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5/ ##아카이브 #고문서 #대촌 #안양천 #신중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에 기록된 안양천의 엣 지명 대천(大川)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천(大川)이 금천현의 읍치(邑治)에서 서쪽으로 5리(里)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의 관악(冠岳) 청계(淸溪) 등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나와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陽川縣)의 철곶포(鐵串浦)로 들어간다.
당시 금천현 구간을 대천이라 기록한 것인데, 금천현에서 가장 큰 하천이란 뜻으로 보통 순 우리말 '한내'에 대한 한자표기로 많은 고을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천현의 안양천 구간을 철곶포라 불렀음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포구나 갯가의 특수한 지형을 하천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읍치(邑治)는 고을의 수령이 정사를 펼치는 관아(官衙)가 있는 곳을 일컫는 말로 금천현의 관아는 지금의 금천구 시흥동에 있었다. 그리고 양천현에 있다는 철곶포는 양평교와 목동교 사이 양정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포구(浦口)였다. 대천(大川)은 아마도 말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일 것이다. 말매미 말벌 말잠자리 등에서 보듯 말이 큰 것을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1530년(중종 25)에 왕명으로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1481년(성종 12)에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중수(重修)한 것으로 1611년(광해군 3)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전국 지도인 「팔도총도(八道總圖)」가 실려있고 각 도 앞부분에는 각 도의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각 도의 군현별로 건치 연혁 및 관원, 군명, 성씨, 산천, 토산, 누정, 학교, 역원, 불우, 사묘, 총묘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611년에 간행된 목판본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다.
사실 안양천의 본래 이름은 다양했다. 지금은 안양천으로 부르고, 그것이 공식 명칭이 되었지만 사실 지천은 물론 지역마다 불리우는 이름이 있었다.
안양천은 1400년경에는 큰물이라는 의미의 대천(大川)으로 불렀다 대천은. ‘말내’의 한자 표현이다. 말은 ‘크다’라는 의미의 접두사다. 조선시대부터는 지역 또는 구간에 따라 대천 또는 한내, 여러지류가 모여 흐르는 여울이라 하여 기탄(岐灘), 갈천(葛川), 호계(虎溪), 인덕원천, 학고개천, 검암천, 누동천, 오목내, 맑은내, 안양천(安陽川) 등으로 다양하게 호칭되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안양천으로 통칭되어 불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금천현 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鐵串浦)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여 대천이라 기록하고 있다.
과천현 편에는 ‘현의 남쪽 14리에 인덕원천(仁德院川)이 있고, 현의 서쪽 19리에 학고개천(鶴古介川)이 있다’고 하여 안양천의 상류를 인덕원천, 중류 지역을 학고개천으로 각각 부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과천현 편에는 ‘안양천(安陽川)이 현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사근천(沙斤川)과 인덕원천이 금천에서 합류하여 흘러간다’고 기록하고 있어 오늘날 쓰는 안양천(安養川)의 한자와 다른 글자로도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정호(金正浩)가 그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결국 안양천이 대천·인덕원천·학고개천·안양천(安陽川)·기탄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현종(顯宗) 때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금천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호계(虎溪)는 민간에서는 대천(大川)이라 칭하는데 금천현의 읍치에서 서쪽으로 4리(里)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의 관악(冠岳) 청계(淸溪) 등 여러 산에서 발원하여 나와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陽川縣)의 철곶포(鐵串浦)가 되어 한강(漢江)으로 들어간다.
안양천이 호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된 것은 검지산의 또 다른 이름인 호암산(虎巖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검지산은 금천현 읍치(邑治)에서 동쪽으로 5리에 위치한 산이다. 검지산이 호암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검지산에 범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을 보면 호암산(虎巖山)이 금천현의 읍치에서 동쪽으로 5리(里)에 있다. 범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그러한 까닭으로 이름이 되었다. 호암산에서 호(虎)를 취하여 호계(虎溪)라 불렀을 것이다. 옛날 호계리(虎溪里)라는 마을도 있었다.
안양천의 또 다른 이름으로 검암천(黔巖川)이 있다. <<여지도서>> <금천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검암천(黔巖川)이 금천현 읍치에서 남쪽으로 3리(里)에 있다. 관악(冠岳) 청계(淸溪) 두 산에서 발원하여 나와 여러 내가 합쳐 대천(大川)이 된다. 수 십리를 관개(灌漑)하는데 북쪽 철곶포(鐵串浦)로 흘러간다. 아마 검암천의 검암(黔巖)은 호암산의 호암(虎巖)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었을 것이요.
어쨌거나 또 김정호(金正浩, ?~1864)가 1864년에 저술한 <<대동지지(大東地志)>> <시흥(始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대천(大川)은 검암천(黔岩川)이라고도 한다. 수원(水原) 광교산(光敎山)과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에서 발원하여 합쳐지는데 서쪽으로 흘러 군포천(軍?川) 호계(虎溪) 안양천(安養川)이 되고 금천현 읍치를 돌아 서남쪽으로 꺾여서 북쪽으로 흘러 현(縣)의 서회리(西回里)를 지나 북쪽으로 15리에 이르러 기탄(?灘)이 되고 철곶포(鐵串浦)가 되어 양화도(楊花渡) 아래로 들어간다.
여기서 서회리는 지금은 경기도 광명시(光明市) 소하동(所下洞)이 된 소하리(所下里)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소하리는 당시 시흥현 서면(西面)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기탄은 구로동 부근의 안양천을 일컫던 말이다. 그곳에 옛날 기탄교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대동지지>>가 안양천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천의 일부 구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안양천이란 이름이 어떤 연유로 대천이라는 이름을 삼켜버리고 공식이름이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안양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누동천(樓洞川)도 있었다.
<<여지도서>> <금천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누동천(樓洞川)이 금천현(衿川縣) 읍치(邑治) 남쪽 박달리(博達里)에 있다. 곱고 깨끗한 모래와 흰 돌이 수십 리에 걸쳐 평평하게 펼쳐 있는데 아래로 양화진(楊花津)에 닿아 있다. 중국사신 주지번이 석주(石洲) 권필(權?)과 더불어 양화도를 유람할 때 누동천의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말하기를 맛이 동정(洞庭)의 물고기의 맛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대개 내의 형세가 평평하고 험한 여울과 큰 바위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 맛이 동정호(洞庭湖)의 물고기와 흡사한 것이다.
또 맑은내, 오목내, 갈천이라는 이름도 있다.
배우리(1938~ )씨가 1994년에 출간한『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1』을 보면 오목내(오목천(五木川))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은 안양천(安養川)으로 불리고 있는 내(천(川))이다. 안양시에서부터 흘러와 영등포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간다. 내가 오목하다고 해서 ‘오목내’인데 다른 이름으로는 ‘갈천(葛川)’이라고도 하고 내의 상류쪽에선 ‘맑은내’로도 불리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오목교(梧木橋)’는 이 내에 놓인 다리로, ‘오목내’의 ‘오목’을 이름에 넣었다.
'갈천(葛川)'은 안양천의 옛 이름으로 전해진다. 『여지도서』「과천현』산천 항목에 안양천(安陽川)이라 하여 기록되어 있고,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 하나의 근원이 사근천(沙斤川)이고, 또 하나의 근원은 인덕원천(仁德院川)인데, 합해져서 금천현의 염천(塩川)으로 흘러간다."라고 나온다.
여지도서 등 일부 지도에는 안양천(安陽川)으로 표기돼 오늘날 쓰는 안양천(安養川)의 한자와 다르게 표기하였음을 볼 수 있다. 사근천은 현재의 안양천 상류에 있는 의왕시 고천리의 사그내이며, 인덕원천은 현재의 안양천 지류인 학의천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와 달리 하천의 구간마다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 안양천 상류는 사근천이라고, 안양시와 안양교 부근만을 안양천(安陽川)이라 불렀기 때문에 "과천현 서쪽 20리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금천현 구간을 염천이라 했기 때문에 "금천현의 염천으로 흘러간다,"고 기록한 것이다. 『해동지도』「과천현지도』에도 안양천 상류에 사근천이, 금천현과의 경계선인 안양시와 안양교 부근에 안양천이 기록되어 있다.
『1872년지방지도』「과천현』편에는 안양천 상류가 군포천(軍浦川)으로 기록되었다. 1861년 『대동여지도』에는 기탄(岐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광여도』「금천현』에 읍치 오름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이 지금의 안양천임을 알 수 있고, 이 하천 주위에는 지금의 구로공단과 광명시 아파트단지가 있는 광할한 평지로, 지도에도 표현되어 있다.
옛날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하천을 부르는 이름은 구역마다 달랐다. 안양천도 구역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한강과 만나는 하구인 양천에서는 철곶포라 불리고, 양천과 영등포사이의 오목교 부근에서는 오목내, 금천·광명에서는 염천(塩川), 대천(大川). 기탄(岐灘), /한천/한내, 안양사 부근 안양에서는 안양천(安陽川), 갈천(葛川), 상류지역인 지금의 학의천은 인덕원천(仁德院川), 학의천과 만나기 전의 안양천은 사근천(沙斤川), 군포천(軍浦川) 이라고도 불렸다.
지류를 제외한 지금의 안양천만 보면 한강 - 철곶포 - 오목내 - 염천 or 대천, 안양천 or 갈천, 군포천 or 사근천이라고 불린 것 같다. 동네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더 많은 이름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여러 이름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안양천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본래의 안양천은 삼성산에서 흘러 내려서 안양유원지를 지나는 삼성천을 말하였으나 일제때 하천 이름을 새로 정비하면서 안양천이 되었다. 이는 안양천이 여러 시를 경유함에도 안양의 중심을 뚫고 북쪽으로 흐르는 큰 하천으로써 안양시 안양동 앞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하천관리를 위해 본류와 1,2,3차 지류를 설정하면서 발원지에서 치수가 더 높은 하천과 만나는 지점까지 하나의 이름으로 기록하면서 정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이름들이 안양천을 일컫던 또 다른 이름들인데, 생각해 보면 이들 이름을 두 종류로나눠야 할 것 같다. 내 천체를 일컫던 이름과 내의 일부 구간을 일컫던 이름으로 말이다. 대천. 호계. 검암천은 전체를 일컫던 이름이고, 군포천. 안양천. 누동천. 오목내. 맑은내. 갈천. 기탄 등은 일부 구간을 일컫던 이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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