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옛사진읽기

[20240312]국내 최초 자동차부품 생산한 현대양행 안양공장

안양똑딱이 2024. 3. 11. 23:21

2024.03.12/ #아카이브 #옛사진 #안양 #군포 #한라 #만도 #현대양행/ 현대양행 안양공장의 1970년대 모습.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양행이 만도-한라-HL로 이어지는 그룹의 출발점에는 안양과 군포에 있던 공장들이 한몫을 했다.
1962년 10월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뜻의 사명으로 서울 중구 무교동 92번지에서 ㈜현대양행으로 창립한 후 1964년 6월1일 안양시 박달동 120에 안양공장(안양기계제작소)를 신축한다. 안양기계제작소는 초창기 스푼, 나이프, 포크와 주전자, 냄비 등을 생산한 양식기 공장이었으나 1969년부터 자동차부품을 생산한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현대양행은 안양기계제작소의 자동차 부품 생산이 본궤도에 오르며 기계공업으로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한라그룹 변천사 통사에서 현대양행 안양공장 관련 자료]
 

 

안양공장, 자동차부품 제조 착수

 

1. 자동차부품 제조사업 진출

정인영 명예회장이 현대양행을 창업한 목적은 기계공업 을 비롯한 중공업으로의 진출을 통해 산업보국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무역업과 양식기 사업은 이를 위한 경험 축 적과 사업적 토대였다. 때문에 현대건설이 추진하는 해외 사업과 현대양행의 수출선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에 나갈 때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세계의 기계공업 추이를 세심 하게 살폈다. 그 결과 자동차산업과 중공업이 미래의 산 업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와 때를 같이해 현대건설이 미국의 포드사와 자동 차 조립 기술제휴 협상에 나섰다. 포드사는 한국 진출을 위해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던 참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 은 포드사와 접촉해 현대건설의 자동차산업에 대한 관심 과 조건을 내세워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까지 현 대건설은 자동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196612 월 현대자동차()를 세우고 자동차 생산시장에 뛰어들 었다. 그리고 19672월 마침내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코티 나였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설립과 포드사와의 기술제휴 협상을 주도하며 자동차산업의 핵심은 부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자동차 조립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산기술이라 할 수 없고, 부품 국산화를 이뤄야만 자동차공업의 국내 정착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굳혔다.

더구나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부품 업체가 전무했다. 현대자동차에서도 코티나를 현대양행에 보내 부품 연구를 요청했다. 1968년 봄 정인영 명예회장은 이종영 공장 장. 최계열 부장, 백병철 부장 등 간부들에게 자동차부품 개발을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우선 양식기 생산을 위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프레 스와 금형제조 설비를 활용할 수 있는 자동차부품을 생산 하기로 했다. 히터박스(Heaterbox). 휠캡(Wheel Cap), 자동차 그릴(Grill). 그리고 클러치페달(Clutch Pedal). 와이어하네스(Wire Harness) 등의 생산을 모색했다.

1969년 들어 기존에 생산하던 양식기보다 자동차부품 생산에 주력했다. 양식기 생산라인은 자동차부품 생산라 인으로 바뀌어갔다. 국내 최대인 1200톤 프레스를 일본에 서 도입, 설치하면서 공장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사이드멤버(Side Member), 크로스멤버(Cross Member), 퓨얼탱크(Fuel Tank) 등 프레스 부품들과 히 터(Heater), 엔진 라디에이터(Engine Radiator)와 같은 기능 부품들로 제품선을 확대했다. 1972년에는 포드의 영 국 공장으로 크로스멤버를 납품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70년에는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생산해 서울 여의도 시 범아파트에 납품했다.

 

2. 기술제휴를 통한 자동차부품 국산화

현대양행은 프레스 부품과 기능 부품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수입에 의지해오던 자동차부품의 연차적 국산화 를 추진했다. 본격적 부품 기술은 전장품(電裝品)과 속업 소버(Shock Absorber), 에어컨 등이었다. 정인영 명예회 장은 현대양행 간부들에게 해외 유수의 자동차공업 현장 을 돌아보도록 하는 한편 기술제휴선을 찾아 나섰다.

당시 전장품, 쇽업소버 기술은 영국이 가장 앞서 있었 다. 전장품은 루카스사, 속업소버는 암스트롱사에 기술제 휴를 타진했다.

그런데 루카스사, 암스트롱사 모두 상당한 기술료를 요구했다. 자신들의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자동차 부품 기술 이전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정인영 명예회장은 기술제휴선을 일본 쪽으로 선회했 다. 도키코사와 미쓰비시사를 대상으로 각각 속업소버와 전장품 기술제휴를 협의했다. 당시 일본도 영국으로부터 도입한 기술을 축적하고 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양사가 힘을 합친다면 기술 면에서 영국을 앞지를 수 있지 않겠 냐는 정인영 명예회장의 말은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현대양행은 19702월 일본 도키코사와 속 업소버 등 경차부품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어 그해 4월에는 미쓰비시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스타트모터(Start Motor), 얼터네이터(Alternator), 디 스트리뷰터(Distributor) 등의 생산을 개시했다. 미쓰비 시사와는 루카스사가 요구한 기술료의 10분의 1 수준인 3만 달러에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이에 앞서 19703월에는 미국의 미첼사와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카쿨러(Car Cooler) 생산을 개시했다.

이처럼 기술제휴를 통한 끊임없는 기술개발 결과 현 대양행은 1972년 전장품과 경차부품의 완전 국산화에 성 공했다. 전장품은 스타트모터, 얼터네이터, 와이퍼모터 (Wiper Motor), 레귤레이터(Regulator), (Horn), 이그 니션코일(Ignition Coil) 등이었다. 경차부품은 속업소버, 서스펜션스트리트(Suspension Strut), 엔진 라디에이터. 히터 난방용 라디에이터를 국산화했다.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자동차부품의 국산화를 주도하 며 한국 자동차공업 발전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안양공장은 양식기에서 자동차부품으로 생 산품목을 완전히 전환하며 회사 발전의 초석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