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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

안양똑딱이 2018. 8. 12. 13:32

[정진원]한직골에서 안양까지(1) [한직골-인덕원]

 

도시 벌레가 농촌 풀잎을 야금야금 잠식(蠶食)하듯이 도시화(urbanization)가 이루어졌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거센 파도 아래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홈리스(homeless)가 된 느낌이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어디 변화되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지금 어딜 가나 어리벙벙해질 뿐이다. 옛날 산골 촌놈 서울 구경의 충격이 도처에 있게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길가에 동네가 있게 마련이다. 한직골과 안양 사이에는 ‘한직골-양지편-벌모루-성고개-진터-인덕원-(동편)-부림말-간뎃말-(샛말)-말무데미-뺌말-(안날뫼)-구리고개-(운곡)-수푸르지-안양’이 굵은 동아줄에 큰 매듭들로 맺혀있듯이 있었다. 마을마다 아이디(ID)가 붙어있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자타에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들은 장소(場所, place)로서의 역사문화적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든 것이 이제는 장소의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장소 자체가 사라져서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은 무장소(無場所, placelessness)가 되어 버렸다. 아나로그 동네가 디지털 번지로 박제화 되었다.  

지금 판교에서 청계산 하우고개를, 지금 용인 수지에서 광교산 고분재를 넘거나 해서 내려오면 한직골이란 동네가 있었다. 안양에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해서 하루 두세 번 왕래할 때 터미널이 한직골이었다. 덕장초등학교가 북쪽 언덕으로 올려다 보이고, 사이에 청계 개울이 있어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맑은 물이면 이름을 청계(淸溪)라 했을까? 지금은 서울외곽도로, 과천-의왕간 도로 등이 얼기설기 고가로 지나는 곳이 되어서 보기에도 어지럽기 그지없다.

청계 개울이 구렁굴 앞에서 넓게 퍼져 흐르는 여울을 징검다리로 건너면 양지편 앞길이 된다. 남향받이 동네여서 양지편이라고 했을 것이다.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촌이었으며, 마을 가운데 꽤 큰 규모의 기와집과 마을 공동우물이 있었다. 한참 후에 양지편 언덕 마루에 덕장교회가 세워졌다. 그곳에 포일리 이장 댁이 있어서 6ㆍ25 전쟁 후에 구호물자를 나눠주거나,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거나 하게 되면 이 동네를 가야만 했었다.

양지편에서 느린 산비탈 끝을 돌아서면 벌모루 동네가 보인다. 네다섯 채의 집이 있었고, 마을 가운데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정자는 없었지만 그 나무를 정자나무라 불렀다. 거기서 북쪽으로 오솔길을 한참 올라가면 덕장골이었는데, 지금은 서울구치소가 들어와 동네가 흔적조차 없이 되어버렸다. 무재봉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와 덕장골을 거쳐 흐르는 실개천이 벌머루에서 학의천에 합류한다. 그곳을 우리들은 벌머루 개울이라 하였고, 여름철이면 그곳에서 물장구를 치며 미역을 감았었다.

한직골에서 떠난 버스가 양지편에 서고, 다음 정류장은 벌머루 끝 초가집 대문 앞이었다. 그 집 울 안에 거무죽죽한 큰 나무를 넘겨다보면서 수수깡울을 돌아 조금 나가면 성고개 앞이 된다. 옛날 무슨 성(城)이 있었기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리라. 이 마을은 길에서 조금 떨어져 언덕 숲속에 숨어있듯이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그 속에 어떤 집들이 있는지 궁금해 한 적도 있었다. 성고개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보면 안쪽으로 임이 마을이 건너다보였다.      

성고개 앞을 지나서 약간 오르막길을 가면서 오른쪽 언덕을 진터라고 하였다. 옛날에 진을 쳤던 곳이란 뜻이리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과수원이 있었고, 과수원 주인집인지, 큰 집과 그것에 딸린 작은 집이 있었다. 진터 앞을 지나면서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오른쪽 남향받이로 꽤 넓은 포도밭이 있었고, 그 반대편 길 건너로는 참나무 숲이 있었는데, 그곳에 후에 신성중ㆍ고등학교가 세워졌고, 나중에 그 학교는 안양시내로 이전했으며, 지금 그곳은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옛날 과천(果川)은 한때나마 서울(한양)의 관문이었다. 과천에 ‘관문리(官門里)’가 있는데, 그것이 옛날 과천군의 관문(官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괜찮은 지명이지만, 한양의 관문이란 뜻이라면 관문(關門)이 맞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울이 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양 남쪽 사람들이 인덕원을 거쳐 과천으로 들어오고, 남태령을 넘어 지금의 사당동을 거쳐 동재기(동작)나루나 노량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했을 것이다. 또는 과천 삼거리에서 지금 양재동(옛날 말죽거리)으로 나가 새말(신사동)나루나 압구정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기도 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양재역에 이르매, 신하들이 급히 죽을 쑤어 바치니 왕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는 데서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옛날 내 할아버지께서는 가을철 모과를 따서 마차에 싣고, 과천-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가서 팔고 오셨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옛날 과천은 한양 남쪽 강남의 유명 고을이었다. 문화 도시였으며, 교통의 요지였다. 일찍이 1912년 과천보통학교가 세워져서 내 선친과 숙부님들이 모두 그 학교를 졸업했으며, 숙부 한 분은 과천보통학교를 마치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해서 졸업 후 화성군(지금의 의왕시, 화성시)에서 초등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렇던 과천이 지금처럼 정부 부처가 들어오고, 아파트단지가 되기 전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시골 읍내의 초라하면서도 순박한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대로라기보다는 안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침체, 퇴보해서 지방의 한촌(閑村)으로 남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관악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안온한 동네였다. 지금 과천에 별양동(別陽洞)이란 지명이 있는데, 그곳은 본래 ‘베레이’인데, 볕이 잘 드는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과천이 신도시 안양에 눌려서 한적한 시골 동네로 처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안양이 이른바 ‘경부발전축’의 서울 근교 거점이 되면서부터일 것이다. 국토를 종단한 1번국도(목포-신의주)가 안양을 지나가게 되고, 철도가 그곳을 통과하게 되면서 안양은 졸지에 과천을 누르고 근대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내 어릴 적 과천은 이미 늙어버린 구읍이었고, 안양은 청년기에 든 신흥도시였었다.

관악산 남태령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면 왼쪽 우면산 밑으로 뒷골이란 동네가 있었고, 삼거리에서 지금의 양재동(말죽거리)으로 나가는 길이 갈라지게 되었고, 길가에 선바위(입암) 마을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관악산 기슭에 향교말이 있고, 길가에 새술막이 있었다.

지금 서울대공원이 된 지역에는 과천저수지가 있어서, 청계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둬두고 있었다. 청계산은 토산(土山)이어서 그런지 그 산을 흘러내리는 개울이 특별히 맑았었던 것 같다. 청계산 서쪽 과천저수지 일대를 막계동(莫溪洞)이라 부르는데, ‘막계’는 ‘맑(은)내’의 어색한 한역일 것이다.  

길가 새술막 안쪽으로 남양 홍씨 집거촌이라는 홍촌(洪村)이 있었고, 조금 내려와 길 건너쪽으로 구리안 마을이 있었다. 조금 남쪽으로 찬우물이란 동네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흔한 지명이다. 안양에도 냉천동이 있는데, 같은 뜻의 지명이다. 그 동네 길가에 큰 배밭이 있었고, 배밭을 오른쪽에 두고 들어가면 가루개(갈현리) 마을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제비울, 가는골(세곡) 마을, 그 사이에 샛말이 있었다.

지금 과천-의왕간 도로 변에 세워진 제비울미술관이 그 제비울 마을터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찬우물 아래로 가일이란 마을이 있었고, 서편으로 벌말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벌에 있는 동네였다. 지금 무슨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찬우물에서 가일을 거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부림말이었다.   


 

한직골에서 안양까지(2) [인덕원-말무데미] 
 
인덕원은 옛날에도 사거리였다. 길섶에는 망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질경이가 발에 밟혀 납작하게 눌어붙어 있었던 소박한 시골 사거리였다. 남쪽 개울 건너 쪽으로는 벌말이란 동네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동네를 포함해서 안양까지 이어진 벌 전체는 넓은 논 지대였는데, 나중에 평촌지구로 개발되어 지금 평촌신도시가 되었다. 인덕원에서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다리를 건너서 조금 나가면 과천에서 나오는 길을 만나게 되고, 그 삼거리 안쪽에 만들어진 동네가 부림말이었다. 

부림말은 안양이라는 도시로 나가는 중간 기착지였다. 안양-과천 선에서 한직골 선이 분기하는 당시 교통의 요지가 부림말이었던 것이다. 전에는 버스가 안양-과천 사이만 왕래했기 때문에 부림말까지 걸어 나와서 버스를 이용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버스정류소는 부림말 길가에 있는 대장간이 붙어있는 집 앞이었다. 겨울철이면 그 대장간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곤 했었다.

그 대장간의 녹슨 양철 칸막이의 틈새로 과천 쪽 찬우물에서 올라오는 버스 불빛을 기다리곤 했었다. 가끔 그곳에서 낫이고, 호미를 단김에 쇠망치로 쳐서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괴탄과 화덕과 모루, 풀무 등이 참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 대장간 뒷길로 들어가면 부림교회가 있었다. 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했었다. 그 교회는 나중에 동은교회로 개명하고, 길 건너 안양 쪽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부림교회 주일학교를 다녔었다. 나무 종루에서 울려 퍼지던 교회 종소리가 멀리 덕장골까지 들렸었는데, 이제 어디서고 교회 종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요절을 외우는 일, 하기학교가 시작되면 교회 앞마당에 큰 물통을 놓고, 감미료(사카린, 아니면 당원이란 것)만을 탄 물을 한 컵씩 나눠주곤 했었는데, 그것이 무슨 별식이라도 되는 양 뙤약볕에 장사진으로 기다리곤 했었다.

성탄절 준비였던지 어느 날 밤 교회 앞 작은 사택에서 헌 오르간으로 찬양 연습을 할 때 미국 간 누님, 옆집의 누님 등이 찬양대원이었고, 찬양대 지휘자는 키가 크고, 말처럼 얼굴이 길게 생긴 분이었는데, 지금 얼마나 큰 음악가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다음 동네는 간뎃말(가운데말, 中村)이었다. 부림말과 말무데미 사이 가운데에 끼어있는 마을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약간 언덕 위로 들어서 있는 이 동네는 규모가 작았다. 그냥 지나쳐도 되는 간이역 같은 동네, 과문불입(過門不入)해도 괜찮을 만한 곳이란 뜻인가.

동네 앞을 지나다 보면 어느 동네이건 동네가 풍기는 나름대로의 바람결이 있고, 바람결에 묻어오는 냄새가 있었다. 덕장골에서 안양에 이르는 한길 가에는 군데군데 마을들이 한 줄에 꿰이듯이 늘어서 있었으며, 제각기 독특한 사랑방 머슴 냄새와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연기도 모양이 다르고, 냄새가 서로 달랐었다. 저녁 밥 누른 내나 괴꼴 태우는 냄새도 동네마다 달랐다. 가을걷이를 태우는 냄새는 더욱 다양하였다. 별다른 냄새가 없이도 그 동네의 분위기가 냄새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니어스 로우사이(genius loci)의 몸내였다. 

간뎃말을 언뜻 지나치면 말무데미(말무덤)였다. 비교적 큰 마을이었다. 한자로 마분동(馬墳洞)이라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말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하필이면 왜 거친 뜻의 말로 동네 이름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작명 의도가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좋게 여겨지기도 했다. 동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앞은 지나다니기가 망설여지던 곳이었다.

옛날에는 마을 앞에 동네마다 짓궂은 놈들이 있어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텃세를 부리면서 괴롭히곤 했었다. ‘왜 쳐다보느냐?’는 것이 시비의 실마리가 되었던 동네 골목대장들의 최전선이 말무데미 한길 가였던 것이다. 근처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 같다. 산 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관양초등학교가 있었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