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승격 50주년을 기념 및 안양 독립운동사 발간 기념 학술회의와 전시회가 광복회 안양시지회 주최 주관으로 지난 8월 30일 오후 2시-5시30분 안양 자유센터 2층 대강당 및 광복회 안양지회(평촌 자유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제1주제>로 발제자로 나선 단국대 김명섭 교수는 대한민국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기록, 안양시지 자료, 안양시 관내 각 조형물의 안내문 등 공식기록을 통해 이름, 사망일자, 이미지 등 가짜 정보가 안내되고 지식백과 등 온라인상에서도 원태우 대신 ‘원태근’이란 잘못된 이름과 ‘김태근 또는 김태우’ 등 오류정보가 계속 재생산되며 역사왜곡과 혼란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며 잘못된 사실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밝혔다.
아래 자료는 이날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 자료이다.
<제1주제>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
김 명 섭 (단국대)
<목차>
1. 머리말 - 문제제기
2. 원태우의 생애와 이토 응징투쟁의 전말
3. 원태우 의거에 대한 일제의 역사왜곡
4. 석방 이후 원태우의 삶과 사망
5. 맺음말
1. 머리말 – 문제제기
제국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한 후 전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명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과 각부 대신을 협박하여 마침내 친일 매국대신인 '을사5적'의 찬성을 얻어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그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시종무관인 민영환(閔泳煥) 등 충군애국지사들이 상소투쟁이 벌였고, 순정자결 투쟁을 단행했다. 도시상인들은 철시를 하고 농민들은 납세거부투쟁을 하였으며, 곳곳에서 군중들의 시위와 의병들의 항일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을사늑약에 대한 일반 민중의 분노를 대변한 응징 투쟁은 체결 5일 만인 1905년 11월 22일 안양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려한 원태우의 의거를 들 수 있다. 안양리(당시 과천군)에 거주하는 원태우(元泰祐, 1882~1951)라는 23세의 청년이 열차에 탄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돌멩이를 던져 부상을 입힌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 헌병대에 붙잡힌 원태우는 2개월간의 감금과 태형을 받아 평생 불우의 여생을 보내야 했지만, 한민족의 분노를 온몸으로 대변한 의거라 할 수 있다.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의거보다 무려 4년 전에 이뤄진 원태우의 응징투쟁은 그러나 역사적 사건으로 제대로 조명되거나 교육되지 못한 채 여러 사실 오류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한국 독립유공자의 수훈을 비롯해 모든 정보관리와 선양사업을 관장하는 국가보훈부의 공훈록에서 명백한 오류가 발견된다. 원태우 집안의 족보를 비롯해 호적등본과 후손의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훈록에 본명으로 기재된 ‘원태근’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며, 이명으로 알려진 ‘김태근·김태우’도 한번 사용한 적 없는 가공의 이름인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사망연월일은 1950년 6월 25일이 아닌1951년 7월 22일로 밝혀졌다.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1)
- 성명 : 원태근(元泰根)
- 이명 : 김태근(金泰根)·김태우(金泰祐) - 사진 없음
- 생년월일 : 1882.3.4. - 사망년월일 : 1950.6.25.
- 본적 : 경기도 시흥 안양 안양 642
● <안양시지> : “문헌에 따라 원태근(元泰根)·김태근(金台根:金泰根)·김태우(金泰祐) 등으로 달리 기재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원태우(元泰祐)로 되어 있다...”2)
● 안양시립만안도서관 의거비 안내문 : “1950년 6월 25일 사망”
● 자유공원 기념동상 안내문 : “1950년 6월 25일 69세의 일기로 타계”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오류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안양시에서 발간한 『안양시지』(2008년)를 비롯해 독립기념관에서 편찬한 『경기남부독립운동사적지』(2008년) 등의 공식 기록물이나 지식백과 등 온라인상에서도 원태우 대신 ‘원태근’이란 잘못된 이름과 ‘김태근 또는 김태우’ 등 오류정보가 계속 재생산되며 혼란을 주고 있다. 또한 안양시 자유공원과 시립만안도서관 입구에 세워진 기념동상이나 흉상 등에도 가짜정보가 반복해 안내되고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역사왜곡의 실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의거를 선양하기 위해 안양시에서 조성한 의거비나 동상 및 흉상, 안양역전의 부조물에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응징 당시 23세였던 청년을 마치 50대 이상의 중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선양사업을 위한 각종 홍보문안에서도 1905년 12월 일본인이 제작한 삽화에서의 ‘도포 쓰고 칼찬 노인’의 모습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어 매우 사실성이 떨어진 사례로서 비판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오류와 역사왜곡, 선양사업의 문제점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왜, 무엇때문에 원태우는 ‘원태근, 김태근 또는 김태우’란 이름으로 뒤바뀌게 되었으며, 사망일도 잘못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23살의 원태우는 정말 기록화대로 갓 쓰고 도포 입은 채 칼 차고 돌을 던졌는가. 왜 이러한 왜곡된 사실이 의거 11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바로 잡히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 계속되는 이유는 원태우 지사 대한 학술적인 연구조사가 한차례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잘못된 정보를 비판 없이 계속 재생산했고, 또 이를 진지하게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3) 즉 ① 원태우의 출생과 가족상황, 성장과 죽음이라는 생애사에 대한 기초조사가 전혀 없었고, ②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응징 의거와 일제의 대응조치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검토와 심층연구가 없었으며, ③ 객관적 자료검토와 후손들과의 고증 및 자문을 통한 선양사업 기회를 갖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무엇보다 의거의 당사자인 원태우의 생애사에 대한 복원을 시도하고, 나아가 이토 히로부미 응징의거에 대한 객관적 자료 재검토를 통해 의거의 위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특히 본고에서는 후손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족보와 호적등본 등 집안 기록과 함께 함께 거주하며 전해들은 바에 대한 구술녹취(4차)를 활용하고,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응징 의거에 대한 일제의 관련기록을 비교검토하여 의거의 전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잘못된 사실에 대해 바로잡을 근거를 마련하여 의거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과 함께 선양사업을 활성화하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2. 원태우의 생애와 이토 응징투쟁의 전말
1) 원태우의 가계와 성장
원태우는 1882년 3월 4일 안양시 만안구(1905년 당시 과천군) 안양1동 642번지에서 원태성(元泰成)과 이호순(李好順) 사이에서 2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원주이다. 장남은 원영우(元潁祐)로서 슬하에 장남 천복(千福-남), 순복(順福-여), 계복(季福-남), 인복(麟福-
남), 청송(靑松-여) 등 5남 2녀를 두었다. 원태우 일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태우의 부친인 원태성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울러 장남인 원영우와 차남 태우의 성장과 직업에 대한 기록이나 후손들의 기억도 전해진 바 없다. 부친 원태성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이므로 아들인 원태우 역시 농민 또는 노동자일 것이며 “농촌 출신이라 깊은 학식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잘못된 선입견일 수 있다. 1905년 11월 25일 일본 헌병대장이 작성한 <선고서>에도 원태우가 ‘날품팔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직업을 노동자로 적시하지는 않았고 농사를 지었다는 객관적 자료도 없어 농민으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원태우의 출생지인 ‘안양1동 642번지’를 현장 방문해 확인해 보면, 오늘날의 안양역 근처의 도심 중심가임을 알 수 있어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특히 생가터 주변은 일제강점 당시 서이면(西二面) 면사무소가 자리했던 곳이므로 농촌이 아닌 도심으로 볼 수 있다.더욱이 원태성의 직계 후손은 증조부인 원태성이 “예전에 만안교 축조할 적에 감독일을 보는 관직에 있었다.”는 증언과 함께 서이면사무소 터를 비롯한 넓은 땅과 여러 채의 건물을 가져 “재산이 제법 많았다.”는 주장이 있어 흥미롭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전언에 따르면, 원태우는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닌 유생이었으며, “서울을 자주 왔다 갔다 했고, 의거 당시 향교에 다니셨다.”고 하므로 향후 더 고증해야 할 부분이라 여겨진다. 원태우는 청년시절 체격도 매우 컸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장남 원영우와 함께 체격이 크고 건강한 편으로 “육척장신에 가까웠”으며, 힘이 장사였다고 후손은 증언한다.5)
2) 이토 히로부미 응징사건의 전말
다음으로 1905년 11월 22일 거사 상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를 성토하고 분노하는 지사들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이날 아침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팔달산 경치를 구경하고 사냥을 마친 후 6시경 수원역을 거쳐 안양역으로 와 잠시 정차한 상황이었다. 이때 어디에선가 차창 밖에서 돌멩이 몇 개가 날아와 유리창이 깨지고 부서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처음 보도한 신문은 이틀 후에 발간된《대한매일신보》이다.
1905년 11월 24일자 단신인 <잡보란>에 실린 보도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멩이가 어떻게 왔는가’(石子何來?)
“그저께(再作日) 오전 9시에 이토(伊藤) 대사가 수원 등지를 관람하기 위하여 전차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에 안양역 부근에 잠시 정차하였는데, 홀연 몇개의 돌멩이가 밖으로부터 날아와 차창이 깨지고 부서져 이토 대사가 상처를 입어 같은 날 오후 7시에 서울로 돌아왔다.”6)
11월 22일 저녁 안양역에 일어난 사건을 처음 보도한 위의 ‘돌멩이가 어떻게 왔는가’라는 기사에서는 ‘홀연’ 돌멩이가 날아왔을 뿐 누가, 왜 던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돌멩이가 날아와 차창이 깨지고 부서져 이토 히로부미가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지만, 얼마나 심한 상처를 당했는지, 돌을 던진 범인이 혼자인지 아니면 여럿인지, 범인을 어떻게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누가 거사를 일으켰는지 신문보도에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거사 직후 6일 만인 1905년 11월 25일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箚憲兵隊長)인 고야마 미키(小山三己)가 작성한 <선고서>를 통해 당시 상황의 일부를 알 수 있다.7) 돌멩이를 던진 범인을 붙잡아 조사한 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밝힌 보고서이므로 전문을 소개해본다
한국주차헌병대장이 밝힌 위 선고서에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멩이를 던진 범인을 원태우가 아닌 ‘원태근(元泰根)’으로, 심지어 나이도 23세가 아닌 ‘20세’로 잘못 기재되어 있다. 또 사건의 주인공인 원태우가 ‘날품팔이를 위해 영등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을 먹은 후’ 동료인 이만여(李萬汝)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열차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는 것이다. 돌멩이는 차창을 파괴해 열차 안의 누구인지 모르는 ‘승객 한사람에게’ 작은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선고서에는 원태우가 왜 영등포에 갔다가 술을 누구와 어디에서 얼마나 먹었는지,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의 안양역 도착시간과 좌석위치를 정확히 알고 돌을 던졌는지 등의 의문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왜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을 던져 승객의 상처를 입혔는지, 상처 입은 승객은 누구이며 얼마나 다쳤는지, 범인을 어떻게 붙잡았으며 왜 원태우만 감금하고 태형에 처했는지 등의 의문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더욱 이상한 일은 당시 가장 악명 높았던 일본헌병대가 열차를 향해 돌을 던져 중요 승객에게 상처를 입힌 범죄행위에 대해 ‘정상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당시로서는 가벼운 형인 ‘감금 2개월’에 ‘태형 1백대’를 가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의문점을 가진 헌병대장의 선고서는 한국주차군 참모장인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에 의해 조치되었음을 한국 주재 특명전권공사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보낸 전문으로 통보되었다.
위의 전문 역시 원태우를 ‘원태근’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은 처음 원태우를 조사한 한국주차헌병대장을 시작으로 전권공사에게 보낸 한국주차군참모장에게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의 유공자 공적정보에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제주도 유배 중에 잘못 이름을 전해 들은 전 외무대신 김윤식(金允植)이 자신의 일기인 『속음청사(續陰晴史)』에 ‘김태근(金泰根)’란 엉뚱한 이름으로 기록하여 혼동을 가중시킨 것이다.9)
여러 의문점을 갖고 있는 채 23세의 청년 원태우는 11월 22일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안양역 부근에서 열차를 향해 돌을 던져 승객에게 상처를 입힌 혐의로 피체되어 2개월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 100대를 맞은 후 1906년 1월 24일 풀려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함께 체포된 동료로 알려진 이만려(李萬旅)·김장성(金長成)·남통봉(南通峰) 등 3명은 무혐의로 당일 석방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큰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1905년 11월 22일 오후 6시경 안양역 부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전말은 당시 헌병대 보고서나 신문보도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의문투정이이다. 다행히 이토 히로부미 특파 대사의 일일활동을 기록한 《伊藤대사 한국왕복일지》라는 일본공사관기록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보다 접근해 볼 수 있다. 1905년 11월 22일 이토 대사의 행적을 적은 기록은 다음 과 같다.10)
위의 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서 가진 여러 의문점이 풀린다. 먼저 확인된 사실을 살펴보면, ① 오후 6시30분경 안양역을 출발하자마자 밖에서 이토를 노린 화강암의 돌이 날아와 차창을 깨고 열차 좌석에 떨어졌다. ② 이토 대사가 직접 돌을 맞지는 않았지만, 깨진 유리파편으로 인해 볼과 눈, 귀 등 얼굴의 5곳에 상처를 입어 출혈이 있었다. 의사의 소견으로 상처의 부어오름이 있었다. ③ 열차가 다음 역에 도착한 후 급히 호위 헌병 조장 등 3명이 내려 범인을 찾았고, 밤 9시반경 4명이 피체되었고 그중 2명이 자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이토 대사는 얼굴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정대로 만찬을 이어갔으며, 원태우는 호위 헌병대에게 현장이 아닌 9시반 경 자택 등 다른 곳에서 피체되어 헌병대로 압송되었던 것이다.원태우 의사에 의한 이토 히로부미 대사의 부상 사실은 식민통치 하의 한국과 일본 본국에 급히 타전되어 큰 이슈가 되었음에 분명하다.11) 이토 대사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만찬 등의 공식행사를 이어갔지만, 피습 소식은 일본공사관과 조선주차군·헌병대는 물론 일본 본국과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증시가 한때 폭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어지는《伊藤대사 한국왕복일지》를 보면 일본본국과 그에 외교권을 내어준 대한제국 친일정권에서 얼마나 사건을 중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12)
위의 일지에서 보여준 대로 매국정권 대신들은 원태우 의거에 대해 매우 놀라 새벽 2시에 ‘사죄 사절’을 이토에게 보냈으며, 아침 9시에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칙명을 받은 궁내부대신이 직접 ‘사죄방문’ 하였다. 사건의 책임을 물어 당시 시흥군수(김종국)를 파직하고 경기도 관찰사(정주영)를 견책 처분했다고 한다.13)
이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와 동행하였던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는 사건 당일 오후 8시30분경 도쿄의 본국 대신에게 긴급전보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야시 공사는 당일 오후 10시경 투석사건에 대해 1차로 도쿄의 외무대신d게 긴급 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은 “범인 4명은 우리 헌병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것을 지금 현장으로부터 전화를 접하였”다는 것이다.15) 이어 다음날인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 다시 도쿄의 카즈라 타로우(桂太郞) 외무대신에게 재차 보고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 응징사건은 일본 본국 외무대신에게 급히 타전될 정도로 파급력이 큰 사건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토와 하야시 공사는 이 사건을 을사늑약에 대한 한민족의 분노로 비춰지길 매우 우려하면서 ‘술에 취해 장난삼아 돌던진 자의 소행’으로 축소·은폐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토 일지와 하야시 공사 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리지 않는 또 다른 의문이 있다. ① 왜 일본헌병대는 이토 대사에게 상처를 입힌 ‘살인미수범’인 원태우의 행위에 대해 ‘정상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감금 2개월’과 ‘태형 100대’에 그친 채 석방한 것일까
② 왜 당시 한국과 일본에 큰 사건인 ‘이토 피습사건’은 11월 24일자《대한매일신보》
<잡보란> 이외에는 어떠한 외신이나 관보 등에 전혀 보도되지 않은 채 은폐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그해 12월 8일자로 발간된 일제의 화보집을 통해 추론해 보도록 하겠다.
3. 원태우 의거에 대한 일제의 역사왜곡
원태우 지사의 의거는 1905년 12월 8일 일본 도쿄(東京)의 박문관(博文館)에서 러일전쟁 기 일본군의 전투 활약상을 선전하기 위해 만든 사진첩인『일로전쟁사진화보(日露戰爭寫眞畫報)』제39권에 실린 화보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기무라 고타로(木村光太郞)라는 화백이 그린 이 그림은 갓을 쓰고 긴 도포를 입은 조선인이 왼쪽 허리에 칼을 찬 채 열차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그림 상단에는 ‘憫笑すべさ朝鮮人の暴行(가볍게 웃을만한 조선인의 폭행)’이란 제목과 함께 영문으로 ‘A Foolish Korean offering an insult to Marquis Ito(어리석은 한국인이 이토 후작에게 모욕을 주다)’라고 적혀 있다. 그림 왼편 날개에 부연설명이 붙어있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7)
11월 22일 이토(伊藤) 대사는 하야시(林) 공사와 같이 한국 수원부에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탑승한 기차가 오후 7시경 영등포 정거장 부근에 접어들자, 한국의 폭도 한명이 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돌은 겨우 유리창을 깼을 뿐이고 대사 일행은 모두 무사하다. 폭도를 체포하고 보니 이는 우매한 농민으로서 대사가 탄 기차인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위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11월 22일 오후 7시경 안양역 부근에서 이토 히로부미 대사가 탄 열차를 향해 돌을 던졌다는 일본공사관 일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돌멩이를 던진 원 태우를 ‘우매한 농민’으로 정의했다는 점과 이토 대사가 탄 줄 모르고 ‘술에 취해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졌다’며 항거의 의미를 일부러 격하·은폐시키고 있다. 위의 그림과 기사 내용을 비교해 살펴볼 때, 몇가지 의문사항이 생긴다. 우선 원태우를 ‘우매한 농민’으로 본 반면, 그 림 속의 원태우는 갓을 쓰고 긴 도포를 입은 양반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도이다. 또한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양반이 왼쪽 허리춤에 긴 칼을 찬 이상한 모습은 ‘우매하고 폭력적인 조선인’의 인상을 주려는 화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18)
원태우 지사가 어떻게 피체되었는지는 이토 일지나 화보집 기사 등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후손의 증언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후손의 진술에 의하면, “제 아버님(원태우의 양자 원천복[1909년생]필자 주) 말씀은 열차에 돌 던진 상황을 본 역무원이 신고를 해서 바로 헌병대원들에 의해 잡혀가셨다고 그래요. 경찰서로 간 게 아니라 헌병대로 가셨대요. 그거는 제 아버지가 할아버지 왜 아프시냐구 물어보니까 얘기해줬다고 해요.” 이와 함께 동행했던 이만려 등 3명의 동료들도 같이 체포됐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혐의로 훈방조치 되었다고 한다.19) 이로 보아 헌병대로 연행된 4명 중 원태우만 경성헌병사령부로 압송되어 강압적인 조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로전쟁사진화보(日露戰爭寫眞畫報)』제39권의 본문에 실린 <대사(大使)의 조난(遭難)>이란 글에도 이와 동일한 맥락의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20)
위의 기사내용 역시 11월 23일 새벽 2시경 급히 찾아온 대한제국 친일 대신의 위문방문이 있었다는 일본영사관 일지와 일치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토 대사가 매우 너그럽고 대범한 척 원태우의 의거를 ‘술 취한 자의 장난’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한편, 이 행위가 ‘추호도 고의로 한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변호를 해주고 있다. 제주도 유배 중에 소식을 들은 김윤식조차 이토 히로부미가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어 볼기 100대에 그쳤다.”고 평가하였다.21)
하지만 일제의 입장에서 볼 때, 원태우의 이토 응징 의거와 그로 인해 무거운 처벌이 내려져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질 경우, 을사늑약에 대한 한국민의 또 다른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 불 보듯 뻔하므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진 이토 히로부미 대사와 일본 본국이 ‘살인미수 혐의’의 원태우를 감금 2개월과 태형 100대의 가벼운 처분으로 석방 조치하게 만든 배경이라 하겠다.22)
하지만 원태우가 경성헌병대사령부에 수감되어 있는 2개월 동안 심각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헌병대가 어떤 고문을 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방된 후 원태우를 맞은 가족들과 그 후손들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다.
“인두로 지짐을 받은 자국은 제 아버님도 많이 보셨으니까. 하여간 목 위에서부터 얼굴, 그 다음에 손목에서 발목, 발 등 보이는 곳 외에 몸 안에는 전부 인두 자국이랍니다, 몸 전체가. 그래서 할아버지는 짧은 옷을 한여름에도 입지 못했대요. 항상 온몸을 가리는 긴 옷을 입으시 고 그 땀을 찍어냈다고 해요. 그건 동네분들도 다 아는 사실이구요. 성기까지 고문받았는데, 성기를 완전히 뒤졌대요. 정자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이런 데서 후손이 나오면 안 된다고 완전히 지졌다고 그러더라고요.”23)
이처럼 일제는 2개월동안 원태우를 악명 높은 헌병대에 감금하면서 왜, 어떻게 이토 대사를 공격하려 했는지를 추궁하며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이로 인해 23세의 청년 원태우의 온 몸은 인두지짐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남겼으며, 한여름에도 손발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의 흉터투성이라고 한다. 더욱이 성기 고문을 가한 탓에 결혼하여 후사를 남길 수 없는, 치욕적인 불구의 신세가 된 채 1906년 1월 24일 석방 조치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해 태형 100대의 가벼운 체벌을 받았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건장한 청년의 신체를 불구상태로 만든 중형을 가한 것이다.24)
4. 석방 이후 원태우의 삶과 사망
원태우는 태형 100대를 맞고 성고문을 당한 후 피체 두달 만인 1906년 1월 24일 풀려났다. 석방 이후 원태우의 삶에 대해서는 일제의 기록이나 신문보도, 당사자의 기록이나 구술 등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해방 후의 자료와 후손들의 증언에 의존할 따름이다. 거사 직전 원태우는 맏형인 원영우의 집에서 조카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사건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자택을 압류하는 바람에 생가에서 쫒겨나야 했다고 한다. 이후 외삼촌 댁 근처인 안양동 642번지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맏형의 넷째아들이며 차남인 계복(季福, 1919년생)을 출계시켜 양자로서 돌보게 하였다.25)
“사건 직후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어요. 전부 일본인들이 집안을 압류해서 할아버지 할머니, 심지어는 큰할아버지, 형님네 가족도 다 쫓겨나서 뿔뿔이 헤어지게 된거에요. 원태우 집터 자리에 서이면사무소가 생기면서 전부 쫓겨난 거죠. 그래서 호적에 642번지로 나왔던 건지도 몰라요. 저희 외가가 바로 옆에 있어요. 저희 외삼촌이 가까이 있는데, 그 옆으로 쫒겨난거죠. 원래 집에서 외삼촌네 근처로 쫓겨났데요. 원태우 할아버지가 거사할 적에는 큰형님 댁에서 다 같이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사건이 난 다음에 그 터에서 쫓겨나게 된 거죠. 다행히 멀지 않은 근처 조그마한 집으로 옮겨 갔다고 그러더라고요.”26)
일본 헌병대의 고문과 태형으로 인해 성 불구자가 된 원태우는 다행히 거사 직전 혼인을 약속한 처자와 결혼하였다. 진주 강씨로만 알려진 양반집 따님이 성 불구자임을 알면서도 그를 보필하기 위해 혼인한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했던 분이 있었다고 해요. 왜 예전에 양반 집 안에서는 결혼하기로 약속하면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결혼하잖아요. 그래서 진주 강씨라는 할머니가 결혼한 거 아닌가, 당시에 그분도 양반 집안 딸이거든요. 그런데 제적등본에는 이름을 남기지 않아 알 수 없어요. 제 아버지(원계복)도 이름을 모른 채 그냥 강씨라고만 알고 있어요.
당시 호적에는 등재되었을 텐데 새로 만들어지면서, 또 6.25동란으로 서이면사무소에 있던 호적이 불타고 다시 만들면서 빠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분이 여장부래요. 부부 생활을 하기도 어려운데도 그분은 할아버지를 보필하려고 결혼하신 거죠. 물론 집안 결혼이라고 볼 수 있죠. 그래서 할머니도 같이 술을 많이 드셨다고 해요.”27)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불구자인 원태우를 보필하기 위해 혼인한 부인 진주강씨와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힘겨운 가시밭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생업에 종사하거나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원태우를 대신해 막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한편 매일 일본 순사의 감시도 받았다고 한다. 원태우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든 일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이웃마을인 비산동 수푸리지(林谷洞)28)으로 가 석수쟁이의 일을 도우며 소일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생활은 아침 되면 저기 석산, 비산동에 가는 거예요. 하루 일과가 거기서 석수쟁이 도와주는 거. 아마 심심하니까 가서 혼자 만들어보고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집에 돌절구 만들어진 거 보면 기술자가 만든 게 아니에요.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 있는 절구 보면 한쪽 귀탱이도 없어요. 그냥 집에서 쓸 거니까 대강 만들었던 거지.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그거 만들 실력은 안되고 소일거리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다른 사람들하고 접촉하기 싫으니까 그러셨던 거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굉장히 힘들게 사셨다고 봐요. 아버님 얘기로는 할머니가 보통 힘이 센 사람이 아니어서 여기에서 비산동까지 할아버지한테 밥과 술을 가져다 날랐대요.”29)
어려운 결혼생활로 인해 부인 진주강씨는 1950년 가을 먼저 사망하였다. 이어 원태우가 지금껏 알려진 1950년 6월 25일이 아니라 이듬해인 1951년 7월 22일 사망하였다. 사망시점에 대해 계속 잘못된 날짜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거는 비산동에 사는 농림부 기자가 1970년 무렵 원태우 관련 자료를 발굴한 이종학 씨와 인터뷰하면서 6.25 무렵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1950년 6월 25일로 임의로 기록한 것 같아요. 단순 오류죠. 기자가 후손들이나 저희 아버님한테 직접 물어보거나 호적등본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옛 자료를 그대로 베껴 쓴 거지요. 제 아버님(원계복) 얘기로는 1951년 7월 22일 돌아가셨다고 그러거든요. 내가 1951년 태어나 같은 해라고 하니 그해 7월 22일이 맞습니다.”30)
원태우의 묘소는 애초 안양4동에 있는 공동묘지 터에 묻혔다. 그 후 1982년 이곳에 아파트를 짓는다며 철거하라는 바람에 유골을 채취해 화장해서 안양 강물에 뿌렸다고 한다.
5. 맺음말
대한민국 정부는 원태우 지사에게 의거 40년 만인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런데 머리말에서 지적했듯이, 현재까지 국가보훈부의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본명 ‘원태근’, 이명 ‘김태근·김태우’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안양시지>를 비롯해 안양시에서 제작한 각종 기념동상 및 흉상 등에 사망일을 1950년 6월 25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번 연구를 통해 확인된 오류와 역사적 사실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태우에 대한 기본정보에 있어 집안의 족보를 비롯해 호적등본과 후손의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국가보훈부의 공훈록에 본명으로 기재된 ‘원태근’은 명백히 사실과 다르며 이명으로 알려진 ‘김태근·김태우’도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가공의 이름인 것으로 밝혀졌다.
1882년 3월 4일 원태성(元泰成)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난 원태우의 생가는 안양시 만안구 (1905년 당시 과천군) 안양1동 642번지로 도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를 농촌 출신의 농민, 는 학식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로 비하하는 일본 헌병대의 기록과 일부 주장이 있으나 객관적 근거로 볼 수 없다. 오히려 부친이 만안교 축조에 참여한 관료 출신이며, 원태우도 향교에 다녔다는 증언이 있어 출신과 성장에 대한 엄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하겠다. 더욱이 원태우의 사망연월일도 1950년 6월 25일이 아닌 1951년 7월 22일로 밝혀졌다. 따라서 조속히 국가보훈부와 안양시 등 관계기관의 기초자료 수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1905년 11월 22일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의거에 대한 객관적 사료검증을 통해 볼 때, 처음 조사한 한국주차헌병대장의 선고서 등에서 ‘원태근, 20세’ 등으로 잘못 기술하는 등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음이 발견된다. 의거당일 이토 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伊藤 대사 한국왕복일지》라는 공사관기록에 따르면, 의거는 ① 오후 6시30분경 안양역에서 이토를 노린 화강암 돌이 날아와 차창을 깨고 좌석에 떨어졌으며, ② 유리 파편에 의해 이토 대사의 볼과 눈, 귀 등 얼굴의 5곳에 상처를 입어 출혈이 있었고, ③ 급히 호위 헌병 조장 등 3명이 내려 밤 9시반경 원태우 등 4명을 피체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얼굴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연회에 참석한 이토 대사가 원태우의 의거를 ‘술 취한 자의 장난’으로 여기고, ‘추호도 고의로 한 것이 아니’라며 변호를 하면서 감금 2개월과 태형 100대의 처분을 내렸지만, 이는 한국민의 또 다른 저항을 두려워한 불가피한 조치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원태우의 이토 응징 의거에 대해 무거운 처벌이 내려져 널리 알려질 경우, 을사늑약에 대한 한민족의 또다른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던 것이다. 이를 두려워한 이토 대사와 일본 정부는 정식 수사조사나 재판과정 없이 경성헌병대사령부의 조사만으로 축소·은폐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엄정한 보도통제로 인해 이후 일체의 자료를 남기지 않도록 했다.
넷째, 일본은 원태우 의거를 축소·은폐하는 대신 2개월 동안 헌병대사령부에 수감하면서 그에게 심각한 고문을 가했다. 가족들과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23세의 청년 원태우의 온몸에는 한여름에도 손발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인두지짐으로 인한 흉터투성이를 남겼다. 게다가 성기 고문을 가한 탓에 후사를 얻을 수 없는 치욕적인 불구의 신세가 된 채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으니 결과적으로 건장한 청년을 불구로 만든 중형을 가했던 것이다.
다섯째, 고문으로 인한 성불구 신세에도 불구하고, 원태우는 다행히 거사 직전 혼인을 약속한 처자와 결혼하였다. 진주 강씨로만 알려진 양반집 따님이 성 불구자임을 알면서도 그를 보필하기 위해 혼인한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생업에 종사하거나 직업을 구할 수 없었던 원태우를 대신해 부인은 막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한편 매일 일본 순사의 감시도 받았다고 한다. 원태우는 이웃마을 석수쟁이의 일을 도우며 소일하였고, 맏형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받아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원태우는 지금껏 알려진 1950년 6월 25일이 아닌 1951년 7월 22일 70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화장해서 안양 강물에 뿌려졌다. 향후 후손들의 바람처럼 잘못된 사실이 바로잡히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원해본다.
“우선 일본 헌병대사령부가 잘못 기술해 놓은 역사를 바로 고쳐 써야겠구요. 심지어 한국 역 사학자들이 써놓은 거나 인터넷에 떠도는 대로 ‘우매한 조선인이, 술취한 사람들이 영등포에서 일하고 오다가 그랬다’는 식으로 의사님을 욕보여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원태우 손자 원상길 과의 인터뷰, 2022년 10월 16일, 광복회안양시지회 회의실). (이상).
주석
1) 국가보훈부 유공자정보, <원태근(元泰根)>(2023년 7월 현재) ; 『독립유공자공훈록』9권, 1991년.
2) 안양시, 『안양시사 제2권-이야기와 인물로 보는 안양』, 안양시사편찬위원회, 2008, 560~561쪽.
3)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사건을 조명한 학술연구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 의거에 대한 소개와 평가의 글로는 송상도,『기려수필』,국사편찬위원회,1955 ;김윤식,『속음청사』,국사편찬위원회,1960 ;안양시지편찬위원회 편,『안양시지』,1992 ;안양시지편찬위원회 편,『안양시지』,2008 ;이순우,「이토특파대사가 탄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한국인의 항거장면」『민족문제연구소-미리보는 시민역사관』 2019.2월 등을 참조할 수 있다.
4) <표> 원태우 가계도
4) 《원천복 제적등본》(안양시 만안구청, 2014년). 원태우의 조카인 원천복의 제적등본을 제공해준 손자 원상길(1951년생)님께 감사드린다.
5) “제 아버님(원계복) 말씀으로는 증조할아버지(원태성)가 예전에 만안교 축조할 적에 감독일을 보셨다고 그래요.관직에 있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재산도 좀컸던 것같아요.안양역 앞에서부터 사거리와 서이면
사무소 끄트머리 쪽까지 전부 한필지로 연결돼 있습니다.저희는 그번지수를 642번지 밖에 모릅니다.
들은 얘기로는 집이 99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집이 한두 채가 있는 게 아니었고, 서이면사무소도
그 여러 건물 중의 하나였다는 거죠. 근데 건물들이 전부 6.25 때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중략)..제 아
버님(원계복)말로는 원태우 의사가 당시 서울을 자주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세요.무슨 일인지 몰
라도 서울을 자주 가셨다고 하는데,공부를 하러 가신 건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서울에 대해서 잘아시
더래요.”(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 2022년 10월 3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6) (잡보)<石子何來?>, 《대한매일신보》1905년 11월 24일자.
7) <伊藤 대사 탑승열차 위해범 元泰根 조치건>(1905년 11월 25일)
8) <일본 특명전권공사에게 보낸 전문(韓駐參제605호)>(1905년 11월 28일)
9) “이토(伊藤)가 수원을 둘러보러 가는 도중에 김태근(金泰根)이란 자가 차창으로 돌을 던져서 이토가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김은 일본 병사에게 붙잡혔으나 이토가 관용을 베풀어 태100대와 2개월 감금을 시켰다.” (金允植, 『續陰晴史』12, 국사편찬위원회, 1960). 김윤식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송상도는 『기려수필』의 金泰根 항목에서 그를 ‘수원군 농민’으로 소개하였다(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0) <伊藤大使 韓國往復日誌 1905년 11월 22일자>『駐韓日本公使館記錄』25권, 7.韓國奉使記錄.
11) 《大阪每日新聞》 1905년 11월 23일자 ; 《東京每日新聞》 1905년 1905년 11월 29일자.
12) <伊藤大使 韓國왕복일지 1905년 11월 23~25일자>『駐韓日本公使館記錄』25권, 7.韓國奉使記錄.
13) 『대한계년사』권7, 1905년 11월조.
14) <伊藤 侯 탑승 열차 投石 사건에 관한 건(1905년 11월 22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5) <伊藤 侯 탑승 열차 投石 사건 보고1(1905년 11월 22일)>(『주한일본공사관기록』26권)
16) <伊藤 侯 탑승 열차 投石 사건에 관한 건3(1905년 11월 23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6권)
17) 木村光太郞 畵, <憫笑すべさ朝鮮人の暴行>『日露戰爭寫眞畵報』제39권, 東京:博文館, 1905년 12월 8일 발행(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및 제공).
18) 기무라 고타로 화백의 그림과 기사에 대해 후손이 제기하는 의문점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 같으면 그 당시에 영등포에서 여기 안양으로 오는데 어떻게 시간을 맞춰 올수있어요 ?걸어서 오는 수밖에 없는데. 노동자들이 이토 수상이 안양역 오는 시간을 어떻게 알았으며 그걸 아는 사람들이 거기(영등포) 같이 갔다가 거사를 했다는 얘기는 거리가 먼것같아요.열차 길과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 고개가 열차가 다니는 철로 옆에 가야하는데,술먹은 사람들이 거길 어떻게 내려가요.또던진다는 게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 앉아있는 자리를 정확히 맞춰서 유리 파편으로 얼굴을 찢어지게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술 먹은 우매한 조선인이 그렇게 도포를 입고 칼을 차고 그랬겠어요 ? 그리고 술 취한 사람이 돌을 어떻게 던져 정확히 목표물을 맞춰요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 2022년 10월9일,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19)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 10월 9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당일 석방된 3명이 어떤 내용의 진술을 해서 무혐의 처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현재까지도 그들과 후손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20) <大使の遭難>『日露戰爭寫眞畵報』제39권, 博文館, 1905년 12월 8일(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및 제공).
21) 金允植, 『續陰晴史』12, 국사편찬위원회, 1960.
22)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 의거를 중형으로 다스리지 않은 이유에 대해 후손도 큰 의구심을 갖고 있다. “사실 지금 보면 최소 살인미수 혐의인데 그걸 적용 안하고, 정식 조사나 구속수사도 안하고 두 달동안 감금하는데 그쳤다는 건 이상하죠. 그러니까 (을사조약 강제 체결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사건을 정식 수사해서 크게 알려지고 나중에 석방조치할 때는 우리 의병이나 독립운동하는 분들에게는 큰빌미가 되고 문제가 될까봐 이분을 조용히 내보내고 태형만 치른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얘기잖아요. 어떻게 진짜 살인미수인데 철도방해죄로만 처리했을까요.”(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 2022년10월9일,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3)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 10월 9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4) “그런데 결과적으로 봐서는 중형으로 다스린 거죠. 왜냐하면 전체 고문을 하고 총각인 그분의 성기까지 없애버렸다는 얘기는 그건 중형이지 간단하게 처리한 건아니에요.거기다가 태형 1백대라는 얘기는 그분이 워낙 장사고 운이 좋으니까 살았지, 백대 맞고 멀쩡히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어요.”(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10월9일,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5) 《원천복 제적등본》(안양시 만안구청, 2014년). “그 당시에 원태우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니까 다같이 살았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형님 집에서 사신 거죠. 영우 큰할아버님의 자녀인 장남 천복(千福), 청송(靑松-장녀), 순복(順福), 계복(季福), 인복(麟福) 등 전 가족이 같이 사신거죠. 아버지(계복)는 어린 나
이에 네가 작은 할아버지를 도와줘야겠다, 그래서 아버님이 양자로 가게 된 거지요.”(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10월9일,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6)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 10월 16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7)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 10월 16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28) 안양시, 『안양시사 제2권-이야기와 인물로 보는 안양』, 안양시사편찬위원회, 2008, 561쪽.
29) 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2022년 10월 16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30) 원태우의 사망시점에 대해 후손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사망 시점은 아버님하고 같이 사강으로 피난을 가자고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다고 해서 혼자 집에 계셨대요. 며칠 후에 바로 올라와 만나 함께 있었으니 다음해인 1951년7월22일돌아가신 거죠.사망원인은 뭐고문 많이 받고 연세도 있고 몸안 좋으니 돌아가신 걸로 알아요. 1950년 69세가 아니라 1951년 70세에 돌아가신 게 맞습니다.”(원태우 손자 원상길과의 인터뷰, 2022년 10월 16일, 광복회안양지회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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