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박철하]사근행궁 복원에 대한 필요성(2023.12)

안양똑딱이 2024. 1. 26. 11:58

[의왕 자료 소개]_의왕문화 22(202312)

사근행궁 복원에 대한 필요성

 

의왕문화원 부설 의왕지역문화연구소장

박철하

 

정조의 효()와 애민(愛民) 정신이 깃든,

의왕지역 삼일운동의 현장 사근행궁(肆覲行宮)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합니다

 

의왕시 사그내길 11. 지번으로는 고천동 272-2번지. 지금 의왕시청 별관이 있는 곳입니다. 별관 입구 왼편에는 <사근행궁터>라고 쓴 표석이 있고 그 바로 옆에는 <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즉 이곳은 조선 시대 임금이 행차 때 쉬어가던 행궁(行宮)’이 있었던 곳이자, 19193.1운동 때에 의왕지역 사람들이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임을 의미합니다.

행궁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을 말합니다. 남한산성행궁, 화성행궁이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의 현륭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새로운 성을 쌓아 도시를 형성하고, 이곳에 이르는 경유지마다 행궁을 설치하였습니다. 모두 6개소의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곳 의왕시청 별관 자리에 있던 사근행궁(肆覲行宮)입니다.

정조가 사근행궁이라 명명한 시기는 1790년입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이전부터 임금이 쉬어가던 주정소가 있었고, 조선 18대 임금 현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아 전해오는 유래가 깊은 곳입니다. 현종, 숙종, 정조 등 조선의 왕들은 이곳으로 행차하면서 군인들이 백성의 전답을 훼손하지 않게 조심하도록 했고, 사근천 주정소에 잠시 머무는 동안 신료들에게 보고를 받고 백성들의 구제 방책을 지시하는가 하면, 수원 군대의 모습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근행궁은 정조의 효심과 애민사상, 그리고 호국 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정조는 1795(을묘년) 원행(園行)에서 백성들이 길 양쪽에서 구경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유는, 어떤 이는 즐겁게 원행을 구경하려는 것일 테고 어떤 이는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하려는 마음에서 나왔을 테니 금지하지 말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 곧 백성들의 행복을 위한 행행(幸行)’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정조는 사근평길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습니다. 사근행궁에 잠시 머무는 시간, 현륭원을 향할 때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날 기쁨에 가슴이 뛰었고, 환궁할 때에는 이제 돌아서면 보이지 않기에 발길이 옮겨지지 않아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래서 행궁의 이름도 마음을 다해 아버지를 뵙고자 하는 의미로 사근(肆覲)’이라 하였고, 사도세자의 영여(靈轝)가 머무를 때 이곳 백성들과 함께 가없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곳이었기에 사근행궁의 정당 현판도 응란헌(凝鑾軒)’이라 했습니다. 사근행궁(肆覲行宮)은 곧 정조의 지극한 효심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정조는 사근행궁과 사근평에서 애민(愛民) 정신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도 보여주었습니다. 행차 중에 사근행궁에 머무르면서 현지 수령과 암행한 신하들을 불러 행정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들었고, 사근천 근처의 주막에서 값을 치르지 않고 토식(討食)하는 관아의 아전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필벌하였으며, 사근평을 지날 때 행차 앞에 나선 어느 백성의 격쟁(擊錚)을 허용했습니다. 또한, 정조는 응란헌에서 남한산성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잊지 말고 나라를 잘 보위해야 함을 다짐했습니다. 이처럼 사근행궁은 정조의 효는 물론 애민사상과 국가 수호의 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한 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을 통합하여 의왕면이라 하고, 이곳 사근행궁을 의왕면사무소로 이용하였습니다. 이후 193610월 다시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의왕면과 일형면을 합하여 일왕면이 설치되면서 의왕면사무소는 폐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19373월 일왕면장을 의장으로 하는 일왕면협의회에서는 회의를 거쳐 새로운 면사무소 건립을 위한 비용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의왕면사무소 즉 사근행궁을 매각하였습니다. 이후 1939년에 이르면 행궁의 출입문을 제외한 모든 형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터만 남게 되었습니다.

1963, 화성군 일왕면에서 시흥군 의왕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사근행궁 자리에 면사무소 건물이 새로 들어섰고, 이후 의왕읍사무소와 의왕시청의 청사가 있다가 고천동주민센터를 거쳐 현재는 의왕시청 별관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사근행궁이 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뜻깊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1919331일 밤, 의왕지역 800여 주민들이 사근행궁 앞, 즉 의왕면사무소 앞에 모여 횃불과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에 일본 군대의 보병이 출동하여 만세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여 2명이 부상당했으며, 46명이 수원경찰서로 끌려가 50~90대의 태형을 받고 그 이튿날 41명이 풀려났습니다. 이처럼 사근행궁터는 정조의 국가 수호 정신이 130여 년의 세월을 지나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왕지역 주민의 독립운동으로 불타오른 숭고한 역사의 현장이라 할 것입니다.

 

정조의 효애민사상 국가 수호 정신은 물론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왕시민의 3.1정신을 계승하고 문화유산을 길이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천지역 주택재개발 및 도시환경정비사업으로 인해, 정조의 효와 애민사상 및 국가 수호 정신이 깃든 사근행궁터이자 의왕지역 주민의 3.1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며 의왕시 행정의 발상지인 이곳이 훼손될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앞으로 재개발 사업과 함께 이곳에 역사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근행궁터를 보존하고, 사근행궁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합니다. 사근행궁에 대한 자료가 남아 전해오고 있습니다. 1795년 정조의 을묘원행 때 그려진 (시흥)환어행렬도에 사근행궁이 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1847년에 편찬된 󰡔(중정)남한지󰡕에는 건물의 종류가 기록되어 있고, 1937310일의 일왕면협의회 회의록에는 사근행궁의 대지와 건물 규모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왕문화원은 이러한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하여 사근행궁을 복원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조의 효와 애민사상 및 국가 수호 정신은 물론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왕시민의 3.1정신을 계승하고 문화유산을 길이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편집자주: 의왕문화원 부설 지역문화연구소를 이끄는 박철하 소장은 의왕시 오전동 전주나미마을 345번지에서 태어난 의왕 토박이로 고천초, 안양중, 유신고를 거쳐 고려대 사학과와 숭실대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고,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과 경기도교육청 역사교육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참여와 자치를 위한 의왕풀뿌리희망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