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조동범]안양 태창목재소 이야기

안양똑딱이 2019. 1. 8. 23:03

태창목재소 / 조동범

<시와정신> 2003 가을호 시인이 쓴 산문

 

 며칠 전인가 퇴역 군함을 수장시키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거대한, 사진 속의 군함은 제 생명을 다하고 가라앉고 있는 중이었다. 뱃머리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군함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자신의 일생을 바다에서 보내고 바다로 돌아가는 군함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 없이 많은 전투와 항해를 겪었을 군함의 최후는 장엄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다이버들의 훈련용으로 쓰일 것이라고는 하지만 고철로 분해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즐겁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군함은 천천히 녹이 슬어가며 아주 오래도록, 바다에서 보낸 일생을 추억할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보고 몇 달 전에 문을 닫은 태창목재소를 떠올렸다.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던,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태창목재소. 태창목재소는 1976년에 문을 열고 올 봄에 문을 닫은, 말 그대로 나무를 파는 상점이다. 태창목재소는 27년의 세월을 견디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아이의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27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27년 전의 빛바랜 사진 속에서 눈부시게 웃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만큼 자란 나는 그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엘 다녀오고 결혼을 하였다. 언제나 나무 향 가득하던 목재소는 그렇게 세월을 남겨두고 문을 닫고 말았다.

  목재소 가득 퍼지던 나무의 향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배어 나온 그 향은 마치 깊은 숲에서 나는 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무에서는 언제나 그런 기분 좋은 선선함이 묻어 나왔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목재 창고에서 일을 하고 있던 부모님께 인사를 했고 친구들과 그 곳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으며 나무가 가득 쌓인 통로를 지나 변소엘 갔다. 그 곳에는 언제나 나무의 향이 가득했다.

  한번은 목재소가 있던 안양에 대홍수가 난 적이 있었다. 목재소가 문을 연 다음 해였던 1977년의 일이었다. 물은 천장까지 차올랐고 도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밀려들었는지 삽 한 자루를 들고 물을 막아보려던 아버지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물은 삽시간에 나무가 쌓여 있던 마당과 창고까지 차올랐다. 밤 새, 물 위로 떠오른 나무와 그 향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혹시 나무가 홍수에 모두 휩쓸려 먼바다를 떠도는 꿈을 꾸신 것은 아닐까? 참담한 여름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늘에서 아주 오래도록 나무를 말렸다. 물에 젖은 나무의 향이 발치로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마르자 허옇게 일어난 톱밥이 우수수 떨어졌다. 톱밥은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흩어졌다. 공중에 흩뿌리던 톱밥은 아마도 부모님의 눈에 박혀 눈물과 함께 나무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을 것이다.


태창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나무를 들어내자 세월을 뒤집어 쓴 톱밥이 뿌옇게 드러났다. 나는 그날, 톱밥에 섞인 뿌연 먼지와 함께 폐부로 들어오는 나무의 냄새를 맡으며 바다 너머 낯선 이국의 밀림과 밀림의 푸른 나무를 떠올렸다. 태창목재소는 한 번도 푸른 나무를 들인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선선한 나무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지난 27년 동안 나는 목재 창고 안에 배어 있던 나무 냄새를 맡으며 언제나 밀림을 눈앞에 그리곤 했다.

  톱밥은 곱고 부드러웠다. 손끝에 올려놓은 톱밥을 지그시 누르자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게 전해왔다. 지금이야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톱밥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당시만 해도 톱밥은 매우 유용한 보온재였다. 톱밥 위에 누우면 전해지는,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톱밥에 누워 손끝에 전해지는, 푹신하면서도 까칠한 느낌을 주먹에 가득 쥐고는 잠이 들곤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 태창목재소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부모님은 목재소를 차리기 위해 살던 집을 팔았는데 당시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나는 살던 집에서 몇 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던 목재소를 찾지 못해 무척 당황했었다. 우리 식구는 그 후로 오랫동안 목재소 귀퉁이의 무허가 집에서 나무와 함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목재소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나 커다란 트럭이 들어와 내 키보다 높게 나무를 부려 놓았다. 부모님은 내 키보다 높은, 아득한 곳에 차곡차곡 나무를 쌓았다. 밀림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을 나무는 언제나 나이테를 드러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무는 팔려나가 집이 되고 가구가 되고 기둥이 되었으며 초등학교 일 학년이었던 어린 소년을 키웠다. 나무의 뿌리는 바다 너머 아득히 먼 이국에 남았지만 목재소의 나무는 내게 언제나 단단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거대한 푸른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우리 식구는 그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언제나 행복했다. 목재소는 몇 차례 이사를 하는 동안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빈 공터에 허술한 나무 담장을 두르고 있던 목재소는 상가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상호도 태창목재소에서 태창종합목재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국번 없이 네 자리였던 전화번호도 한 자리 국번과 두 자리 국번을 거쳐 세 자리 국번을 갖춘 전화번호로 바뀌었다.

  수장되는 군함의 사진을 보며 나는 목재소가 문을 닫던 날, 켜켜이 쌓인 톱밥을 쓸어내며 느꼈던 아련함을 보았다. 그리고 바다에서 보낸 세월을 간직한 채 깊은 바다에 수장되는 군함의 모습을 보며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목재소의 추억을 떠올렸다. 군함은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지만 바다에 잠겨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바다 속 깊은 곳의 모습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제 몸 곳곳에 바다를 담고 바다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목재소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깊은 바다 속에 잠겨 바다가 되어 가는 군함처럼 내 마음 속에 담겨 유년의 기억을 불러오고 나무의 향을 뿜어 27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목재소를 그만두게 되어 편하다고 하시는 부모님 역시 꿈 속에서 나무 향기 가득한 추억을 건져 올릴 것이다.


지금은 피아노 상점이 들어선, 목재소가 있던 자리를 지날 때면 아직도 나무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깨끗하게 정리된 피아노 상점 바닥의 귀퉁이에 아직도 치우지 못한 톱밥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의 향은 거의 잃었지만 톱밥 부스러기는 아직도 목재소를 추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목재소와 나무 그리고 나무의 향을 아직까지 가슴 속에 제대로 담지 못해서일까? 목재소에 관한 시 한 편 변변히 써보지 못하고 시인이 되었는데 이제 목재소는 그 자리에 없다. 수장된 군함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담긴 목재소를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나무의 향기 내 마음 속에 가득한데 어쩐 일인지 나는 목재소에 관한 시를 쓰려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1동 557-34번지.

  아직도 목재소가 있었던 그 자리를 지날 때면 나무의 향이 나는 것만 같다.

  그 곳에, 나를 키운 목재소가 있었다.

  나무의 향 가득한, 태창목재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