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사람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이름이 있듯이 땅에는 땅 이름, 즉 지명(地明)이 있다.
지명은 인류의 사회생활과 더불어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지역의 주변 환경과 역사, 이에 대한 의미부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다양하게 얽히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지명에는 그 지역에 대한 역사와 풍속, 문화 등은 물론 그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이나 생활풍습 등이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지명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 지명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다. 지명이 고유어(순 우리말)라면 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고, 한자어가 있다면 그 한자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 보는 일이다.
군포시는 1979년 5월에 시흥군 남면에서 군포읍으로 승격하였고, 그로부터 9년 8개월이 지난 1989년 1월에 시로 승격한 도시이다. 군포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읍으로 승격하면서 처음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명이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군포시(軍浦市)는 삼국시대에는 삼한(三韓)중 마한(馬韓)의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백제에 이어 고구려 영토가 되었는데 「율목군(栗木郡)」이라 칭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율목군(栗木郡)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의 율진군은 과천군, 군포시, 서울특별시의 용산구, 동작구의 일부와 서초구의 일부지역을 포함했다.
고려시대에는 군포를 포함한 율진군이 「과주군(果州郡)」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치관으로 감무관(監務官)을 두었다.
조선시대인 태종13년(1413)에 행정구역의 전면 개편으로 경기도는 1목8도호부6군26현으로 개편되었는데 과주군은 「과천현」으로 개칭됨과 아울러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과천현은 이듬해 다시 금천현과 합병하여 금천현의 '금'자와 과천현의 '과'자를 합하여 「금과현」이라고 칭하였으나 불과 두어 달만에 파하고 종전 과천현으로 복구하였다. 이어 세조 2년(1456)에 다시 금천현과 병합하였지만 역시 얼마 안 가서 파하고 예전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군포가 속한 과천현은 1895년 일본 조정에 의해 제정된 홍범14조 및 전문6조인 칙령 제98호「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따라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어 종래의 부, 목, 군, 현 등의 지방행정단위가 모두 군으로 통일되면서 「과천군」이 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합병된 후 군포는 과천읍내 남쪽에 있다하여 과천군 남면(南面)이라 칭한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행된 「구한국지방행정명칭일람」(1912)에 의하면 과천군 남면의 행정구역은 <산본동, 당리, 용호동, 장간리, 부곡리, 괴곡리, 금정리, 당정리, 봉성리, 초막동>의 10개리이다. 1914년 3월 1일에는 과천군, 안산군, 시흥군의 3개 군이 합병하여 거대한 시흥군이 탄생한다. 시흥(始興)이라는 명칭은 "넓은 땅(廣野)"을 의미하고 고구려 시대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의 뜻풀이인 "뻗어가는 땅"과 걸맞다고 할 수 있다. 과천군 남면(군포시)은 시흥군 남면이 되었으며 당리, 당정리, 금정리, 산본리, 부곡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시흥군 남면은 일제를 거쳐 건국후에도 행정구역의 변동이나 명칭에 대한 변경없이 지내오다가 1979년 4월 7일 대통령령 제9409호(1979.4.7. 공포)에 의해 1979년 5월 1일 시흥군 군포읍으로 승격하며 처음 군포(軍浦) 지명을 사용하며 이후 1989년 1월 1일 시흥군에서 분리돼 군포시로 승격한다.
'군포(軍浦)'의 지명에 대한 유래는 매우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고유어가 없기에 한자어 '군포(軍浦)'를 중심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군포의 한자는 군사를 뜻하는‘군 (軍)’과 물가를 뜻하는‘포(浦)’로 표기되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 이 한자 지명이 우리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은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果川縣) 『신수읍지』와 과천현 지도에 '군포천(軍浦川)'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이 최초이다. 그리고, 철종12년(1861) 김정호 선생이 발간한 『대동여지도』와 『1872년지방지도』 「과천현」 편에도 '군포천(軍浦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군포'라는 지명은 최소 1699년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군포천(軍浦川)은 안양천의 상류구간을 일컷던 옛 이름이다. 그리고 군포천 옆에는 군포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는 5일마다 개설되는 장이 섰는데 군포장이라 불렀다. 군포장은 1770년 편찬된 1770년 편찬된『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군포천장(軍浦川場)’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렇다면 당시 군포라고 불리던 곳은 지금으로 치면 어디쯤일까?
그곳은 군포시 행정구역과는 무관하며, 지금의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구군포사거리 일대로 현재의 삼신.진우아파트 지역과 안양천(맑은내, 군포천) 사이로 지금도 이곳 구장터 부근 도로는 구군포길로 불리우고, 옛 군포장이 위치하던 지역은 ‘구장터1로’에서 ‘구장터3로’까지의 도로 명칭을 지니고 있어 이곳이 과거 장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포장이 서던 곳은 시흥길과 삼남길의 갈림길이다. 또 안양천의 상류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기에 한강에서 부터 물자운송이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조선시대 지도에도 표기될 정도로 컸다. 과천시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국방력의 강화를 위해 전국 군현과 군사기지(진보와 수영 및 병영), 역참 등의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올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1872년 과천현에서 직접 그려 올린 [과천지도]를 보면 [해동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던 안양장과 군포장이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표시 방법이 특이하다. 두 개의 장을 만안교에서 왼쪽 아래(남쪽)의 삼남대로와 연결된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1827)에서도 군포장과 안양장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포장이 서는 날은 이웃 안양장과 더불어 수차례 바뀌어 왔다. 조선시기에는 개시일이 3․8일로 나와 있는데 1905년 군포장이 되면서 1․6일로, 1923년에는 5․10일로, 1926년에는 2․7일로 나타나는 등 주변장의 영향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군포장은 역 명칭에도 영향을 미친다. 광무4년(1900)에 경부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군포 남면 당리에 역사를 짓고 역명을 군포장역(軍浦場驛)으로 하여 영업(개시 1905년 1월 1일)을 개시했다. 역의 위치가 당시 군포장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러한 이름을 얻게된 것은 군포장을 지나도록 계획되었던 경부선 선로가 군포 당동쪽으로 변경되었으나 역명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창하던 군포장은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내(군포천, 안양천)이 범람하자 그해 12월 23일 장을 군포역 앞(현재의 군포 역전시장)으로 이전하고 5일장 시장 명칭은 그대로 승계한다. 군포역 일대는 상설로 문을 여는 가게들도 생기는 등 주거지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1938년 경부선 복선화가 되고 기차역 주변이 지역유통의 중심지가 되자 그해 4월 1일부로 군포장역(軍浦場驛)은 군포역(軍浦驛)으로 역명이 바뀌게 된다. 또 5월 1일에는 새로 신축한 역사가 준공된다.
결국 역이 설치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이동하였고, 군포라는 지명이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군포장 마저 이전해 오면서 군포역 일대가 기존 ‘군포’를 대신하여 새롭게 군포가 되면서 5일장으로 열리던 군포장은 도시화와 함께 사라지고 상설시장(현 군포역전시장)이 생긴다. 이후 옛 군포장이 서던 지역(호계3동)을 구군포(舊軍浦)라 했고 '당말'이라 부르던 군포역 인근을 신군포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군포 지명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했다는 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던 승병과 관군은 현재의 군포지역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이 때 이 지역의 마을 사람들은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등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으며, 이렇게 해서 기운을 차린 관군은 승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지역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軍飽)라 하였으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군포(軍浦)가 되었다고 한다.
군포천(軍浦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군포 지역을 흐르는 하천이 군포천(軍浦川)인데, 1970년대 중반까지 물고기를 잡고 멱을 감던 하천으로서 '맑은내'라고도 했다. 이 하천이 북류하면서 안양천을 경유하여 한강에 합류되므로 군포천은 한강의 지류라고 할 수 있다. 군포천은 안양천의 상류에 있으면서 옛날부터 수운을 이용하는 군포 포구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숙종 25년(1699)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읍지>와 과천지도(奎;10,370)에 '군포천'이라 표기되기 시작하였으며, 광무 3년(1899)에 간행된 <과천군읍지>와 지도(奎;10,708)에도 '군포천'이라 표기되었다.
군웅산(軍雄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구 군포지역(안양시 호계동)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구사거리 일대에 군웅산(軍雄山)이라는 야산이 있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군웅제(軍雄祭)를 1980년대 이전까지 지내왔다고 한다. 이 군웅산 아래에 있는 물가 마을이라 하여 군웅산의 '軍'과 물가의 '浦'를 합하여 군포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이 성립되려면 군웅제가 숙종 25년(1699년) 이전부터 지내왔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사실 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 할 수 없다.
그외 여러가지 설
이러한 유래 이외에도 조선시대에 개설된 군포장(軍浦場) 인근에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군포장역(현재 군포역)을 세우고 그 주변에 민가가 늘어나면서 군포(軍浦)라 불렀다는 설과,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가 머무른 지역이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군포(軍浦)'라는 지명이 이미 알려진 이후에 전해오는 이야기라 지명의 유래와는 관련이 없다.
위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군포(軍浦)'라는 지명은 최소 숙종 25년(1699년) 이전에 군인이나 군부대, 그리고 하천 등의 의미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군포라는 지명의 유래는 군포(軍飽)나 군포(軍布)가 군포(軍浦)로 바뀐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군포(軍浦)로 불린 것이 가장 유력한 듯 하다.
[참고]93년만에 해체된 시흥군
한편 1989년 군포시와 함께 시흥시, 의왕시 등 3개시도 시흥군에서 분리·승격하면서 시흥군은 93년만에 해체(폐군)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시흥군은 서울의 영등포구ㆍ구로구ㆍ금천구ㆍ관악구ㆍ동작구ㆍ서초구 등과 경기도의 안양시ㆍ광명시ㆍ안산시ㆍ과천시ㆍ군포시ㆍ의왕시 등을 분가시켰으니 연관없는 지자체가 없다.
해체 당시 시흥군의 각종 문서 등은 현재의 시흥시로 이관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시흥시 지역은 구한말까지 원래 안산군과 인천부(일제강점기 이후 부천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과거 '시흥'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사실에서 시흥시의 '100년 시흥' 외침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흥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5년 5월 26일 탄생한 시흥군은 1914년 3월1일 과천. 시흥. 안산군을 합병, 시흥군으로 통합됐다.
1936년, 1949년, 1963년 각각 영등포읍, 서면, 동면, 신동면 등이 차례로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금천, 영등포, 양천, 구로, 관악, 동작구 등 6 개 구로 재 분리됐다.
1941년 10월 1일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됐다.
1949년 8월 14일 안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엔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됐다.(시흥군청 소재지는 당시 안양일번가 삼원프라자호텔 자리였다. 시흥군청은 1978년 안양6동(현 만안여성회관)에 새 청사를 신축해 이전했다가 이후 1980년 소래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소래읍으로 군청을 이전한다.)
1973년 7월 관내 안양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郡)에서 분리됐다.
1979년 5월 1일 시흥군 남면이 시흥군 군포읍으로 승격했다.
1980년 12월 1일에는 시흥군 의왕면이 시흥군 의왕읍으로, 소래면은 소래읍으로 승격됐다.
1981년 7월 1일에는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분리됐다.
1982년 6월 10일에는 시흥군 과천면이 과천출장소(현 果川市)로 분리되어 나갔다.
1986년 1월 반월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돼 분리됐다.
1989년 1월 1일 시흥군 군포읍이 군포시로 분리돼 나갔으며, 의왕읍과 동부출장소는 의왕시로, 소래읍과 수암면, 군자면이 통합되어 시흥시로 각각 승격된다. 시흥군은 1988년 12월 31일 종무식을 끝으로 93년만에 해체(폐군)되면서 행정구역상에서 그 명칭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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