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최병렬]해동검도, 1982년 안양에서 시작됐다(2024.02.02)

안양똑딱이 2024. 2. 2. 15:35

1983년 2월 기록이 표시된 안양도장에서 김정호 총재

 

 

해동검도는 대한민국의 창작 무예로 1980년대에 김정호와 배우 겸 무술인 나한일이 각각 체계화시켜 만들었다.

 

위키트리 기록을 보면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나한일과 김정호는 고등학생 시절인 1970년 무렵에 서울 신당동에 있던 심검도 호법총관에 입관하여 심검도 창시자 김창식 관장에게 심검도를 배웠다. 심검도는 김창식 관장이 창안한 유파이고, 김창식 관장은 당시 화계사 주지 숭산 스님의 제자였다. 김창식 관장이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나한일도 김정호와 떨어지자 심검도 도장을 인수하였지만 경영부진으로 1977년에 폐관하였다. 김정호는 먼저 기천문에 입문하였는데, 나한일은 김정호에게 소개받아 기천문 1대 문주 박대양으로부터 기천문을 배웠다. 나한일은 1980년대 초 현진영화사 김두원 회장의 후원으로 서울 서초동에 도장을 개관했는데, 박대양이 건물 임대 계약자로 자기 이름을 올리고 '기천문' 간판을 달겠다고 주장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박대양이 떠나고 도장은 '심검도 체육관'으로 개칭했다. 김정호는 안양에서 도장을 운영하다가 1982년에 서초동 도장에서 다시 나한일과 합류, 도장 운영에 참여하고 나한일은 방송국 일에 전념하였다. 심검도 체육관은 현진영화사에게 후원받아 운영되었으나, 영화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 김정호는 나종균에게 도움받아 1986년 서울 삼성동에 해동검도도장을 세우고, 나한일은 해동검도연구소장이라는 직함으로 나한일과 함께 해동검도 보급에 나섰다.

해동검도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각자가 말이 다르다. 1982년에 경기도 안양시에서 김정호가 운영하던 도장이 "해동검도체육관"이었다는 주장, 1984년 서초동 심검도 도장에서 배우던 최태민이 제안하여 그때부터 해동검도를 상호로 사용했다는 주장, 1986년 삼성동 해동검도도장 때부터 사용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무카스미디어에서 발췌

기사링크(https://mookas.com/news/7538)

 

현재 전 세계 120만명의 수련생을 보유하고 있는 해동검도의 시작은 초라했다. 김정호 총재(당시 29)19827월에 해동검도의 최초 도장인 안양도장을 개관했다. 한국 고유의 검술인 해동검도를 보급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안양도장의 환경은 최악이었다. 당시 도장에 매트조차 깔지 못해 20명 남짓이었던 관원들은 대리석 위에서 맨발로 수련해야 했다. 또한 깡패들이 검을 이용한 무술이라는 소문을 듣고 들락거리기 일쑤였다. 세계해동검도연맹(이하 세계해동) 김정우 교육부장은 “(안양도장 시절은)정말 어려웠다. 김 총재도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때 포기했으면 지금의 해동검도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동검도는 시작은 미미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의 말처럼 25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했다. 1983안양도장을 서울로 이관한 세계해동은 하나의 해동검도(Only One Haidong Gumdo)'를 내걸고 일신우일신 발전을 거듭했다. 현재 세계해동은 전 세계 1,200여 개의 도장과 120만 명의 수련생을 보유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해동검도가 현재 크게 두 단체로 나뉘어졌다는 사실이다. 바로 세계해동와 한국해동검도연맹(이하 한국해동)이다. 두 단체는 해동검도의 창시와 최초 개관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해동은 해동검도의 창시자는 나한일 총재(현 한국해동검도협회 총재)이고 최초의 도장도 1984서초도장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세계해동은 이 사진과 함께 여러 증거자료를 세상에 공개하며 역사논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다. 한국해동도 전 세계 600여 개의 도장과 50만 명의 수련생을 있다고 밝히고 있다. [김성량 수습기자 / sung@mook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