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안양똑딱이 2017. 3. 17. 15:04

[조성원]마음의 고향, 기억속의 안양
수필 집 문을 열며/ 마음의 고향

시골에는 폐교가 많다. 가르칠 아이들이 없다는 것인데 정말 시골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게임방에 PC방 노래방 만화방 쯤 갖춘 소읍은 나와야 학원도 보이고 아이들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그렇게 불러대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동요를 요즘은 더 이상 찾지들 않는 것도 같다.
내 어릴 적은 응원가가 바닥이 나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고향의 정서는 결국 고향을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였을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동요의 끝머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구절이 새삼스럽다.
그래도 내 세대는 떠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득하지 않은가 한다. 이 나라 산천이 괄목할 정도로 달라진 것은 내 젊을 적이기도 한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육칠 십 년대 그 무렵이다. 아닌 말 출세한다고 다들 시골을 빠져나와 객지 노상에서 툭하면 하던 소리가 돈 벌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허튼 소리였다.
도심의 단칸방도 집은 집인데 진정한 의미의 집은 정든 시골집을 말한다. 차츰 그 말은 늙으면 시골로 가겠다는 말로 바뀌었다. 세간이 늘고 자식도 낳아 어쩌지도 못할 행색이기도 한 타향살이 신세. 다 객지생활이니 그 모두가 타향이라 할 것이지만 그래도 타향살이라는 표현은 그냥 눌러 앉기로 작정을 해 더는 어쩌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며 신세 한탄 하는 타령조 말이다.
그쯤엔 타향도 정 들면 고향이라고도 누군가는 위로의 노래를 불렀다. 고복수의 노래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청춘만 늙고’ 라는 애처로운 가사가 실감난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 라는 노래는 또 어떠한가. ‘나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로 끝나는 이 노래는 한 늙은 흑인 노예가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잊지 못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심정을 그린 노래이다.
마음은 있어도 떠나지 못하는 한탄의 심정이 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목 매인 신세는 아닌지 모르겠다. 나도 한때는 때가 되면 당연 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 하였다. 하지만 예전의 소박한 어느 신념은 아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의 안양하고 그 시절의 안양은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다. 어디고 그렇다 할 것이겠지만 수도권이라 칭하는 곳들은 특히 더 심하다.
포도밭 무성한 안양은 그야말로 가난한 촌 동네였다. 벌터란 곳은 수리산 물이 쏟아지는 냇가였으며 이 물을 마신 평촌은 끝도 없는 논이었다. 어느 날 과천으로 향하는 비산리 다리가 끊어져 등교를 못한 적도 있으며 솔방울을 따고 송충이를 잡으러 수리산을 오른 적도 많았는데 지금 벌터와 평촌은 산본아파트와 신도시가 들어서 아주 딴 도시가 되었으며 수리산은 그곳을 지키는 여우대신 그사이 군포, 안양, 의왕, 안산 사람들을 맞아들여 산림욕장으로 변하였다.
2차선 1번 국도가 밖으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였던 안양은 개나리 피는 봄날 박대통령이 수원에 모심으러 가는 때 모두들 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나마 관악산 물줄기 맞은 유원지가 있어 우리는 여름철 서울 사람들 구경을 하고 포도를 내다 팔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것이 먼지 폴폴 날리는 신작로란 큰 길이었다.
지금에 안양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는 그 시절 만해도 산의 날짐승도 거들떠보지도 않은 허허로운 길이다. 하얀 눈 나리는 날 허기진 울음을 토하다 지친 수리산 여우가 소골안을 지나 크게 뚫린 신작로를 건너 동구 밖을 맴돌 그 무렵은 어김없는 섣달그믐이었다. 개들은 컹컹대고 닭장의 닭들은 호들갑을 떨었으며 이에 주인은 몽둥이를 조심스레 들었다.
세밑 설레는 밤 하얀 눈썹 달고 한 살 더 먹던 그 날은 까치보다 일찍 일어나 겨우 차지가 된 형 옷을 입고 새신 신고 하루 만에 열 살도 더 먹는다. 술 취한 풍각쟁이 날라리 피리소리에 맞춰 집집이 노니는 ‘복덩이 놀이’ 잔치엔 안주상 나르는 가난한 아낙의 얼굴에도 비로소 웃음꽃이 퍼졌다.
벌건 술 취한 사내 뒷모습으로 한 해가 저무는 때 군불 지핀 아궁이는 모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라 배고픔을 달랬다. 연이 날고 썰매를 타고 딱지치기에 구슬놀이, 고추밭을 넘나들며 칼싸움을 하는 동구 밖 철모른 아이들. 손은 트고 콧물은 줄줄 흘렀지만 희망소리는 겨울 내내 끊이지를 않았다.
내게 이제 그러한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움만 남아있다. 얼마 전 나와 2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니다가 서울로 떠났던 K라는 분이 다시 내려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 분에게 이곳은 고향도 아니고 또 발붙일 어떤 터전이 마련된 곳도 아니다. 나이 들어 정 주고 받고 살던 곳이 늘 생각나고 그립기도 하여 그냥 내려오기로 하였다는 그의 말에 나는 깊게 공감하였다.
어차피 옛 그대로 존재하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결국 고향은 그리움이고 마음의 피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시골로 간다는 소리를 숫하게 들어왔지만 나는 이 말을 정작 온정신에 들어 본 적은 거의 없다. 약아야 살고 재빨라야 하고 비굴해지기도 해야 실속을 차리는 세파에 허덕이는 때 자연 떠오르는 것은 온순한 시절의 풋풋한 인정과 애틋한 정감이 아니겠는가. 고향은 바로 그런 아늑한 정감이다.
나는 돈을 벌어서 정작 시골로 향하였다는 사람을 근자에 본적이 없다. 이 또한 묘한 고향이 갖는 여운이다. 가난한 마음으로서 비로소 알고 얻는 것이 고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은 그 누구도 갈 고향이 없으며 모두 고향을 떠나버린 것이거나 아예 버린 것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고향을 말할 때 눈물지으며 고향을 떠났다고 흔하게 말을 한다.
나 역시도 타향살이 수십 년에 고향을 생각하면 그렇게 애틋하게 가꾸었던 곳도 아닌데 깊은 숨을 쉬게 되고 눈물이 난다. 이는 나이 들어 더는 갈 곳도 마음 주고 살 그리운 곳이 없어서일지 모른다. 수구초심이라 하던가. 그 시절 동지 그믐밤 차디찬 동치미 술술 풀어 마신 매서운 바람이 생각나는 겨울 밤. 나는 서성이는 겨울 곁에서 그 시절 수리산의 여우가 그리 바라보았을 허기진 고향으로 가는 길을 겨우 보았을 뿐이다.(하나로 남은 그리움으로 그 시절을 그리며)
 
조성원의 수필 '나 어릴적' 초고에서 발췌. 이 글을 쓴 조성원(어릴적 이름 조형곤) 수필가는 1957년 안양에서 태어난 안양초교 38회, 안양중학교 23회 졸업생으로, 저하고 동창으로 오랜 기간 대덕 모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지요. 블랙죠라는 이름을 글을 쓰다가 수필가로 등단해 현재는 한국수필가협회와 수필문학가협회에서 이사직으로 적극적인 문단 활동을 해오며 제2회 문학저널 창작문학상과 수필문학사가 주관한 제1회 소운문학상을 수상도 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수필집인 ‘빈 가슴에 머무는 바람 1&2’이외에도 ‘송사리 떼의 다른 느낌’, ‘작게 사는 행복이지만’, '‘오후 다섯 시 반’ 등 7권의 수필집을 내놓었으며 ‘2천 년 로마 이야기’와 ‘스페인 이야기’ 등 여행 에세이집도 발표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