 분이다.

최경환성인은 엄격한 신분사회에 살면서도 양반으로서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낮추어 가난하고 소외된 평민을 돌보며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균분이 실현된 참된 공동체를 구현하고자 노력한 카톨릭 신도이다.

순교자 최성인의 시신은 담배촌에 묻혔다가 양화진성당으로 옮겨졌으며, 담배촌 성역지는 2000년 순례지로 지정되면서 가묘와 함께 예수의 고행을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최성인의 유해(손가락뼈)를 모신 고택성당 맞은편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성인의 일부 유해(팔뼈를 모심)와 진토가 포함된 무덤인 가묘가 있다.

최경환성지는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와 신앙적 순교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 되어 전국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리산성지를 찾아 안양에 남긴 성인의 얼과 발자취 되돌아보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성인의 순교정신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

<주변을 연계한 볼거리>수리산(도립공원), 병목안시민공원, 안양8경(병목안 삼림욕장석탑, 안양예술공원 등)
<찾아오시는 길>대중교통
• 전철이나 기차는 안양역을 이용
• 중앙로 CGV 맞은편 시내버스(10,15, 15-2, 11-3) 석산삼거리(병목안 삼거리)에서 하차 도보 30분
자가용
• 서울→1번도로→중앙로→CGV에서 우회전→안양9동→석산삼거리(병목안 삼거리)
• 과천→47번 도로→인덕원→관악로→비산대교를 건너 컨벤션웨딩홀앞에서 우회전→CGV에서 좌회전 →안양3동→안양9동→석산삼거리(병목안 삼거리)

조성현/aknews@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