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얘기/담론

[김수섭]술집동네 친구들

안양똑딱이 2016. 5. 9. 16:39
[김수섭]술집동네 친구들

변호사(법무법인 나라종합법률사무소)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옛 성현의 말대로 그 당시에는 나귀에 잘 빚은 술병과 거문고를 들고 찾아와 친한 벗들이 어울렸던 것 같다. 거문고 가락의 향취에 취하고, 친한 벗들의 인품에 취하고, 손님 접대하는 안주인의 푸짐한 안주에 취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친구의 우의를 나누었을 것이다.

옛 성현의 풍취야 더 없이 좋은 것이지만, 안주인의 화난 얼굴과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채도 없는 아파트의 중심부인 거실을 장악하고 술을 마시는 간 큰 남자는 요즘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워… 가정이 아닌 술집에서 친구와 함께 한잔씩 하는 것이 우리 문화가 되었다.

안양에는 크게 보면 1번가상권, 범계역상권, 평촌역상권, 흔히 먹자골목으로 불리는 귀인동상권이 있다. 이 상권들 중에서 차를 집에 주차하고 걸어서 다니기가 편하고, 주로 십대나 이십대가 중심인 다른 상권과는 달리 삼·사십대가 손님의 주류여서, 티나지 않고 숨어 술을 마시기 편한 먹자골목을 즐겨 찾는다.

먹자골목은 해수탕 뒷골목과 학원가 뒷골목의 두 블록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뒷골목에는 수백개의 가게들이 저마다의 솜씨를 뽐내며 취객을 유혹하고 있다.

먹자골목의 보도블록이 닳도록 드나들다 보니 가게주인들과 한잔씩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다. 가게주인인 나의 술친구들은 ‘40대의 연령, 휴일에는 조기축구회에 열심이고,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사람,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으로 요약된다.

가게주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선 IMF 때보다도 장사가 잘 안돼 본전하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이고, 또 부부가 함께 일하기 때문에 자녀들 교육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잘 나가는 수출산업, IT산업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그리 비싸지 않은 술을 파는 먹자골목에서 술을 마시기를 바라기는 어렵고, 경제의 웃불이 아래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요원하여, 우리 같은 술꾼들이 푼돈으로라도 술을 팔아주는 도리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성 싶다.

민백초등학교, 귀인초등학교에서 귀인중학교로 이어지는 안양의 8학군에서 거주하는 상가주민들은 전업주부를 엄마로 둔 아파트 아이들에 비해 아이의 학업에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한잔 술에 교육 정책을 안주 삼아 욕을 하여 보지만, 우리네 일반시민들이 그 어렵다는 문교정책을 바꿀 능력이 없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자녀 교육을 고민하는 친구들의 하소연에 한편 공감도 하고 또 아파하기도 하면서 술잔은 쌓여만 가고, 술자리가 파할 무렵이 되면 우리 아이들을 입시기계로 만드는데 동조하고 있는 자신이 서글퍼져 우울해 지기도 한다.

얼마전 먹자골목 한자락에 김용붕씨가 이천쌀밥집을 열었다. 먹자골목에서 새로 간판을 다는 집이 자꾸 고깃집으로만 바뀌어 음식의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던 차에 반가운 일이다. 술집동네 친구들의 삶에 대한 걱정, 자식걱정은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희로애락의 한 모습이리라.

“친구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는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인생사의 어려움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사회 중산층의 소박한 소망들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2004-06-04 16:27:50