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자료

[20250304]안양(安養) 한자 지명 과거에는 <安陽>

안양똑딱이 2025. 3. 4. 20:59

안양리-시흥군읍지(1899)

 

2025.03.04/ #기록 #역사 #지명 #안양 #安陽 #安養/

 

조선시대에 수원을 둘러싸던 5개 군현, 즉 용인 · 진위 ·안산 · 시흥 · 과천 중에서 북쪽의 두 개 현이 곧 시흥과 과천이다.

 

현재의 안영권역 4개 시, 즉 과천 · 의왕 · 안양 · 군포는 서로 붙어 있어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두 길로 갈라지는 서울길 때문에 시흥길에 속한 안양과 군포, 과천길의 과천 그리고 두 길로 갈라지기 전의 의왕으로 나눌 수 있다.

 

안양시 지명유래 설명을 보면 안양(安養)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안양사(安養寺)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양은 경부선 철도가 놓여지고 안양역이 생기기 이전까지 행정구역상에서 옛 금천현(衿川縣.시흥군)과 과천현(果川縣)의 중간에 자리했던 이른바 두 행정구역의 변방이었다. 그런데 근현대 옛지도를 보면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가 시기에 따라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으로 각각 다르게 표기된 경우가 적지 않다.

 

안양(安養安陽) 한자 지명의 각각 다른 표기는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시기에 다양한 지도속에서 등장하는데 지형과 행정 지명뿐 아니라 안양천석교(安養川石橋, 安陽川石橋), 안양사, 안양천, 안양역 등 다리, 사찰, 역 등 시설물에서 ' 安養' 또는 '安陽'으로 이중으로 표기됐음을 보여준다.

 

불국정토를 일컫는 <安養> 이라는 표기를 지명으로 사용된 기록은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와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에서 발견된다. 대동여전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의 대동여지도와 내용이나 구성이 거의 동일한 채색필사본 지도로 대동여지도에서도 '安養' 한자 표기를 볼수 있어 현재의 안양지역을 오래전부터 안양이라 불렀음을 알수 있다.

 

다른 지도들을 살펴보면 영조 35(1759)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금천현도(衿川縣圖)에 실려 있는데, 삼성산 자락 지금의 석수동 일대를 금천현(衿川縣)에 속한 안양리(安養里)로 표시하고 있다.

 

이후 1872년 시흥군 지도와 지방지도에는 안양리(安陽里), 조선지도 과천현(果川縣) 편에는 안양의 지형을 安陽, 금천현(衿川縣) 편에서는 安陽驛, 팔도군현지도 과천현(果川縣)과 금천현(衿川縣) 편에서는 安陽으로 표기하고  조선지도 -과천현(果川縣)편에도 지형 표기에 있어 안양을 安陽으로 등 '양'자 한자 표기를 '볕양'으로 기록했다.

 

반면 지승의 과천현(果川縣)과 금천현(衿川縣) 하천 표기에서는 안양(安養)으로 한자 표기가 기를양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1899년(光武3年) 발간한 시흥군읍지(始興郡邑誌) 지도 이미지속에는 삼성산, 삼막사, 염불암, 만안교, 안양교 등이 표기된 지금의 안양역 주변과 남쪽 일대를 안양리(安陽里)로 표시하고 속지의 기록에 始興郡 관내 郡內面에 안양리(安養里)로 기록하고 있어 과천군에 속한 지역에 안양리(安陽里), 시흥군에 속한 지역에 안양리(安養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구한말부 시기인 1890년대 발행된 지도에서는 몇집 되지 않아 한적한 동네를 명시하는 안양촌(安陽村)이라 표기했다

 

일제감점기인 1905-1910 발행된 근현대 지도에서는 안양 한자 지명은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이 오락가락하며 표기되는데 1910년대 발행한 지도에는 대부분 한자 표기를 볕양으로 명시한 安陽으로 표기했으며 그이후에는 기를양으로 명시한 安養으로 바뀐다.

 

이와관련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의 한자 지명 변화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여지도서 이후 30년이 지난 정조 13(1789) 발간한 과천현(果川縣)의 호구조사 기록을 찾아 확인한 결과 처음으로 이 지역 리()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 과천군 하서면 6개리 중의 하나로 안양리(安陽里)를 기록하고 있는데 하서면은 현재의 안양역과 남쪽 호계동까지 지역으로 현재의 안양시 중심지역이라는 점에 안양의 한자 표기는 安養(편안할안에 기를양)이 아니라 安陽(편안할 안에 볕양)이 옳을것이다.

 

과거 안양리는 현재의 안양대교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펼쳐져 한자 표기가 다른 두개의 지역이 안양리 명칭으로 존재했다. 두 지역의 경계는 안양유원지에서 발원해서 안양천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삼성천으로 삼성천 이북은 금천(시흥)에 속했고, 그 이남은 과천이 되는 것이다. 즉 안양대교 북쪽에는 금천현(衿川縣)에 속한 안양리(安養里.安陽里), 남쪽에는 과천현(果川縣)에 속한 안양리(安陽里)가 존재한 것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 화성 능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안양참(安養站)이 언급된다.

 

지금의 안양은 당시 과천현(果川縣)에 속한 안양리(安陽里)에 속한 지역으로 이를 보여주듯 근현대 지도에 안양촌(安陽村), 안양역(安陽驛) 등이 많이 표기됨을 볼수 있다.

 

그런데 안양촌(安陽村), 또는 안양리(安陽里)로 표기되던 마을이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및 통폐합 때 아무 이유없이 安養里가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일제강점기 발행된 지도들을 살펴보면 1905년부터 1910년 무렵까지 ' 安陽'으로 표기되던 지도들은 이후부터 '安養'으로 기록된다.

 

일제는 19131229일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111()의 위치·관할구역과 부군(府郡)의 명칭·위치·관할구역을 공포하고, 191431일부터 시행함으로써 전국 행정구역의 대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어서 191441일 시행한 경기도령 제3호로 면 통폐합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천현(果川縣) 하서면(下西面)이 상서면(上西面)과 합면하여 시흥군 서이 (西二面)이 되면서 하서면(下西面) 관내에 있던 안양리(安陽里) 행정명이 安養里로 바뀐다.

 

또 시흥군 현내면(縣內面) 이후 군내면(郡內面)이 시흥군 동면(東面)과 합면하여 시흥군 동면(東面이 되면서 군내면(郡內面) 관내에 있던 안양리(安陽里) 행정명이 '安養里' 로 개칭된다.

 

두 지역의 '安陽里' 한자 표기가 '安養里'로 바뀌고 두 개의 안양리(安養里)가 공존하는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시흥군(始興郡) 서이면(西二面)1905년 안양역이 개통된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발전하면서 191441일 시흥군 호계리에 개소했던 면사무소가 191776일 안양역 인근으로 이전해온다. 서이면사무소(西二面事務所)194110월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행정관청으로서의 안양(安養)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1947년에 시흥군청이 영등포에서 안양면으로 이전하며 안양면은 1949년에 안양읍으로 승격하며 근대도시가 된다.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의 안양리(安養里)196311일 법률 제1175군 관할구역 변경 및 면의 폐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 시흥군 동면이 안양읍에 편제되는데 이 과정에서 안양리(安養里)가 기존의 안양읍내에 안양리란 행정지명이 있었으므로 신안양(新安養里)로 개칭된다.

 

이와같이 옛 행정구역 개편 기록을 보면 '安養里'' 安陽里' 표기가 혼용으로 등재하고 있음이 자주 발견된다. 지금도 옛기록과 문헌을 보면 어느것이 맞는것인지 햇갈릴 정도라는 점에서 안양의 한자 지명 표기는 혼란을 주고있다.

 

한편 시흥군(始興郡) 동면(東面)에 속했던 안양리(현재의 석수동)가 안양면에 속하게 되는 시기는 196311일에 시행된 행정구역개편을 통하여 박달동과 함께 광명에서 안양읍으로 편입되면서 부터이다. 따라서 안양의 뿌리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시흥(금천)이 아니라 과천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1670, 여지도서-과천현
여지도서-괴천현
시흥군읍지(1899)
사흥군읍지-안양리(安養里)
1899 년 군내면 ( 郡內面 )  안양리 ( 安陽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