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기억 #안양 #안양유원지 #안양예술공원 #유유 #김중업박물관 #옛사진/ 1982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항공사진에는 안양유원지 초입의 당시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진 중앙에는 아이들의 비타민 원기소를 생산한던 유유 안양공장(현 김중업 박물관)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 포도와 딸기밭이 있고 그 옆으로 공터가 이어지는데 지금의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이다.
안양유원지(현 안양예술공원) 초입에 있던 유유 안양공장(현 김중업박물관)은 통일신라 '중초사(中初寺)'이래 고려 '안양사'로 이어져 조선까지 불맥을 이어간 사찰지위에 한국 건축계의 거장 고 김중업씨가 설계한 제약공장 건물이다. 공장동 뒷쪽으로 개인주택들이 있고 사무동 뒷편에는 공장 신축 당시에는 없던 가건물이 있고 사진 중앙 아래 5층의 삼영아파트 건물에 띄워진 에드벌룬이 보여 아파트가 준공된 싯점인 1982년 12월로 추정된다.
사진 우측 상단의 삼성산 자락에 하얗게 보이는 곳은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안양 장석광산이다. 장석(長石)은 질그릇 사기 유리 성냥 비료의 원료로 두루 쓰이지만 특히 도자기 유약재료로 요긴한 광물이다.
기록상으로 안양 장석광산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개발됐다고 하지만 안양예술공원 안쪽의 서울농대 수목원 끝자락에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있어 예전부터 이곳에서 채취한 장석을 유약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 토박이들에게 「백토광(白土鑛)」으로 잘 알려진 이 광산의 전성기는 요업경기가 한창이던 70년대로 이곳에서 생산된 장석은 품질이 좋아 여주, 이천 등지의 이름난 도요지에서 사갈 만큼 유명했다.
70년대 당시에는 한달 판매량 7백t을 채굴하기 위해 50여명의 광부가 비지땀을 흘렸고 취직하기 어려운 직장의 하나였으나 90년대초부터 값싼 북한과 중국산 장석이 수입되면서 뒷걸음질쳐 98년경 무렵 문을 닫고 공장과 창고 등 사람들로 북적대던 건물은 주변 그린벨트의 울창한 삼림속에 폐가처럼 버려져 있다.
현재 동굴 초입은 까치골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여름에는 동굴속에서는 시원한 공기와 차가운 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훈훈한 기온이 감도는 곳이다.
유유 안양공장앞 삼성천을 경계로 우측(사진상 아랫쪽)에 보이는 동네는 한때 낙원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리우던 동네로 기와집 40여호가 정도가 있었는데 수질이 좋은 우물이 있어 화심천이라 짓고 1993년 수돗물이 들어오기까지 용왕제를 지내는 등 동네주민들의 공동체가 끈끈했던 곳이다.
낙원마을은 1999년 안양시에 의해 전통마을로 지정받을 만큼 화심천 용왕제를 비롯 절기 또는 명절 때마다 마을합동으로 풍습을 재연하면서 마을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겨 왔으나 2005년 이후 개발의 바람앞에 옛 건물들은 헐리고 그 자리에 단독 양옥주택들이 들어서면서 과거의 마을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개발로 없어진 낙원마을과 화심천’(和心泉) 이야기
안양시 안양2동에 있던 낙원마을. 지금은 고급 단독주택단지로 바뀌었지만 이 곳은 불과 10년전인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안양시가 지정한 전통마을이 있던 곳으로 우리나라 고유풍습인 전통 세시풍속을 이어가고 있으며, 절기와 명절 때마다 마을합동으로 행사를 지내왔었다.
낙원마을은 1950년대만 하더라도 험준한 산골이었는데, 1959년경, 박정원와 안학순 부부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식수를 구하던 중 ‘화심천’(和心泉) 우물을 발견하고 그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이를 식수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부부는 가을이 되면 매년 햇곡식으로 떡과 술을 빚어 제물을 차려놓고 소원과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
그러던 중 화심천 물이 어느새 건강에 좋다는 소문이 났고, 주변 각지에서는 이 물을 약수로 떠다 마시고 효험을 얻어다 하는 말이 퍼지자 이곳으로 이사오는 사람들도 늘어나면서 ’65년 45호에서 ’70년에는 90여 세대로 늘어 마을사람도 400명을 육박했다.
1980년대 말 까지만 하더라도 낙원마을의 각 집집에는 두레박이 있었으며 화심천 주변의 풍경은 아낙네들의 정겨운 정담이 넘쳐났다. 또 갑자기 마을사람들이 많아지자 가뭄이 들면 주민들은 두레박을 들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도 했다.
낙원마을 사람들은 1993년 이 마을에 수도가 들어올 때까지 40여년을 이 물로 식수하여 나누어 먹고 살았다.
마을 주민들은 이 우물을 자신들의 생명수요, 어머님의 젖줄이라 생각했다. 마을이 근검절약하고 상부상조하면서 서로 돕고 화합하며 사는 지혜를 배우고,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는 대문 없는 동네를 만들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심천의 음덕 때문이라며 1985년부터 마을합동행사로 ‘우물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다. 주민들은 이러한 뜻을 살려 1996년 ‘화심천(和心泉)’이라 이름짓는다.
이것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 마을에서 행해지는 세시풍속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96년 안양 우물제 참석을 시작으로 이 마을에 관심을 가진 방유자씨가 ‘세시풍속전통회’(대표 김재복, 방유자)를 만들어 전통마을로 보존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낙원마을 주민들은 마을 사람 모두 마을 전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고 심지어 숟가락이 어느집 어디에 몇 개 있는지까지 알고 지낼 정도로 니집 내집없이 가족처럼 지냈다. 명절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놀이와 음식을 함께 만들고 먹으며 지내는 다른 마을에 없는 풍습이 흐르는 특이한 마을이었다.
방씨는 마을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면서 이렇게 좋은 전통을 그냥 사라지게 할 것이 아니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당시만 해도 공식 이름이 없던 우물에 ‘화심천(和心泉-이 물을 마시면 마음이 온유해지고 편안해진다는 뜻)’이러 이름도 붙였다.
방씨는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 안양에서 유치원과 미술학원을 경영하기도 한 교육자로 당시 이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막노동이나 파출부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실정을 보고는 강사를 초청해 야학을 시작했다. 실생활에 직접적인 것부터 가르치기 시작해 예금청구서 쓰는 법, 인감 용지 쓰는 법은 물론 생활에 필요한 시사도 가르치는 등 주민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적극 앞장서면서 낙원마을의 ‘대모’로 불리우기도 했다.
낙원마을은 1999년 안양시에 의해 전통마을로 지정된다. 니후 시 차원에서의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제사 이름을 용왕제로 정한 뒤 화심천 용왕제를 연례행사로 개최하기에 이른다. 2001년에는 ‘화심천 용왕제’가 경기도에 의해 안양시 세시풍속전통회(경기등록 제363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낙원마을에서는 용왕제와 더불어 정월대보름에 오곡밥과 연날리기 행사를 비롯 유두 행사, 한가위 행사, 동지에 팥죽나누어먹기 등 절기 또는 명절 때마다 마을합동으로 풍습을 재연하면서 마을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겨 왔으나 개발과 금전의 유혹과 바람앞에 꺾이고 만다.
결국 2004년 5웡 28일 용왕제를 끝으로 화심천 용왕제는 없어졌으며, 안양 전통마을 지정도 해제되고 낙원 마을은 2006년 이후 택지개발을 통해 고급 단독 지역으로 바뀌고 말았다.
낙원마을 화심천 앞에는 “이 샘물을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웃사랑, 공경심, 금실이 좋아지고 사심이 없어진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으나 이젠 흔적 조차 찾기 어렵다.
중초사-안양사-유유안양공장-김중업박물관
유유 안양공장 터는 중초사(통일신라), 안양사(고려)가 자리했던 절터로 유유 창립자인 유득한 씨가 1941년 매입해 6.25전쟁 이후인 1959년 5월 안양공장을 건립한 후 2007년 제천으로 이전하기 까지 원기소 등 의약품을 생산해 오던 곳이다.
㈜유유 안양공장에 자리한 사무동과 공장동 건물은 한국의 손꼽히는 건축가 김중업(金重業,1922∼1988)의 초기작품이자 50년대를 대표하는 산업건축물로 어려운 시대에 공장에 예술을 가미해 건축했다는 것은 높은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다.
특히 사무동 지붕은 역보로 되어 있고 생산동은 캔트리버로 형성 삼성천의 시야를 확보하고자 하는 디자인 요소가 가미된 건축학적으로 의미있는 건물이며 공장입구에 자리한 2층 원형으로 된 수위실 역시 톡특한 형태로 문화유산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이다.
또한 공장동 2층 양측코너에는 모자상 파이오니아 조각상이 각각 배치되어 있는데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는 조각가 박종배씨의 작품으로 대문장식, 철창 등이 쌍Y자를 모티브로 한 일관된 장식으로 현재 당시의 모습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안양시가 유유 공장을 매입한 후 매장문화제 발굴과정에서 그동안 문헌으로만 존재해 왔던 안양사 명문기와가 출토되고 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7층 전탑의 실체가 드러나 통일신라 중초사 절터 위에 고려시대 안양사가 다시 세워지는 등 대규모 가람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현재 이곳은 리모델링을 거쳐 2014년 3월28일 김중업박물관으로 개관했으며 김중업관을 비롯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커뮤니티관,안양역사관, 이벤트홀, 공연실, 문화지킴소 등이 있다.
김중업박물관은 대지 1만6243㎡, 연면적 4천596㎡, 6개 동의 규모로 지난 2007년과 2011년 두차례로 진행된 안양시의 유유부지 문화공간 조성계획 수립 용역과 2년여 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옛 건물들을 문화적으로 재생하여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김중업박물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양시가 공장 부지를 매입한 이후 복합문화공간 활용에 따른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09년 실시한 중초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곳이 안양시의 지명 유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안양사(安養寺) 절터임이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곳에는 신라시대 유물로 유일하게 명문이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보물4호)가 자리하고 있어 그동안 통일신라시대 중초사지 터로만 알려졌으나 2009년 부지내 사굴과정에서 900년경 태조 왕건이 창건한 안양사의 흔적인 安養寺銘文瓦(안양사명문와편)이 출토되고, 역사속 기록으로만 있던 칠층전탑의 흔적까지 발굴됨으로 안양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굴된 거대한 절터의 현장이 그대로 다시 흙으로 덮였다는 사실이다. 복합문화공간 활용 논의 과정에서 역사 교육의 일환으로 칠층전탑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덮는 방안이 거론됐으나 보존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무산됐다. 더욱이 어린이와 청소년 및 시민들이 역사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전혀 고려되지 않아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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