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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성원]안양역 연탄공장 있던 그때 그시절

안양똑딱이 2017. 3. 15. 15:48

[조성원]연탄역 연탄공장 있던 그때 그시절
(연탄)

그 시절은 계절 변화가 뚜렷하였고 한 겨울은 삼한사온이라 하여 삼일은 춥고 사일은 비교적 따뜻했다. 하지만 따뜻하다고 해서 지금의 날씨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중부지방의 한 겨울 추위가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가 꽤 많았다. 한 겨울은 먹는 식량도 식량이었지만 무사히 잘 넘기느냐는 추위를 어찌 견디느냐에 달려 있었다.
메리야스 내복에 벙어리장갑 ,토끼털 귀마개가 당연하였던 그 무렵에 돈이 있다는 사람들이 겨울나기로 겨우 장만을 한 것이 연탄이다. 없는 사람들한테는 불쏘시게 라는 게 정해져 있지 않고, 어디서든 땔 만한 걸 구하다 아궁이에 채워 넣다. 그 바람에 수리산은 그 많던 떡갈나무, 굴참나무는 모두 베어지고 벌거숭이산이 되고 말았다.
19 개 구멍이 난 구공탄. 원래는 십구공탄이라 해야 맞다. 왜 19 개 구멍인가 하는 의문은 훗날 풀렸다. 구멍은 산소통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구멍이 많으면 화력이 세지고 금방 타고 만다. 19개가 8시간 정도 버티는 데는 적절하였던 것이다.
수원 가는 신작로에서는 검은 흙덩이를 쌓아놓고 진흙하고 지푸라기를 같이 버무려 구멍 난 틀에 채워 넣고 나무망치로 때려서 꽉 눌러 채운 뒤 쑥 외형 틀을 뽑아서 연탄을 만드는 연탄 집이 있었다.
그 집은 기차로 석탄을 싣고 와 안양역 옆에 공장에서 찍어대던 삼천리나 연합, 화성에 비해 화력은 뒤떨어졌지만, 싼 덕분으로 새끼줄로 생선 꾸러미 매달듯 꼬아 맨 연탄을 낱개로도 들고 다녔다. 뉴스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는 뉴스가 끊이질 않았으며 우리 동네에서도 문 칸 방에 살던 사람이 연탄 리어카로 실려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만약을 대비하여 방문 틈을 샅샅이 확인 하였는데 가난해도 그 당시 갓 나오기 시작한 가스방이라는 누런 테이프는 꽤 긴요했으며 사고가 나면 동치미 국물부터 들이켜야 한다는 말은 상식으로 통했다. 한 겨울철 시간대를 잘못 맞추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접 붙은 연탄을 집게로 떼어내 화력 좋은 놈은 밑으로 보내는 교체를 하였다.
밤새 피운 사랑의 연정에서 버림받은 조강지처 같은 하얀 재는 한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빙판길이 다되어버린 북쪽 길 한 모퉁이에 밑거름이 되어 만인의 사랑이 되었다. 가끔 내가 종사하는 원자력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구공탄을 적절히 써먹는다.
이를테면 핵연료는 분말 파우다를 잘 혼합해서 탄알같이 생긴 펠렛에 채워서 고온의 소결체로에서 숯 만들 듯 굽는다. 그렇게 구워낸 탄알크기의 펠렛을 길게 늘여 차곡차곡 40단정도 쌓은 것이 핵 연료봉이라는 것인데 이 핵 연료봉을 옆으로 연결해 다발을 만들어 일명 핵연료 집합체를 만든다.
옛날에 토분으로 만든 원통형 화덕에 구공탄을 집어넣듯 격자 형태로 된 원자로 노심에 집합체를 집어넣는다. 화덕이 원자로 노심인 것이고 구공탄이 바로 핵 연료봉 집합체인 셈이다. 구공탄도 너무 화력이 좋으면 아래층과 위층에 놓인 구공탄의 구멍을 꼭 안 맞추어 바람구멍을 막는 효과로 화력을 떨어트리듯이 노심 가운데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지나면 외곽으로 돌리고 외곽 것은 안쪽으로 옮기고 하는 것들이 발전소에서도 이루어진다.
구공탄 불길을 약하게 하는 방법에는 구멍 덜 맞추는 것 말고도 헝겊으로 바람구멍 쥐어틀어 막는 방법이 또 있다. 원자로에도 그런 역할을 하는 제어봉이라는 것하고 감속재란 것이 있는데 핵설계 때부터 고려가 되는 사항들로서 고도의 기술력이다.
구공탄에 불길 안내판이라고 할까 두꺼비집이 있듯이 발전소하면 원형 돔으로 몇 겹의 콘크리트로 싼 구조를 연상할 것인데 그 격리차폐체가 두꺼비집의 개념하고 유사한 안전판으로 파악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원자력은 안전장치를 갖추어 핵분열을 일으켜 고온고압의 과열증기를 만들어 터빈을 돌려 발전을 얻는다.
원자력이나 연탄이나 연료소모를 줄이고 최대한 효율을 높이려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똑같다. 소위 말하는 경제성이다. 연탄 소모를 줄이기 위해 한나절은 건너뛰거나 바람구멍을 억지로 막았던 그 시절에 우리 집은 연탄값이 비싸지기 전인 11월 중순경 미리 연탄을 300 장 들여놓고 이어서 1큰 드럼통을 구해 공동우물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200포기 김장을 하였다. 겨울나기 준비를 하는 것이다.
김장하는 날은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 동네사람들이 다 모이는 작은 경사 날로 막걸리에 시루떡에 동태찌게를 먹는 날이었다. 그런데 연탄은 아끼고 아껴서 한겨울이 다 지나고 장마 진 여름철까지 남아 새는 헛간 속에 스며든 빗줄기에 녹아난 연탄더미로 주변은 늘 지저분했다.
결국 부서진 탄 더미를 모아서 연탄 찍는 사람한테 도로 갖다 주었다. 철저히 아끼는 습성은 그때나 세월 다 지난 지금이나 여전한 나의 엄마다. 하지만 엄마는 요즘은 여실히 셈도 느리고 하얀 연탄재 같이 몸의 열기마저 시들해져 한 여름에도 따뜻한 아랫목만 찾는다. 얼음장같이 차지 찬 소금 절인 배추를 씻어대던 팽팽하던 엄마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