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1970년대초 안양1동 골목길과 절미운동

안양똑딱이 2016. 6. 20. 15:03

 

#안양 #기록 #기억 #역사 #만안구 #원도심 #동네 #골목 #안양1동 #안양일번가 #안양역 #절미운동#1972-74년 / 사진은 1970년대 초 당시 안양읍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안양역앞 안양1동(현 안양일번가) 골목길의 풍경이다. 
하얀 쌀밥에 쇠고기 한 번 먹어 보게는 게 누구나 소원이었던 1963년부터 1978년까지 박정희 정권이 범정부차원에서 절미운동을 실시했는데 인근 식당과 각 가정에서 밥 지을때마다 한숟가락씩 항아리에 모아 두었던 쌀을 내놓고 있다. 
안양역앞 골목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번화가였다. 현 신한은행앞 중앙통 골목(안양로 292번길) 양쪽으로는 안양읍사무소, 시흥군청, 안양경찰서, 의용소방대 등 관공서와 제화점, 양복점 등이 있었고, 신영순산부인과 앞 골목 우측에는 갈비로 유명했던 화진정 그 앞에는 맞수 유래정 등 음식점이 있었는데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이면 나이트클럽에서 밤새도록 몸을 흔든 이들이 해장국을 먹으러 줄지어 들어서기도 했다,. 특히 화진정은 갈비가 수원 화춘옥 보다 더 맛있다고 소문나 아침이면 갈비와 우거지가 들어간 해장국을 팔았는데 이것도 별미였다..
사진 속 골목에도 다방에 술집에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사진은 현 장내로 139번길 55에 자리한 석기정(부대찌게집)에서 안양역 방향을 향해 촬영한 골목의 풍경으로 골목길 끝자락에 보이는 건물은 과거 한국특수제지공장(현 삼성레미안 아파트)이며 골목길 끝자락 좌측에는 태극당 빵집이 있었다.
사진속 골목길은 예나 지금이나 술집과 음식점의 거리로 당시 술꾼들이 드나들었던 본전집, 12시집에 서울식당, 성호집, 대성집, 은파다방 등의 간판도 보인다.
건물들은 4-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골조는 그대로 둔채 리모델링을 통해 내부와 외부 모습만 바뀌어 새마을식당, 불불이족발, 하동갈비, 신양푼갈비찜 등의 간판을 내걸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사진제공:이정범선생) 

절미운동
1960-70년대 보릿고개 시절엔 새마을 운동, 쥐잡기 운동, 쌀 증산 운동, 절미운동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범국민 실천운동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도 절미운동(節米運動)이란게 있었다. 말 그대로 쌀을 절약한다는 뜻이다.
절미운동은 1960년대 초반 당시에는 쌀과 보리가 식량소비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 곡물의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1963년 1월 제정·발표된 전국절미운동 요강의 내용은 각 가정에서 2일 1식의 분식을 하며, 각 공공기관의 구내식당에서 밀가루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절미운동은 1963년 1월부터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주관으로 각 시·도에 식생활개선위원회를 두고, 각 관공서·학교·공공단체를 총동원하여 추진되었다. 
특히 정부는 소맥분의 대량공급을 위해 소맥의 도입을 강화하고 공장별 생산책임제도를 실시했다.또한 1968년 미곡이 한해(旱害)로 말미암아 흉작을 기록하자, 1969년 1월에 다시 미곡소비억제를 위한 행정명령을 고시했다. 
그 주요내용은 ① 모든 음식판매업소에서는 반식(飯食)에 25% 이상의 보리쌀이나 면류를 혼합판매해야 한다. ② 모든 음식판매업소는 매주 수요일·토요일 11~ 17시에 쌀을 원료로 하는 음식을 판매하지 못한다. ③ 관공서, 국영기업체의 구내 식당에서는 일체 쌀을 원료로 하는 음식판매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1969년 실시된 혼·분식 장려시책은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정부는 1974년 6월 27일 혼합곡 및 보리쌀 방출가격의 인상으로 밀가루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지고 국제 소맥가격이 대폭 하락함에 따라 분식장려를 가속화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관주도형 식생활 개선시책으로, 단순하고 단기적인 수급균형에 중점을 둔 소비정책이었다고 지적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