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40217]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의 양식기 제조(1966년)

안양똑딱이 2024. 2. 17. 17:18

2024.02.17/ #아카이브 #옛사진 #현대양행 #안양기계제작소 #만도기계 #since1966/ 안양 박달동에 자리했던 안양기계제작소(이후 만도기계)에서 양식기를 생산하는 모습이다 자동차강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한 출발점으로 한라그룹 50년 통사에 수록된 기록이다.
1962년 무역업으로 출발한 현대양행(현 한라그룹)은 1964년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며 제조업에 본격 진출했다. 박달동에 있던 안양기계제작소에서는 양식기를 제조 수출했다. 이를 통해 부족하지만 기계공업과 해외사업에 대한 경험을 축적한 현대양행은 1969년 자동차부품 생산에 착수했다. 우리나라 자동차부품산업의 효시였다.
한라그룹 통사 기록을 보면 현대양행을 설립한 정인영 명예회장은 무역업과 현대건설의 해외 사업을 펼치며 기계 생산을 위한 사업구상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포부는 원대했으나 실천방법은 신중했다. 기술을 축적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단순 생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더불어 수출이 가능한 품목이어야 했다 . 미흡하지만 기술 습득과 함께 세계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일본 니카타현의 쓰마베라는 작은 도시를 방문했을 때 본 양식기공장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크고 작은 양식기공장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생산량의 대부분을 미주 와 유럽지역에 수출 하며 고소득을 창출하고 있었다. 양식기는 생산을 위해 낮은 수준이지만 기술이 필요했고 선진국에 수출까지 할 수 있는 품목이었다. 이
에 따라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양행 첫 제조품목으로 양식기를 선택했다. 현대양행은 1964년 3월 13일 상공부에서 장기구상에 의한 양식기 제조 기계의 수입을 허가받은 데 이어 그해6월 1일부터 경기도 시흥군 안양음 박달리 120번지에 안양기계제작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노선버스가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몇 차례 왕복하는 시골이었지만 안양천을 끼고 있어 공장부지로 안성 및춤이었다.
안양기계제작소의 대지는 6만 6115m2(2만 평)이었다. 양식기공장의 규모치고는 너무 큰 것 아니냐며 인근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공사 인부들까지 의아해 했다. 그러나 정인영 명예회장은 당장이 아니라 10년 후를 내다보며 대규모 공장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안양기계제작소는 공장 건설과 기계 설치를 끝내고 1964년 12월 17일 가동에 들어갔다. 시작과 함께 1년후 수출 목표를 48만 4000달러로 잡았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설비 투자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듬해 봄부터는 양산체제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테이블 용품인 스푼,나이프,포크 등을 생산했다. 아트라스(ATLAS)라는 자체상표로 현대양행은 미주뿐 아니라 유럽으로까지 수출국을 다변화해 나갔다. 세계 양식기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생산 방식은 소규모 가내수공업이었다. 이에 비해 현대양행의 안양기계제작소는 현대식 시설과 대규모 공장에서 대량 생산체제를 갖췄던 만큼 품질과 가격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수출량이 늘면서 직원도 곧 400명으로 증가했다. 양식기를 싣고 갈 선편이 부정기적이어서 그 일정에 맞추기 위해 야간작업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원재료인 스테인리스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재무상태는 좋지 않았다. 대안으로 내수용 숟가락과 밥그릇 등을 생산하기로 했다. 당시까지도 우리나라는 놋쇠 식기가 대부분이었다. 스테인리스를 원료로 한 숟가락과 젓가락,밥그릇 등은 가볍고 씻기 편리해 금세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안양기계제작소의 가동이 활발해지면서 현대양행도 성장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966년 3월 1일 현대양행은 상공부로부터 전문계열화 및 수출지정 업체로 지정받았다. 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경영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듬해인 1967년 12월 28일에는 자본금을 1100만 원으로 증자했다. 이를 통해 안양기계제작소의 시설을 증설해 생산활동을 뒷받침하는 한편 성장에 따른 경영내실화를 도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