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따리/기억

[기억-정진원]어릴 적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안양똑딱이 2017. 3. 18. 18:27

제비울@꿈속고향.사이버허공 
 
어릴 적 제비울은 꿈속에 있었던 동네였다. 하늘가 어디엔가 있었을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가끔 어른들의 이야기 결에 들려오곤 했던 동네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조금은 특이해서 일찍이 어린 아이 뇌엽에 끼어들게 되었나보다. 시골 동네 이름들이 대개 새터, 양지편, 벌말, 논골 등 사실적인 것들이 대부분인데, 제비울이란 이름은 이색적이다. 아름다운 지명이다.

그곳 이야기는 무슨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고향 마을 덕장골의 작은 분점이 어느 산 구석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왜 제비울이라 하였는지 모른다. 봄날에 제비들이 먼저 찾아와 울안으로 왁자지껄 모여드는 고요한 동네여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제비들의 동네였던가 보다. 제비는 그 집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싫어지면 이듬해 봄에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비울에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과 처마 밑 등창에서 새나온 두런두런 노부부의 환담이 제비들을 다시 불러 모으던 그런 동네였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덕장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집너머에서 바위고개를 넘어 오른쪽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내려가면 아래쪽으로 잿빛 방개처럼 생긴 몇 채 초가로 이루어진 임이 마을이 길게 누운 듯 있고, 거기서 박새기를 지나 과천 쪽으로 한참 걸이 오른쪽 위로 제비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가에서 보이는 집은 한두 채였다. 덕장골과 과천의 중간 쯤 되는 곳이었다. 가까운 곳이면서도 왕래가 적었던 것은 행정구역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비울은 시흥군 과천면 갈현리, 덕장골은 화성군 일왕면 포일리에 속해 있어서 국민학교의 학구부터 달랐으므로 왕래가 적었던 것이다.

제비울은 옆집에 사시던 우리 작은어머니의 친정 동네였다. 그야말로 근지상혼(近地相婚)하던 때이라, 가까운 이웃 동네 처녀를 이곳 덕장골 총각에게로 손짓해 불러온 것이리라. 산길로 두 고개만 넘으면 장가에 가고, 또 이쪽에서 산길로 두 고개만 넘으면 시가에 오곤 했을 것이다. 그 때도 길가에 봄날이면 할미꽃이 졸고, 초여름 밤이면 하얀 아까시꽃이 유령처럼 흔들렸을 것이다. 여름밤 길섶에 달맞이꽃이 엷은 웃음을 혼자 웃고, 지금처럼 그 오솔길에 가을이 되면 하늘이 내려와 비로 내리고, 겨울밤이면 산노루 눈길을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들을 우리 작은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걸으셨을 것이다.

이제 제비울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모른다. 있어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제비울 미술관 아래쪽 어딘지, 과천 신도시 개발로 그 주변 쓰레기 소각장이 되었는지, 화식(火食)에 탐닉한 사람들이 비닐하우스를 가득 메우고 흥성대고 있는 곳인지, 의왕-과천 간 도로가 헤쳐 지나가버렸는지 모른다. 빼앗긴 제비울에도 제비는 오는가. 감히 가서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제비울은 지금 쫓기는 병아리처럼 어느 구석에 머리를 박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제비들이 그곳 허공을 배회하고 있을 거야. 수상한 사람들을 향해서 끼윽끼윽 소리를 지르면서 돌진할지도 모른다.

나는 덕장골의 실향민이 되어서 사이버 공간에 유리하고 있다. 이 광대무변 나그네 길에 내 주소를 이렇게 두고 있다. jebil(제비울)@hanmail(꿈속고향).net(사이버허공). 제비울이 내 고향이 되게 하고 싶었다. 빼앗긴 덕장골을 제비울에서 찾고 싶어서, 우선 사이버 허공에서 제비울에 주민등록을 해두었다. 그 하늘엔 지금도 그 때 그 바람이 불고, 그 때 그 별이 뜨고, 가을 달밤에 달무리 둥둥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수필가이자 문학박사인 정진원 선생은 의왕시 포일리 출신(1945년생)으로 덕장초등학교(10회), 서울대문리대 지리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에서 지리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박사학위논문으로 ‘한국의 자연촌락에 관한 연구’가 있다. 성남고등학교 교사, 서울특별시교육청 장학사, 오류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