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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근대 안양 시금석 안양장과 안양역

안양똑딱이 2017. 3. 27. 00:44

안양지역 상권의 변화 과정

안양지역에서 보부상이 자주 드나들던 곳은 어디였을까.

지금의 안양을 포함하였던 옛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에 중부지방의 교역 중심지로서 시장이 발달하여 조선 후기에 방축장()·산대장()·수암장() 등이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도 시흥군 서이면 호계리(지금의 동안구 호계3동)의 군포장이 매달 끝자리가 5·10인 날에 열렸고, 1926년 서이면 안양리(지금의 만안구 안양1동)에 안양시장이 개설되어 매달 끝자리가 5·10인 날에 장이 섰다. 안양시장은 1961년 지금의 안양4동 자리로 이전하여 안양공설시장으로 개칭하고 장날도 3·8일로 변경하였다가 1970년대에 상설시장으로 전환되어 지금의 안양중앙시장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안양시의 전통시장은 만안구에 안양중앙시장 외에 안양남부시장·중부농수산물시장·박달시장·석수시장·안양중앙지하상가·안양1번가지하쇼핑, 동안구에 호계종합시장·관양시장·평촌1번가·평촌역상가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밖에 유통업체로는 백화점 2개소와 대형 할인점 4개소, 쇼핑센터 2개소, 대규모 점포 3개소 등이 있다.

기록과 지역 토박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과거 조선에 한양 가는 길목이었던 인덕원이 숙박을 겸한 주막집들이 있어 그곳이 가장 먼저 발달했으며 이후 삼남길이 지나는 호계동지역이 군포장으로 발달하고, 이후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된 이후 1920년대 안양역 인근인 안양1동에 공설시장이 들어섰다.
인덕원(仁德院)은 덕화를 베푸는 고장의 의미의 공용(公用)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한 원(院)이 설치됐던 곳으로 한양의 관문이었다. 인덕원은 사통팔달의 교통요충지로 이순신 장군이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제22대 정조임금의 수원 능행로(陵幸路)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과천-인덕원-수원으로 가던 능행을 시흥(현 구로구 시흥동)-안양-수원의 노정으로 바꾸기 위해 1795년에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 하천에 만안교를 가설했으며 한해전인 1974년에는 안양리(현 안양1동 674-67에)에 임금이 쉬어가기 위한 안양주필소-안양행궁(安養行官)을 지었다. 이로 인해 안양리가 발전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촌락에 불과했던 안양리가 오늘날 안양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되기는 일제 강점기인 1902년에 경부선이 부설공사로 안양역(安陽驛)이 건설되고 1904년 안양역사가 개통돼 안양리는 교통의 요충지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경부선 1구간 역 중 하서면 안양리에 개설된 안양역의 개통은 호계리에 개설돼 있던 군포장을 쇠퇴하게 만들고 안양역 일대는 비약적인 성장·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1912년 3천412명이던 인구수는 1925년 6천165명, 1935년 8천957명, 1940년 1만명으로 늘어난다.
안양시사, 시흥군지, 안양상공회의소 등의 기록을 보면 일제 강점기인 1917년 7월에 호계 2동 방죽말에 있던 서이면사무소가 안양1동사무소옆(안양1동 674-271)자리로 이전하고. 1924년에는 만안로에 안양지방 최초의 금융기관인 안양금융조합, 안양역앞에는 안양우체국과 안양연초조합 등이 속속 설립되면서 안양역 일대가 관공서들이 속속 들어섰다.
광복 직후에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시흥군청사가 현재의 안양 일번가 삼원플라자 호텔 자리로 이전하고 곧이어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 의용소방대 등이 추가로 들어서면서 안양 일번가는 70년까지 시흥군 행정 관가의 거리로 행정구역상 중앙동(中央洞)으로 불리웠다.
하지만 1970년대 시흥군의 해체와 안양시 승격 등 행정구역 개편의 변화속에 공공기관들이 안양6동으로 이전하면서 안양1번가는 상업지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해 1980년대에는 먹거리, 옷가게, 유흥주점이 주류를 이루며 금융, 교통, 상권을 아우르는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안양역과 함께 상권을 형성됐던 안양 구시장
 
1926년 1월 28일에는 철길 건너 인근 시대동에 안양시장(구시장)이 개설되어 상권의 기틀이 다져졌다. 당시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로 서울가는 버스가 이곳을 통과해 지나갔다.
이곳에서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이 15만6천원, 잡화가 21만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 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안양시장은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하는 등 매우 큰 규모였다.
특히 1929년 안양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 안양시장이 자리했던 시대동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6.25전쟁이후 피난민들이 유입하며 판잣집들이 대규모로 들어서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에 시장(현 중앙시장)이 개설되면서 상권이 이전하자 60년 중반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안양역과 시대동 주변이 근대 안양 발전의 시금석이 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안양 주민들은 시대동 시장을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고 중앙시장을 새시장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