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승격 50주년을 기념 및 안양 독립운동사 발간 기념 학술회의와 전시회가 광복회 안양시지회 주최 주관으로 지난 8월 30일 오후 2시-5시30분 안양 자유센터 2층 대강당 및 광복회 안양지회(평촌 자유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첫 번째 발제자 단국대 김명섭교수의 <제1주제>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건신대학원대학교 이종태 박사의 토론 발표자료이다.
‘1905년 원태우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투쟁에 대한 재고찰’에 대한 토론문
이 종 태 (건신대학원대학교)
1. 머리말
발제 원고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안양에서 ‘안양시 독립운동의 재조명’이라는 주제의 학술 토론회가 개최되었다는 점이 매우 반갑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잘 모르기는 해도, 아마 이러한 종류의 토론은 매우 드문 일이며, 특히 안양 지역에서는 거의 최초가 아닐까 짐작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안양시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신생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70년대에는 신흥 공업도시로 불리기도 했지만, 8, 9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탈공업도시가 된 뒤에는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베드타운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주민의 지역적 자긍심이나 지역사회에 대한 소속감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는데,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도시 쇠퇴를 가져오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양 지역의 독립운동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은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고 봅니다. 그것은 단지 이 지역의 과거사를 되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굴곡진 역사를 바르게 세우려 했던 지역 선배들의 의기 어린 발자취를 통해 지역적 자긍심을 되살리는 일인 동시에, 친일 잔재의 청산과 민족 통일이라는 미완의 역사적 과제를 지역 차원에서 어떻게 감당해 나갈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과가 피부로 느껴질 만큼 진전되기 위해서는 지역의 역사에 대한 시민의 관심과 학계의 발굴 작업이 이어지고, 이를 주제로 한 학술 토론회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도록 하는 안양시 당국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의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원태우 지사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조명
김명섭 교수님의 발제문을 읽으면서 가진 첫 번째 생각은, 원태우 지사의 의거가 있은 지 100년이 훨씬 지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역사적 조명을 받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원태우 지사에 관한 관심은 1990년대 이후 안양 지역에서 간헐적으로나마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외부로 표출된 최초의 공적 관심은 1992년 11월 안양의 자생 민간단체인 <새안양회>가 안양시립 만안도서관 마당에 설치한, 주먹 크기의 돌을 잡아 던지려는 자세의 석조 조형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추측컨대, 지역에서 주로 구전으로 전해 오던 지사의 이야기를 안양시 최초의 현대식 도서관 건립을 계기로 안양의 대표적 자생 단체로 자임하던 <새안양회>가 ‘원태우지사의거비’라는 이름의 조형물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새안양회>는 이 조형물 설치와 함께 안양시 석수동의 원태우 지사 투석 현장 근처에 의거 표지판을 설치하였었는데, 후에 안양시가 그 자리에 작은 돌 표지석을 설치했고, 2018 년에는 안양시 석수2동 주민들이 현재의 조형물을 새로 설치했습니다. 한편, 2000년 전후에 건립된 현재의 안양역사 건물 벽면(1번 출구 계단 벽면)에 원태우 지사의 얼굴이 부조 형태 로 설치됨으로써 오가는 시민들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8~9년 무렵에는 평촌 자유공 원을 조성하면서 다른 세 분의 독립유공자와 함께 원태우 지사의 흉상이 공원 내에 세워졌습니다. 2018년 11월에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원태우 지사가 돌을 던진 의거지에 ‘경기도 항일독입운동 유적’ 표지판을 세우고, 원태우 지사의 생가터(안양1동 현 농협중앙회 안양역 지점)에 ‘원태우 집터’ 표지석을 설치했습니다(안양똑딱이, 2019).
2010년 전후에는 안양 지역의 시민운동가 몇 사람이 원태우 지사의 의거에 관심을 갖고 가칭 원태우지사기념사업회 구성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심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얼마 후 흐지부지하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안양 역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 분석, 기록하고 있는 안양지역도시기록연구소(대표 최병렬)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였습니다. 특히 현재 널리 알려진 원태우 지사의 모습이 기개가 넘치는 청년이 아니라 갓 쓰고 도포를 입은 중년 선비로 그려진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의 화가가 비하의 의미를 담아 상상화에 불과한 것인데, 이제 사실적 역사 해석을 바탕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2019년 5월 안양시의회에서 최병일 의원이 5분 발언을 통해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동안 안양시나 지역 인사들이 보였던 원태우 지사에 대한 관심은 매우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김명섭 교수님의 발제문은 몇 가지 점에서 원태우 지사의 의거를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발제문에서 언급했듯이 원태우 지사의 생애사 복원이 시도되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은 단지 막연한 생몰연대(1882-1950) 뿐이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제적등본상의 기록을 통해 정확한 출생 및 사망 연월일(1882. 3. 4 ~ 1951. 7. 22)이 밝혀졌습니다. 이와 함께 원태우 지사의 가계도와 후손(양자)의 존재가 분명하게 알려짐으로써 원태우 지사의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후손의 증언이 유일한 근거 자료이기는 하지만, 이번 생애사 복원은 안양 지역에 살던 23세 청년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상태에서 그 외모나 원 지사의 부친 직업, 이를 통한 계층적 성격에 대한 추정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거나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김명섭 교수님은 이제까지 알려진 기록들 외에 몇 가지 기록을 추가로 발굴, 소개함으로써 원 지사의 이토 히로부미 응징 사건을 훨씬 구체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특히 거사에 쓰인 돌의 종류와 크기, 파손된 유리의 범위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되었고, 아직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원태우 지사의 검거 경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2010년 강제 한일합병 전의 치안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원태우 지사의 의거가 당시 조정 및 고종황제에게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 그리고 그것이 일본 국내에는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도 몇 가지 객관적인 자료를 새롭게 밝힘으로써 더 넓은 시야로 이 사건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향후 원태우 지사의 거사 과정과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셋째, 김명섭 교수님의 발제문은 원태우 지사가 받은 고문의 실상과 당시 조선의 일본 통감부 및 일본군의 겉과 속이 다른 행태를 통해 일제의 야만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무엇보다 원태우 지사가 받은 고문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만행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운동 열사 및 지사들이 겪은 만행의 일부이지만, 이를 통해 전도유망한 조선의 한 젊은이가 평생 불구의 몸으로 불행하게 살았고, 죽을 때까지 누구의 위로나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일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원 지사에 대한 죄스러움을 동시에 갖게 합니다. 또 실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2개월 구금과 태형 100대라는 ‘가벼운’ 처벌로 위장함으로써 일제 침략자들의 가증스러움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이 점은 일제 치하에서 겪은 우리 선조들의 고통에 대한 좀 더 사실적인 해석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행태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함을 일깨워준다고 생각됩니다.
3. 원태우 지사의 의거와 생애에 대한 지속적인 구명 작업 필요
이미 정리한 바와 같이, 김명섭 교수님의 발제문은 원태우 지사의 의거 과정과 그 여파, 그리고 생애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점들을 새롭게 밝혀주었습니다. 그것은 안양지역에서의 독립운동사 조명이라는 과제의 진전은 물론, 안양 지역 주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과제와 기대가 만족스러운 수준이 되기까지는 한 번의 시도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100여 년 전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원태우 지사의 생애와 의거에 관련된 좀 더 진전된 이해를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측면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첫째,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초기에 안양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주민들의 구체적인 생활사에 관한 공적 혹은 사적 기록을 발굴하고 그것을 당시 조선 사회 전반의 상황과 결부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양 지역사회에 대한 역사적인 조명 작업이 됨과 동시에 원태우 지사의 삶을 직간접으로 밝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둘째, 원태우 지사가 1906년 1월 석방 이후 1951년 타계할 때까지의 삶에 대한 좀 더 사실적인 조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번 연구에서 증언을 한 후손(원 지사의 손자)은 1951년생이라 모든 기억이 부친(1919년생, 작고)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국한되어 있지만, 혹 안양의 원씨 친족이나 안양 지역 원로 중 일제시대의 원 지사 삶을 부분적으로라도 증언해 줄 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원 지사 부친의 집을 강탈하여 서이면 사무소를 만들었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당시 관청 기록을 확인하는 일이 필요하며, 일제 경찰의 원 지사 및 가족에 대한 사찰 기록이 있는지도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서둘러 가능한 증언을 채록하고 관련 기록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안양시 차원의 행 재정적 지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셋째, 원태우 지사의 의거 동기와 의도, 그리고 그 배경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해석이 아직은 미흡해 보입니다. 김명섭 교수님의 발제문에서 원 지사의 유생 가능성, 영등포에 다녀온 이유 등에 관한 의문의 여지를 남겼습니다만, 좀 더 폭넓은 정황이나 기록을 통해 좀 더 설명력이 높은 해석이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특히 원 지사가 돌 하나로 달리는 기차의 특정 좌석을 명중시켰다는 점은 경이롭기도 하지만, 그 전에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지나간다는 사실과 차량 호수 그리고 좌석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했다는 점은 원 지사의 정보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순박한 시골 농부 청년은 아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 다른 맥락에서, 원 지사의 의거에 대한 보도를 통해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기의 조선 독립운동에 끼친 직간접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습니다.그저, 막연한 바람만 열거했습니다만,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심과 학계의 노력이 더 크게 일기를 바라면서 제 토론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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