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이하나]나의살던경기도_지금 여기, 안양에 삽니다(2024.10.02)

안양똑딱이 2024. 10. 9. 06:33

경기마을공동체지원센터 소식지

나의 살던 경기도 3.

지금 여기, 안양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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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엔마프 #28] 나의 살던 경기도 3. - 지금 여기, 안양에 삽니다

작성일 : 2024.10.02 16:37:19

 

안양의 안, 은 길게 발음해야 그 맛이 난다. 한국어의 장음과 단음이 있다는 걸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도, 안양의 안은 안산의 안과, 안성의 안과 달리 느껴진다. 경기도 외 지역에 가서 '안양'이라고 말을 하면 대체로 안산과 헛갈려들 한다. 희한한 건, 안성과 헛갈리는 사람은 없다는거다. 라면 이름 때문인가.

 

2005년 처음 안양에 자리 잡은 곳은 원도심이었다. 네모반듯한 대지에 집들도 딱딱 각을 맞춰 네모반듯하게 들어선 곳이다. 지도만 보고 있어도 계획도시라는 걸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한가운데는 네모반듯한 시장이 있었고 거기서 뭔가 희한한 짓을 작당하는 무리도 보였다. 그 시장은 자연스럽게 생긴 시장이 아니고 도시계획 단계에서 누군가가 일종의 오픈형 쇼핑몰로 시장을 구성해 분양한 곳이다. 당시로서도 지금으로도 상당히 놀라운 구상인데, 이 분양형 시장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고 대형 도매시장을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들었다. 빈 점포가 몇 개 있었는데 그곳에 모여 작당하는 이들은 예술가들이었다.

 

내가 살던 곳 인근엔 안양천이 있었다. 분명히 나도 어린 시절엔 개천 근처에 살았다. 의정부와 도봉구, 강북구를 거치며 계속해서 중랑천 옆에 살았는데 물이 불어 무서웠던 중랑천 말고 다른 이미지는 없다. 당시엔 수변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그저 치수의 관점에서만 하천을 바라봤기 때문일 거다. 수십 년을 지나 처음 만난 안양천은 시민들이 즐기고 누리는 곳이었다. 시절이 달라졌고 하천들은 깨끗해져서 사람들이 더 가까이 다가갈 여지가 생긴 덕이겠다.

 

안양에 오기 전에 내가 알고 있던 안양은 부정적인 단어 몇 개로 정리되었다. 안양깡패, 안양천 똥물. 사실 안양천은 1980년대만 하더라도 한강지류중 최악의 오염도로 악명이 높았다. 안양토박이들은 나에게 아마 태어나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을 냄새가 났다고 전했다. 안양천은 안양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안양과 군포, 의왕에서 출발한 몇 개의 지천이 안양에 모여 한강으로 흐른다. 하천 주변에는 사람들만 모여 살았을 뿐 아니라 1970년대부터 각종 공장이 물을 끌어쓰기 좋아 난립했다. 방직공장과 제지공장이 많았던 안양천변은 산업폐수로 인한 오염이 극심했다. 1990년대 들어 안양천변에 모여든 인구가 늘어나서인지 시민중심의 안양천 정화활동이 시작되었고 시청도 적극적으로 안양천 정화에 대응하며 민관합동의 안양천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활동은 상당히 모범적인 결과를 냈고 안양천은 안양시민의 자부심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던 안양천 똥물은 아주 먼 과거의 이야기였다.

 

안양깡패라는 말은 과거 안양의 호황시절 그만큼 돈이 많이 돌았다는 얘기다. 안양은 중견기업 이상의 큰 회사들이 많았고, 급여도 좋았다고 한다. 안양의 제지회사를 다녔던 한 노인은 급여도 훨씬 높았고 보너스가 900%까지 나와서 장가 가기 좋은 직장이었다고 소회했다. “월급날만 되면 남부시장이 미어터졌지.”라는 말에 기분 내러 한잔하셨느냐고 물으니 아니, 그날은 밀린 외상값 갚는 날이고 또 외상 시작하는 날이지.”라며 껄껄 웃었다. 안양의 유명 맛집이라면 해물탕을 손꼽는 노인들이 있는데 바다와 가깝지도 않은 안양에 해물탕이라니 뜬금없는 소리 같다만, 돈이 돌던 시절이라 비싼 식재료로 천연의 맛을 내는 음식이 각광을 받았던 건 아닐까. 현금 돌던 시절에는 조직폭력배들이 지역에서 유흥업계 이권다툼을 했던 모양이다. AP와 안양타이거라는 대표적인 조직이 있었는데 AP는 군포지역으로 이동했다지만 들은 적 없고, 안양타이거의 명맥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몇 년 전에도 뉴스에 한 번 등장했다. 평촌신도시가 있는 동안구지역에는 호계동과 범계동이 있는데 호계의 호(虎溪)와 범계의 범이 둘 다 호랑이를 말한다. 안양타이거 명칭은 여기서 온 것이다. 요즘도 가끔 술집에서 안타의 전설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을 때가 있다. 한때 인덕원은 마계라 불릴 정도로 유흥업소가 많았지만 2020년 정도부터는 건전해졌다. 인근 지역 상권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젊은이들도 많이 찾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안양에 오기 전 갖고 있던 선입견 두 가지는 먼 옛날의 일이 되었다. 요즘 안양은 깨끗한 하천과 더불어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910월 추석 안양충훈시장 이하나

 

그 동네는 네모반듯한 평지에 뒤편에 야산이 하나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친척이 있는 옆 동에 닿았다. 내가 키우던 커다란 개를 끌고 방문하다가 아이를 낳은 뒤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헐떡이며 언덕을 넘어갔다. 언덕에는 도서관이 있어 아이를 업고 도서관에 갔다가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열람실에서 도망 나오기도 했다. 도서관은 늘 적당히 고즈넉했고 앞마당이 잘 꾸며져 있어 좋았다. 동생이 찾아오면 집 주변의 안양천에 해가 질 때쯤 유모차를 밀고 개를 데리고 안양천 산책을 했다. 코스모스나 강아지풀을 꺾어 아이를 보여주었다. 개는 꼬리에 강아지풀을 묻혀오기도 했다. 그 집은 햇빛이 잘 들어 저녁이면 길게 석양이 마루에 드리웠는데 나는 하루 종일 기어다니는 아이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건물 꼭대기집이었지만 옥상을 쓸 수 있어 좋았다.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아 입양을 보냈다가 파양 당한 애까지 돌아와 우리 집 옥상엔 다섯 마리의 개가 있었다. 가장 큰 개는 해 질 때마다 산을 바라보며 하울링을 해댔다. 옥상에서 다른 집 옥상들을 바라보면 개가 있기도 하고, 화단을 가꾸거나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의 집 옥상을 바라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시장에 가면 새댁이라고 불렸다. 그때도 이런저런 사건들은 벌어졌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시절이었다. 놀이터에는 항상 아이들이 많았다. 동생은 놀이터를 가보더니 학원을 안 다니는 애들이 이렇게 많은 동네는 처음 본다.”라고 했다.

 

첫눈이 내린 뒤 어느 날 집주인이 찾아왔다. 무슨 세금 때문에 건물을 급히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마 종부세였을 것이다. 중국에서 4년 반을 살다 들어온 나는 한국사회에 대한 감이 완전히 떨어진 상태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젖먹이 아이와 부대끼느라 뉴스를 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일대가 모두 재개발이 된다고 했다. 새로 건물을 산 집주인은 우리가 살던 5층으로 이사오겠다고 해서 급하게 집을 뺐다.

같은 안양 내에서 빨리 이사를 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안양 부근의 서울로 나갔다가 몇 년 후 다시 안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자라서 어린이집에 다녔다. 이번엔 평촌신도시의 끝자락이었다. 새로 이사한 곳도 안양천의 지류인 학의천변에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어느 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개와 천변을 산책하다가 무장군인을 만났다. 군인들은 천변을 수색중이었다. 바로 전날 강아지를 잃어버린 주민이 천변에 내려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떠올랐다.

 

그제야 나는 수년째 안양에 적응을 못 하는 이유를 찾았다.

 

경기도와 서울 북부에서 자란 나에게 무장군인은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이웃이었고, 군복 입은 사람들은 도시의 비둘기만큼 많았다. 안양은 그 흔하던 군인이 없었고, 장갑차나 탱크도 지나가지 않았다. 검문소도 없고 헌병의 찰랑거리는 구둣발 소리도 들은 지 오래였다. 게다가 평평한 땅, 언덕이 없는 길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노숙자도 본 지 오래되었다. 안양역에 한 명 있었던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경기와 서울의 북쪽을 생각하면 안양은 전쟁이 가시화되지 않는 평화로운 땅이었다. 늘 군인과 무기를 보고 자란 어린 시절과 그렇지 않은 유년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안양 사람들은 희한하게 안양 생활권 밖으로 잘 나가지 않고 자기 동네 자랑이 대단했다. 밀집된 도시에 조밀하게 인프라가 갖춰져 있어 굳이 안양을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직장까지 안양 생활권에 있다면 대단히 편리한 도시다.

 

2012년 관양시장 문전성시 사업 이하나

 

아무래도 재미없던 평촌신도시에 살며 언젠가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차에 SNS로만 알던 분이 메시지를 보내와 시장문화사업에 참여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가족 중에 중환자가 있어 병원 업무를 전담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외부 활동을 한다는 게 가족들에겐 환영받지 못할 일이라는 게 빤했지만, 급여를 받고 출근하는 일도 아니니 도전해 보겠다고 흔쾌히 나섰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단의 스토리텔러였고 구성원 중 젊은 편에 속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와 역할을 맡게 되니 신나기도 해서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거점 공간에 자주 들러 몇 가지를 도맡아 했다. 사진도 찍고 홍보물도 만들고 회사에서 했던 것의 관점을 달리해서 작업을 맡아봤는데 큰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니니 부담이 적었다. 누구의 승인이 필요하거나 딱히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업단장은 내가 처음 안양에 자리 잡던 동네의 시장에서 여러 예술가와 모여 작당하던, 그 집단의 대표자였다. 문화예술기획자이면서 예술가이기도 해서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다.

 

2012년 관양시장 마을장터 이하나

 

A4 용지에 독서모임과 마을기자단을 모집한다는 허접한 홍보물을 만들어 시장통에 서서 돌리기도 하고 각 점포의 사진을 찍어 사업공간에 전시도 했다. 우리는 몇 달에 한 번씩 마을장터를 열었는데 인근 초등학생들에게 벼룩시장공간을 내어주면서 미취학아동인 내 아이도 작아진 제 옷을 가지고 나와 팔았다. 시장 상인들은 행사 날에 자기 장사가 바쁜데도 불구하고 부녀회 중심으로 전을 부치고 반찬을 만들어 팔다가 잠깐 짬이 나면 무대에 올라 흥겹게 노래도 불렀다.

 

지역언론사에서 독립한 분이 마을기자단을 이끌었고 나에게도 업무를 맡겨주었다. 몇 가지 지도를 받아 두 권의 마을잡지를 만들었다.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하고 시장 부근 주민의 옛이야기도 듣고, 사업단의 활동 내용으로 꽉꽉 채웠다.

 

2014년 안양 탐사대 활동 중 탐사대장 최병렬 제공

 

시장은 새벽 4시부터 움직였다. 생선 가게와 떡집이 가장 일찍 불을 켰다. 수산물 트럭이 생선 가가에 물건을 내려놓고 떠나면 도매시장에서 장을 봐온 여성 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자리를 정리했다. 하루 종일 작은 공간에서 쪼그려 앉아 나물을 다듬는 그들의 풋것은 모두 어여뻤다. 그해 나는 가족상을 치렀고, 사업단 구성원들이 문상을 왔다. 사업기간 중에 우리는 안양토박이 선배를 모시고 안양골목탐사를 시작했다. 국가 예산을 받았던 사업단은 기간이 종료되어 해체되었지만, 가끔 안부를 전하며 인연을 이어간다. 시장은 상인회가 주도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돗자리를 깔고 장난감을 팔던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이제 그 먼발치에서 또 다른 입장이 되어 아주 가끔 시장에 간다.

 

 

200910월 추석 안양충훈시장 이하나

 

나의 살던 경기도를 쓰기로 하고 그간 살았던 지역을 다시 더듬어봤다. 서울 북부에서 태어나 경기도 북부로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 북부와 원도심을 한 바퀴 돌았던 내가 일평생 가장 오랜 기간을 산 곳은 안양이다.

 

경기 남부와는 연고가 전혀 없어, 단 한 번도 여기가 고향이라 여긴 적 없다. 언제나 스스로를 서울 북부 사람이라고 정체화했으나 별 의식 없이 안양에서 가장 긴 기간을 살고 있다.

 

지역, 마을, 공동체, 활동이라는 단어를 처음 발음해 본 것도 여기다. 길게 늘여 읽어야 하는 안-양에서.

 

어쩌면 경기도민에게 고향이 딱히 한 곳으로 지정될 수 있을까. 안양 사람들은 군포와 의왕, 과천을 넘나들며 살고, 수십 년 전에는 시흥군이기도 했다. 경기 북부와 남부는 기후도 여건도 꽤 다르지만, 경기도 어디에서나 보이는 풍경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신도시가 있는 곳, 아직 논밭이 펼쳐진 곳, 단층으로 된 읍내가 있는 곳부터, 다세대 주택이 가득 들어차 주차난으로 다툼이 끊이지 않는 골목까지, 각각의 도시가 경기도의 모든 것을 품고 있다.

 

한 번 들어서면 쉽게 떠나지 않는 이곳을 나는 우물 같은 곳이라 표현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꼭 우물을 벗어나야 할까. 개천을 따라 폴짝폴짝 뛰어 강으로 바다로 가면 속이 시원할까. 잘 모르겠을 때는 고속도로를 타고 먼 바다를 보러 다녀오면 그 뿐.

 

불교의 극락을 뜻한다는 이 도시의 이름은 발음할 때마다 어딘가 푸근하게 뭉개지는 느낌이 든다. 무엇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필요 없이, 그저 선명한 것은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경기, 안양에.

 

2024, 나의 살던 경기도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