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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3]안양 한자 지명 安養∙安陽 다르게 표기한 지도들

안양똑딱이 2025. 3. 3. 20:48

2025.03.03/ #아카이브 #역사 #기록 #옛지도

 

현재의 안양의 한자 지명은 '安養'이다. 안양시 지명유래를 보면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된다. 이에 일부 향토연구자는 안양(安養)은 부근에 안양사(安養寺) 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후기 정조 때 세운 안양참(安養站)과 관련짓는 것이 나을 듯하다고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안양이 기록에 표기된 것은 언제일까.

 

불국정토를 일컫는 안양이라는 말이 지명으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영조 35년(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금천현도(衿川縣圖)에 실려 있는데,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금천현에 속한 안양리(安陽里)로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과천 쪽에서는 여지도서 이후 30년이 지난 정조 13년(1789)의 호구조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이 지역 리(里)의 명칭이 보인다. 즉, 과천군 하서면 6개리 중의 하나로 안양리(安養里)를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의 안양역 인근으로 추정된다. 즉, 안양리는 현재의 안양대교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지역에 나뉘어져 있었던 옛 안양리가 속했던 시흥군과 과천군의 경계는 안양유원지에서 발원해서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삼성천이었다. 역대로 삼성천 이북은 시흥에 속했고, 그 이남은 과천이 되는 것이다.  1941년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행정관청으로 정식 사용된다. 시흥에 속했던 안양리(현재의 석수동)가 안양에 속하게 되는 시기는 1963년 1월 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을 통하여 박달동과 함께 광명에서 안양읍으로 편입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안양의 뿌리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시흥이 아니라 과천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같이 행정구역상 안양은 과천현과 금천현(시흥)의 증간에 자리했던 이른바 변방이었다. 옛지도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당시 안양 에 행정 관아는 없지만 만 지형상 표기로 안양이 기록되어 있고, 다리, 하천, 역 등에 안양이 표기돼 있다. 

 

하지만 고대와 근현대 옛지도를 보면 안양의 한자 지명이 시기에 따라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과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을 표기돼 혼란을 야기한다.

 

 안양(安養 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시기에  다양한 지도속에서 등장하는데 지형과 행정 지명뿐 아니라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시설물에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이와관련 일부 역사연구자는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양자를 볕양 자로 표기한 安陽을 사용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07년 무렵에  양자를 기를양 자로 표기하면서 安養으로 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 이전 발행한 지도에 安養 安陽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왔던 것으로 확인된다.

 

옛지도를 보면 안양촌(安陽村), 또는 안양리(安陽里) 마을이 표기돼 있다. 1910년 무렵까지 기록돼 있던 안양(安陽) 한자 표기는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및 통폐합 이후 아무 이유없이 안양(安養)으로 통일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일제강점기 당시 시흥군에는 서이면과 동면에 각각 동명의 ‘安養里’가 있게 되었으며, 두 면이 한 읍으로 합쳐지면서 한때 한 읍에 두 개의 안양리가 공존하는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진 적도 있다.

 

과천현 하서면(下西面), 또 시흥군 서이면과 동면 관할의 일개 동리이던 두 안양리가 1941년에 면 이름이 되고, 1949년에는 읍이 되었으며 1973년에 읍이 시로 승격되었다.

   

고지도에서 안양의 한자 표기를 찾아보았다. 

 

행정구역 표기에 있어 안양(安養)이란 지명은 여지도서(영조35, 1759)에 금주현(衿州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등장한다. 행정표기로는 첫 기록이 아닐까 싶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에도 安養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동여전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의 대동여지도와 내용이나 구성이 거의 동일한 채색필사본 지도이다.

이후 1872년 지방지도에는 안양리(安陽里)로, 조선지도 과천현에 표기된 안양의 지형을 安陽, 금천현 지도에서는 安陽, 팔도군현지도 과천현과 금천현 지도에서는 安陽으로 표기하는 등 양자 한자 표기를 볕양으로 기록했다.

반면 지승의 과천현과 금천현 하천표기에서는 안양(安養)으로 한자 표기가 기를양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지도 -과천에도 지형상 안양이 安陽으로 표기돼 있다.

 

이후 발행된 근현대대 지도에서 안양 한자 지명은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이 오락가락하며 표기된다.

안양(安陽) 한자 지명으로는 1890년대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에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 시기인 1910년대 블행한 지도에는 대부분 安陽으로 기록돼   한자 표기가 기를양을 사용하였다. 

 

한편 안양은 조선시대 과천과 시흥의 일부가 합쳐진 곳이다. 안양시 동부는 조선시대 과천현의 상서면·하서면 지역이며, 서부는 조선시대 시흥현의 군내면과 서면의 일부에 해당한다. 과천현 하서면에는 안양리(安養里), 금천현 군내면에는 안양리(安陽里)라는 한자 표기가 다른 지명이 있었다.

 

안양시 지명유래 <석수동>편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금천현(衿川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였다가, 정조 19년(1795) 음력 윤 2월 1일 시흥현(始興縣) 현내면(縣內面) 안양리(安養里)로 되었다가,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안양리(安養里)로 개칭되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 안양리(安養里)라 했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에 따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리(新安養里)로 되었다가, 다시 1964년 1월 1일 안양읍(安養邑) 신안양제2리. 3리(新安養2里.3里)로 개편된 후, 1973년 7월 1일 시제가 실시되면서 안양시(安養市) 석수동(石水洞)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시흥군읍지 등 옛 문헌을 정리한 글을 보면 시흥군(始興郡) 군내면(郡內面) 당시 안양리 한자 표기가 安陽里다.

 

현재도 행정기록이나 시사, 전문가들의 글을 보면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 표기가 시기 또는 글에 따라 오락가락인 것이다. 安養과 安陽 안양 한자 표기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대동여지도(1861)
대동방여전도(1861)

 

시흥군읍지(1899)
시흥군읍지(1899)
지방지도(1872)
조선지도-과천
조선지도-금천
지승-과천현
지승-금천현
팔도군현지도-괴천
팔도군현지도-금천
해동지도-과천현
해동지도-금천현
조선신지도
조선철도지도(1913)
조선교통전도(1910)
군포장(1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