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명소/문화관광

[20221027]안양 석수2동 화창로 산자락에 있는 박서 신도비와 묘소

안양똑딱이 2022. 10. 29. 17:15

2022.10.29/ #도시기록 #박도신도비 #묘소 #문화재 #안양 #석수2동/

 

안양 석수2동 화창마을 뒤 석수배수지 건너편 산자락(만안구 석수동 산168)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항복 문하에서 수학하고, 과거에 급제한 후 인조 때에는 황해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의금부총관을, 효종 때에는 도승지, 공조판서, 예조펀서, 병조판서를 지낸 박서(1602-1653) 신도비와 묘쇼가 있다.

신도비는 종2품이상 관리를 지낸 사람의 묘 아래 길가에 세우는 석비로 박서신도비는 1665년 만들어 졌는데 사각형의 받침돌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얹은 형태인데, 받침돌과 옥개석은 화강암을, 비신은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총고 3.82m에 달한다. 비문의 글은 낙정재(樂靜齋) 조석윤(趙錫胤)이 썼다.

박서가 병조판서를 지낼때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군사력 증강에 힘쓰기도 하였으며,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효종이 매우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박서신도비가 세워진 위치는 화창마을에서 똥골(현 안양천생태이야기관)로 넘어가는 화창로 우측으로 과거에는 높은 고개였으나 산자락을 깍아 도로가 놓여지면서 신도비는 길에서 잘 보이지 않은 도로변 담장 위 산자락에 자리하고 했으며 전혀 관리가 안되는듯 사람의 접근이 곤란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어 접근이 쉽지않다.

박서 묘소는 신도비로부터 북쪽 20m 지점 산자락에 있으며 묘소앞에 문인석이 서있고 묘비는 없다.

202년 7월 무렵 박서신도비를  탐사한후 글을 쓰면서 박서신도비와 묘소에 대한 안내판 및 가는 길 이정표 조차 없어 안양시의 무관심한 문화재 관리에 씁쓸하다. 안양에 있는 유일한 신도비라면 좀 더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고 쓴소리를 했었는데 오늘(2022.10.29) 똥골에서 화창마을쪽으로 고개를 넘다보니 박서신도비 아래 길가에 안내판이 새로 설치됐음을 확인했다.

 

\

 

병조판서를 지낸 박서(1602~1653)

박서 (朴 )1602(선조 35)∼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상지(尙之), 호는 현계(玄溪). 온양출신. 병조좌랑(兵曹佐郞) 효남(孝男)의 아들이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백형(伯兄)에게 글을 배워 열살 때부터 시(詩)를 잘 썼다. 그 후 이항복(李恒福)문하에서 수학했다. 인조 2(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3년 후 금화사별좌(禁火司別座)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선공감주부(膳工監主簿)·종묘사직장(宗廟寺直長)을 역임했다.

1630년(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2등에 급제하여 1632년 정언(正言)이 되었고, 1634년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이듬해 《홍문록 弘文錄》에 올라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41년 수찬(修撰)이 된 뒤, 집의(執義)·교리(校理)를 차례로 거쳐, 1643년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이어서 황해도관찰사에 재직중에 선정을 펴 칭송이 자자했다.

1647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으로 갔다가 돌아온 후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좌윤 겸 의금부총관(義禁府摠管)으로 있을 때 대사간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의견을 말하자 왕이 차자에는 비유가 사리에 맞지 않으니 고쳐서 바칠 것을 명했으나 '차자를 고치라고 명하는 것은 왕의 잘못이므로 언론을 맡은 신하로서 어찌 할 말도 아니하고 묵묵히 있을 수 있겠으며 임금의 잘못을 간한 내용은 고칠 수 없다' 고 하여 왕의 비위를 건드려 경주부윤으로 좌천당하였다.

인조가 승하(1649년)하자 그해 겨울에 부총관(副摠管)으로 기용되었고 효종1(1650년)도승지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지경연(知經筵)과 지춘추관사를 겸하였고, 이듬해 진향부사(進香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지의금부사·우참찬·예조판서 등을 거쳐, 다시 병조판서가 되었다.

1653년 병조판서로 병권확립에 진력하다가 병으로 휴가를 얻어 집에 있다가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왕은 매우 애통해 하며 해조(該曹)로 하여금 관재(棺材)와 상장(喪葬)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자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묘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는데, 신도비의 비문은 조석윤(趙錫胤)이 찬(撰)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국조방목( 國朝榜目), 시흥군지, 경기인물지, 시흥인물고, 안양시지(安養市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